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요즈음 불교계에서 쓰는 ‘소의경전(所依經典)’이라는 용어는 그 역사가 오래되지 않았다. 지금은 아니지만, 종단을 설립 운영하려면 반드시 해당관청에 등록을 하던 시기가 있었고, 그 경우 필수 구비서류로 단체의 정관이나 규약을 문서로 제출했다. 이런 역사 배경 속에서 불교단체 이름으로 ‘한국불교00종’이나, 또는 ‘대한불교00종’을 내걸었고, 그와 연동해서 본 종의 소의경전은 00경으로 한다는 식으로 종단의 헌법을 만들었다.
‘00종’의 성립과 ‘소의경전’과의 관계적 발상이 언제 누구에 의해 시작되었는지는 학문적으로 엄밀한 검토가 필요하다. 간단히 말해보면 ‘00종’이라는 명칭이 한국 고대 문헌자료에도 일찍이 등장했고, 그 연원이 중국이었고, 그것은 더 나아가 인도에서 유행하던 부파(部派)의 전승과 연결된다. 그 과정 속에서 소의경전이라는 발상이 생겼다.
필자는 이상과 같은 지난 역사를 염두에는 두되, ‘종학(宗學)’ 차원에서 ‘소의경전’을 언급하는 이 지면에서는 지금의 한국 현실을 말해보려는 것이다. 봉건왕권시대의 우리나라 불교 행정은 많은 부분이 왕권에 예속되었다. 특히 승려의 출가 허가는 더욱 그랬다. 그러나 서유럽에서 시작된 근대적 의미의 ‘국가’가 확산되면서 정교분리의 원칙이 확산되었다. 최근 대구시가 운영하는 합창단에서 기독교의 찬송가를 공적 자리에서 공연했다가 불교계의 지적으로 사과를 했던 것도, 정교분리 원칙 위배와 바로잡기의 한 사례였다.
이 땅에서 정교분리 원칙을 들여온 시기는 일제강점기와 맞물린다. 서양의 근대를 선제적으로 수용했던 일본은 조선총독부를 설치하여 그 원리를 조선에 들였다. 당시 조선총독과 대만총독은 항상 일본 본토 내각의 각종 법령을 옮겨왔는데, 그런 배경 때문에 종파불교의 전통이 강했던 일본불교계의 근대적 제도가 이 땅에도 옮겨졌다. 이때부터는 ‘00종’을 설립하여 종헌을 만들 때이면 관습인양 ‘소의경전’을 특정하기 시작했다.
뒤틀린 우리의 근대는 좋지 못한 그림자를 각 종단 종헌 조항에도 흔적으로 남겼다. 종파불교라는 특수상황은 일본에만 유독 존재하는 사례로, 그들은 종파별로, 중심 삼는 경전도 다르고, 가사를 비롯한 복장도 다르고, 계단도 다르고, 재산도 다르고, 본존도 다르고, 수행법도 다르고, 예불의식도 다르고, 신도제도도 다르다. 하나에서 열까지 모두 다르다.
그런데 전통이 저들과 달랐던 이 나라 불교였지만, 이승만 정권 시절 ‘조계-태고’로 전통불교가 분열되고, 다시 그 밑에서 수많은 종단이 갈려나오면서, 그때마다 종헌을 제정하여 모두들 소의경전을 지정했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스님이나 신도를 막론하고 종단 구성원들 사이에 소의경전은 아랑곳할 게 못 된지 오래다. 자유롭다.
조계종은 조계 혜능에서 자유롭고, 태고종은 태고 보우에서 자유롭고, 천태종은 천태 법화에서 자유롭고, 화엄종은 현수 화엄에서 자유롭고, 삼론종은 중론 백론에서 자유롭고, 원효종은 원효 화쟁에서 자유롭다. 이 자유로움이 좋은 것인지 나쁜 것인지를 평가하기에 앞서, 기왕 종단을 세워 종헌으로 소의경전을 특정했으니 명실상부하게 활용하기를 기대한다. 소의경전의 좋은 점이 무엇인지를 이하에서 두어 가지 말해보고자 한다.
