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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승려교육과 수행

해인사 강원교재에서 ‘도서’ 뺀 성철 스님 옳다

후배들 제대로 된 수행 좌표 설정 위해 남종선 깃발 고쳐 세워
‘육조단경’으로 목표지점, ‘본지풍광’으로 간화선 강령 보인 것
수행자들 길러내는 교육기관이라면 거기에는 목표·강령이 필수

해인사 방장이었던 성철 스님은 남종선 전통을 세우는 과정에서 일반적인 승가대학(강원) 교재인 ‘도서’를 제외시켰다. 사진은 ‘해인사승가대학 편입생 및 신입생의 방부인사’ 봉행 모습. 출처=해인사 홈페이지.
해인사 방장이었던 성철 스님은 남종선 전통을 세우는 과정에서 일반적인 승가대학(강원) 교재인 ‘도서’를 제외시켰다. 사진은 ‘해인사승가대학 편입생 및 신입생의 방부인사’ 봉행 모습. 출처=해인사 홈페이지.

일생을 살아가는 데에 교육은 중요하다. 가정에서의 교육, 학교에서의 교육, 그리고 사회활동 속에서의 교육이 그렇다. 이 셋 중 어느 하나도 중요하지 않은 게 없다. 승려 사회에서도 교육은 역시 중요하다. 교육의 방향이 결국에는 수행의 방향을 결정한다. 시작에 털끝만큼의 차이가 있어도 끝에 가면 천리만큼의 차이가 난다는 말도 있다.

벌써 오래 전의 일이다. 가야산 해인사 ‘강원’에서는 규봉 종밀 선사가 지은 ‘도서’라는 책을 빼고, 돈황본 ‘육조단경’으로 대신했다. 성철 선사께서 ‘돈오’를 선양했음은 세상이 다 안다. ‘도서’는 ‘돈오’로 향하는 수행의 좌표에 벗어난다는 판단에서였다. ‘도서’에 대한 성철 선사의 이런 ‘판단’이나, ‘도서’를 빼는 ‘행위’는 선사로서는 백 번 옳은 일이다.

남종선의 전통이 ‘돈오’임은 문헌자료가 입증한다. 보리달마와 육조혜능을 조사로 삼아 수행하면서 ‘돈오’를 부정하면 자기모순이다. 잘못된 견해에 얽매인 집착을 단박에 깨치면 된다. 거기에 무슨 닦고 말고 할 게 있는가? 낯선 땅에서 동서남북을 헷갈렸더라도 동녘에 해 뜨는 것 보면, 그럼 되었다. 그렇게 ‘돈오’하고 나서 ‘무심’히 제 갈 길 가면 된다. 수행에서 생기는 이런 사례들은 ‘선문염송’과 ‘벽암록’과 ‘경덕전등록’ 등등의 전등사서에 넘쳐난다.

교육제도를 교정하는 것으로, 성철 선사는 남종선의 수행 좌표를 제대로 잡고자 했던 것이다. 제 자신이 본래 부처인 줄 알고, 부처님처럼 세상 살아가라는 것이다. 책상 앞에서 책장이나 뒤적거리고, 물레방앗간 밑에서 한 모금하고 세상사 갑론을박하고, 파당을 지어 문중 운운할 일이 아니다. 부처님이 어떻게 사셨는지는 큰 공부 안 해도 알 수 있다. 선사께서는 ‘보현행원품’을 우리말로 찍어 무수하게 보급하셨는데, 부처 마음으로 무심히 보살행하라는 주문이시다.

필자는 이 글에서 성철 선사의 철학이나, 또는 그 방식의 시시비비를 논하려는 것은 아니다. 교육과 수행이 밀접함을 말하려는 것이다. 출가자에게 수행은 삶이다. 인생이다. 후배들에게 제대로 된 수행 좌표를 설정하게 하려고 남종선의 깃발을 고쳐 세웠다. 돈황본 ‘육조단경’으로 목표지점을 분명하게 했고, ‘본지풍광’이란 책으로 간화선의 강령을 보이신 것이다.

전통 ‘강원’의 커리큘럼도 그런 것이다. 거기에는 목표가 있고, 그 목표 실현을 위한 강령이 있다. ‘법계를 깨치는 것’이 목표이고 ‘보현행원 실천’이 강령이다. ‘비로자나불의 법계 깨침’을 체계적으로 입증하기 위해 청량 국사는 ‘화엄경수소연의초’, 즉 ‘청량소초’를 저술했던 것이다. ‘청량소초’의 내용을 완전하게 독해하기 위해서 ‘원각경대소’ ‘능엄경 계환해’ ‘금강경 간정기’ ‘기신론 필삭기’를 배치했다. 때문에 능력이 되는 사람은 바로 ‘청량소초’만 읽어도 된다.

