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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 야마시로 아사코의 ‘엠브리오 기담’

기자명 박사

기담으로 고통의 원인을 분석하다

욕망이 만든 세계가 기담 배경
여행 작가의 이상한 여행기로
인간이 고통 만든 과정 보여줘
고통의 정체 똑바로 볼 때 해결

여름에는 역시 ‘기담’이다. 기이하고 무서운 이야기를 읽다보면 등골이 오싹해지고 더위는 한발 물러선다. 기담이 무서운 이유는 괴물이나 귀신같은 정체모를 존재들이 출몰하기 때문만은 아니다. 인간의 어두운 면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밝고 따스한 인간세계의 뒷면은 으스스하다. 감추어져 있는 것은 감춘 이유가 있기 마련. 욕망과 원한이 소용돌이쳐서 만들어낸 세계가 기담의 배경을 이룬다.   

이 책은 길치인 여행작가 이즈미 로안과 그의 심부름꾼 미미히코의 이상한 여행기다. 그들은 길을 잃을 때마다 수상쩍은 마을에 도착한다. 이중 하나의 에피소드인 ‘끝맺음’은 인간이 스스로 고통을 만들어내는 과정을 보여준다. 

그들은 여행 도중 목이 가늘고 흰 닭을 한 마리 만난다. 밥을 조금 나눠준 인연으로 졸졸 따라다니는 이 닭을 어쩌다보니 여행 동무 삼은 이들은 ‘아즈키’라는 이름도 지어준다. 미미히코는 비가 오면 아즈키를 보따리 속에 넣어 품에 안고 다닌다. 추위와 피로를 아즈키의 체온으로 견디면서. 

빗속을 걸어가던 그들은 낯선 바닷가의 작은 마을을 발견한다. 하룻밤 묵을 곳을 청하자 마을 사람들은 빈 집으로 안내하는데, 그곳에서 이상한 것을 발견한다. 벽과 천장의 나무옹이들이 묘하게도 사람 얼굴처럼 보이는 것이다. 이즈미 로안은 그저 착각일 뿐이라며 무시하지만, 미미히코는 눈을 뗄 수가 없다. 

둘러보니 그 마을의 모든 것에서 사람의 얼굴이 보인다. 나뭇가지, 땅바닥에 고인 물웅덩이, 꽃잎, 벌레…. 문제는 그들이 먹는 주식인 생선과 음식에서도 사람의 얼굴이 보인다는 것. 생선은 괴로워 비명을 지르는 사람의 얼굴을 하고 있고, 쌀밥은 마치 작은 머리를 잘라 잔뜩 쌓아놓은 것처럼 보인다. 빗속을 걷느라 감기에 걸려 앓아누운 미미히코는 도저히 아무 것도 먹을 수가 없다. 이즈미 로안은 사람 얼굴이 보일 뿐, 진짜 사람은 아니지 않느냐고 어르고 달래지만 미미히코는 이 마을의 모든 사물에 뭔가가 깃들어있는 것 같아 죄책감이 느껴진다며 먹기를 거부한다. 

이러다 굶어 죽는 게 아닐까 싶어졌을 때, 문득 미미히코는 자신이 먹을 수 있는 것이 하나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하얀 닭 아즈키. 그는 자신의 부름에 순진하게 다가온 아즈키의 목을 졸라 죽이고, 냄비에 끓여 허겁지겁 먹는다. 아즈키의 고기 덕에 기운을 차린 그는 마을을 벗어날 체력을 회복하지만 이즈미 로안의 경멸어린 시선을 견뎌야 했다. 오랜 시간이 지난 후 그는 보따리 속에서 아즈키의 하얀 털을 발견하고 오열한다. 그제야 자신이 저지른 짓의 의미를 깨닫게 된 것이다. 

있는 그대로의 세상에는 아무 문제가 없다. 사람이 ‘상’을 만들고 의미를 부여할 때 고통이 생긴다고 부처님은 말씀하신다. 없는 ‘상’을 씌우고, 이름을 붙이고, 집착하고 밀어내면서 우리는 이 세상과 삐그덕거린다. 평범한 물고기와 쌀알에서 사람의 얼굴을 읽어내고 온갖 저주와 환생과 원한의 의미를 상상하면서 미미히코는 스스로 고통을 만들어낸다. 자신이 만들어낸 고통에 짓눌려 가족과 같은 아즈키의 목숨을 빼앗는다. 유대감을 주고받았던 존재를 죽여 그의 시체를 먹는 악귀와 같은 짓을 스스로 선택하는 것이다. 

미미히코만 그럴 것인가. 전도몽상은 중생의 특징이다. 고통이 끊임없이 재생산되는 사슬에 ‘명색’이 있다. 눈을 떠 보면 그저 꿈일 것들. 있는 그대로 보면 그저 자연스러울 것들. 물 흐르듯 흐르는 것들. 그것들의 한구석을 툭 잘라내 없는 의미를 만들고 없는 얼굴을 보고 있는 것은 아닌지, 스스로 살펴봐야 할 것이다. 이것이 진짜 ‘무서운 이야기’다. 귀신과 괴물에게 쫓기는 것보다 더 무서운 것은 괴물의 정체다. 고통의 정체다. 그리고 부처님은 알려주셨다. 그 무서운 것을 똑바로 보아야 고통을 해결할 수 있다고. 그저 여름날 더위를 식히려고 재미로 읽는 기담에도 일말의 진실이 담겨있다.

박사 북칼럼니스트 catwings@gmail.com

[1596호 / 2021년 8월4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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