첫째, 인생을 사는 데에 도움이 된다. 인생이 무엇인가를 일반화해서 말하기가 어려우니 필자의 입장에서 말해보겠다. 산다는 것이란 선택의 연속인 것 같다. 유년기에는 주어지는 일이 많았지만 그런 속에서도 나름 선택을 하면서 살았다. 그 후 학창기를 지내면서 소위 가치관이라는 것이 확립되어감에 따라 스스로 선택할 일이 많아졌다. 청장년기가 되어서는 선택할 폭도 넓어졌고 그런 만큼 번민도 늘었다. 이제 노년으로 접어드니 줄기는 했지만 그래도 선택할 일들이 없지는 않다. 대신 번민은 많이 줄었다.
소의경전이란 의지처가 되는 책이라는 뜻인데, 그런 책이 있으면 인생살이에서 만나는 선택에 도움이 된다. 주체적인 선택은 말할 것도 없고, 많은 경우가 그랬듯이 ‘팔자’나 ‘운명’으로 돌리고 싶은 생의 한 자락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는 데에 도움이 되었다. 또 이미 선택해 살아온 인생을 잘했다고 추인해주는 역할도 했다.
불교철학자로서 ‘화엄경’과 ‘원각경’과 그 관련 주석서들은 연구에 갈피를 잡을 수 있게 했다. 그 책들 덕분에 직업 철학 교수로서, 동서고금의 각종 철학이론을 필자 나름 정리할 수 있었다. 나아가 당면의 세상과 실존의 인간을 철학적으로 설명하기도 했다. 그런데 인생을 사는 데에는 선사 스님들의 어록이 더 큰 도움이 되었다. 심지어는 부처에게도 매이지 않고 자기에게조차도 매이지 않는 선사들의 삶, 그 생생한 삶을 투명한 언어로 기록한 선어록 독서는 언제나 나를 행복하게 했다. 필자에게 경전 읽기는 직업인으로의 고단한 ‘노동’이었지만, 선어록 읽기는 일상인으로의 편안한 ‘휴식’이 되었다.
둘째, ‘불교’ 내부에 있는 다양한 주장 사이의 모순 해소에 도움이 된다. 부처님의 가르침이라는 뜻으로의 ‘불교’ 속에는 긴 역사와 넓은 지역만큼이나 다양한 가르침이 쌓여있다. 한 가지 사례로, 인간을 어떻게 볼 것인가에 대해서도 불교라는 한 이름 아래 달리 공존한다.
정토종에서 말하듯이 죄업을 지고 태어난 존재인가? 법상종에서 말하듯이 일부 사람은 아예 깨닫지도 못할 존재인가? 열반종처럼 모든 사람이 성불의 씨앗이 있는 존재인가? 화엄종이나 선종처럼 인간은 물론 무정물도 부처 될 수 있는 존재인가?
개인적으로는, ‘불교’ 내부에 있는 다양한 주장끼리의 모순을 해소해가면서, 그렇게 정제된 가치와 이념을 함께 구현할 공동체 즉 종단과 연대하고 산다. 그런 속에서 고단한 삶도 위안 받고, 자신이 가는 이 길이 잘 가는 길인지 점검도 받는다. 결과적으로 자신이 속한 공동체와 그 속에 살아가는 자신에 대한 자존감도 높아진다.
한편, 세상은 혼자 살 수가 없다. ‘재가’해서 집에서 살던, ‘출가’해서 절에서 살던 모여 살게 마련이다. 집이던 절이던 설사 ‘독살이’를 한다 해도 다양한 사회적 관계망 속에 살게 마련이다. 필연적으로 관계망 속에 사는 것이 인생이라면, 기왕이면 좋은 관계망을 만들어 그 속에 함께 살아야 한다.
좋은 관계망은 우리를 안전하게 하고, 고단한 삶에 활력을 불어넣는다. 유교의 소의경전으로 긴 세월 애독되어 온 ‘논어’에는 ‘리인위미(里仁爲美)’로 시작되는 대목이 있다. ‘어진 사람이 모여 사는 마을이 살기 좋다. 그런 곳을 골라 살지 못한다면 어찌 지혜롭다 할 수가 있겠는가!’라 했다. ‘성경’을 소의경전 삼아 살아가려는 이들은 정교분리의 대한민국에서, 나랏돈으로 운영되는 시립합창단에서, 찬송가를 공연하는 것이 위법인 줄 과연 몰랐을까?
신규탁 연세대 철학과 교수 ananda@yonsei.ac.kr
[1591호 / 2021년 6월30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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