‘화엄경소초’는 기본적으로 ‘법성종(法性宗)’의 입장에서 여타의 대승과 소승을 수렴하고 있다. 대승에서는 반야중관학파의 ‘공종(空宗)’과 유식법상학파의 ‘상종(相宗)’ 교학을 비판적으로 수렴했다. 한편, 소승에서는 설일체유부의 설을 비판적으로 수렴하고 있다. 그것이 얼마나 제대로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시시비비가 있을 수 있다. 반야와 유식의 입장에서 보면 절대 동의할 수 없고, 또 평행선을 갈 수밖에 없는 교리상의 해석이 역사적으로 현존한다. 그렇지만 분명한 것은 교육의 목표와 과정만은 뚜렷하게 세웠다.

간단하게 그 상이점 열 가지만 말해보자. 법성종과 법상종 사이에는 승(乘)이 하나인가 셋인가의 문제, 인간의 본성이 1성(性)이냐 5성이냐 문제, 심(心)의 진실과 허망의 문제, 진여가 번뇌와 관계하는 문제, 유식 3성의 유무와 상즉의 문제, 중생과 부처의 늘고 줄음의 문제, 진제와 속제의 유무 문제, 생·주·이·멸하는 4상(相)의 변화가 동시이냐 별시이냐의 문제, 근본지와 후득지가 번뇌와 어떻게 관계하는가의 문제, 불신(佛身)이 유위이냐 무위이냐의 문제가 있다.

법성종과 파상종(破相宗, 즉 공종) 사이에도 열 가지 상이점이 있다. 근본 진리로서의 법(法)과 그것의 작용인 의(義)가 진제와 속제의 차원에서 어떻게 같고 다른가 하는 문제, 심(心)과 성(性)의 개념 사용상의 문제, 성(性)을 공으로 볼 것인가 공하지 않은 것으로 볼 것인가의 문제, 지(智)와 지(知)의 차이 문제, 나와 나를 이루고 있는 요소들의 유무 문제, 부정명제와 긍정명제의 효과 문제, 언어와 그 언어가 지시하는 대상과의 관계 문제, 진제와 속제이냐 아니면 그것에 중도제일의제 설명을 보태야 하느냐 마느냐의 문제, 변계소집성과 의타기성과 원성실성이 공인가 유인가의 문제, 부처에게 갖추어진 공덕의 있고 없음의 문제가 있다.

큼직한 문제들만 위에서 나열했다. 이런 문제들은 전통 ‘강원’ 교재를 읽어본 출가자라면 대충은 알아야 할 문제들이다. 좀 더 꼼꼼하게 읽어본 교육 담당자 즉 ‘강사’들은 무수한 문제들을 알고 있을 것이다. 출가자들이 그런 무수한 교리상의 문제에 대해 갈피를 잡을 수 있도록 배치해 놓은 프로그램이 전통 ‘강원’의 커리큘럼이다. “강원이력을 본다”라는 말이 있듯이, 하나하나 밟아가다 보면 소위 초점 또는 영점을 잡을 수 있다. 봄바람에 해토된 보리밭 밟듯이 그렇게 밟아가는 것이다. ‘이력(履歷)’이란 한문의 말뜻이 그런 것이다.

그런데 이것이 다 무너졌다. 그렇게 된 결정적인 원인은 학문의 장에서 한문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한문으로 된 책을 읽는 세월이 아니다. 한문이란 학술적 용어로 말하면 ‘고대한어(古代漢語)’인데, 외국어이다. 성균관에서 한문책으로 공부를 했고, 과거시험 답안지를 한문으로 썼다. 나라의 공문서와 역사를 한문으로 기록했다. 1894년 ‘갑오개혁’으로 모두가 달라졌다.

오늘날 어느 세월에 젊은 출가자가 새잡이로 외국어인 한문을 배우고, 그런 뒤에 한문으로 기록된 전통 ‘강원’의 교재를 읽을 수 있겠는가? 어학이 안 되는 학생을 앞에 놓고 원서강독을 하는 셈이다. 필자 학부 시절, 칸트철학 수업시간에 ‘순수이성비판’을 독일어 원서강독으로 했는데, 수업에서는 2판 서문도 다 못 읽었던 기억이 있다. 그래서 어찌 칸트철학의 전모를 이해할 수 있었겠는가?

고전어를 배워서 그 내용을 이해하는 데에는 무수한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다. 불교의 한문이 되었든 범어 또는 티베트어가 되었든, 내지는 팔리어도 역시 마찬가지이다. 조계종에서는 1990년대 초반에 ‘개혁종단’을 표방했다. 그 속에서 승려교육에 관련된 각 방면의 제도가 정비되었지만, 이상의 문제를 모두 해결하기는 감당이 불감당이었을 것이다.

전통 ‘강원’ 교육에서 갖추었던 ‘성종-상종-공종’의 가닥잡기는 이미 사라졌다. 세월이 그래 사라지는 것은 어찌할 수 없다. 문제는 대안이 없는 것이다. 불교를 학문의 대상으로 연구할 경우라면 어떤 방법이나 입장이 모두 허용된다. 그러나 ‘종단’의 깃발을 내걸고 수행자들을 길러내는 교육기관이라면 거기에는 목표와 강령이 있어야 할 것이다. 가닥 내지 영점을 교단의 교육차원에서 제시해야 한다. 여기에 종학(宗學)이 필요하다.

신규탁 연세대 철학과 교수 ananda@yonsei.ac.kr

[1584호 / 2021년 5월5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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