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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 지혜 ④

기자명 박희택

반야경, 반야중관과 밀교진언의 회통

실존적 존재가 괴로움 없애면
진실해져 허망 자체가 없게 돼
대신주에서 신 정확한 의미는
신비 아닌 신묘이며 또한 심비

우리가 반야바라밀다로 지혜의 완성에 이르러 깨달음을 얻게 되면 온갖 괴로움을 없애게 되고(除一切苦), 진실하여 허망하지 않게 된다(眞實不虛). 제일체고는 ‘반야심경’ 들머리의 도일체고액(度一切苦厄, 온갖 괴로움과 재앙을 건넘)과 같은 것이다.

‘반야심경’의 두괄적 말씀을 총결적으로 재론한 것이라 하겠다. 총결분이다 보니까 하나를 더 부가하였는데, 그것이 진실불허이다. ‘진실불허’ 이 네 글자가 어느 날 큰 울림이 되어 자신에게 다가와야 지혜공부가 진척된 것이라 할 수 있다.

같은 반야부 경전인 ‘금강경’의 이상적멸분과 구경무아분에는 무실무허(無實無虛)라는 구절이 나오는데, 여래의 법(이상적멸분)과 깨달음(구경무아분)에는 실(實)과 허(虛)가 없다는, 여래의 법과 깨달음은 실과 허라는 이분법을 넘어선다는 말씀이다.

무실무허(금강경)는 ‘무실’의 표현으로 말미암아 진실불허(반야심경)와 모순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무실무허하여 진실불허되는 것이다. 제일체고하면 실과 허를 동시에 넘어섰기에 진실하고, 진실하기에 불허하다. 정리하면 제일체고--무실무허--진실불허의 과정을 상정할 수 있겠다.

제일체고와 진실불허는 병렬의 관계로 이해되기도 하지만, 인과의 관계로 보는 것이 더 자연스럽다. 제일체고하면 진실불허하게 되는 것이다. 진실불허가 반야바라밀다의 최종적 공능이다. 실존으로서의 개개의 존재자가 온갖 괴로움을 없애면, 마침내 진실해져서 허망이라고는 없는 상태가 되는 것이다. 공성을 깨치면 온갖 괴로움을 없앨 수 있으며, 공성을 깨친 이는 진실을 정견하여서 허망에 빠지지 않게 된다는 가르침이다.

(7) 반야바라밀다(지혜의 완성에 이르는 것, 깨달음)는 진언으로 총지(摠持)된다. 제일체고와 진실불허를 가능하게 하는 반야바라밀다는 모든 법을[總] 갖춘 것이므로[持], 반야심경은 “반야바라밀다는 가장 신묘한 주문이고, 가장 밝은 주문이며, 위없는 주문이고, 무엇과도 견줄 수 없는 주문이니, 능히 온갖 괴로움을 없애고, 진실하여 허망하지 않다(般若波羅蜜多 是大神呪, 是大明呪, 是無上呪, 是無等等呪, 能除一切苦, 眞實不虛)”고 설하고 있다.

이것은 반야중관사상과 밀교진언사상이 회통함을 보여주며, ‘반야심경’은 이를 극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지혜와 깨달음과 진언(주문)이 하나로 연결됨을 보여 준다. 구마라집이 ‘반야심경’의 경제를 ‘마하반야바라밀대명주경(摩訶般若波羅蜜大明呪經)’이라 번역한 것은 이 회통의 측면을 고려한 것이 아닌가 한다. 달라이라마는 보통의 소질을 가진 수행자에게는 공성으로 설명하고, 최상의 소질을 지닌 수행자에게는 진언의 형태로 공성을 간결하게 설명한다고 해설하고 있다(주민황 역, 달라이라마의 반야심경, 무우수, 2003, 159쪽).

주(呪)는 주문(呪文, mantra)을 말하는데, 후기대승불교인 밀교에 이르면 주문은 진언(眞言, dhāraṇī)으로 개념적 발전을 이룬다. 진언은 진실한 말이고, 진실한 말은 말의 힘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진언은 총지(總持)·능지(能持)·능차(能遮) 등의 뜻을 갖는다. 반야바라밀다는 보살의 구경열반과 삼세제불의 득아눗다라삼먁삼보리를 가능하게 하는 총지와 능지와 능차이기에 진언이 된다.

대신주(大神呪)의 신(神)은 현장 스님이 포함시킨 것이다. 산스크리트어에는 대주(大呪, mahāmantro)로 되어 있어 ‘신’에 해당하는 용어는 없다. 현장 스님은 대주로 표현하기에는 아쉬움을 느껴 대신주로 번역한 것이다. 현장 스님이 의미한 신(神)은 신비(神秘, mysticism)가 아닌 신묘(神妙)이며, 신묘이기에 심비(深秘, esotericism)로 이해되어져야 할 것이다. 심비(에소테리시즘)는 밀교의 역어이기도 하다.

(8) 반야바라밀다주 즉 “아제! 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 사바하!(揭帝! 揭帝! 般羅揭帝! 般羅僧揭帝! 菩提 僧莎訶!)”는 지혜의 완성(깨달음)의 행복을 노래하고 있다. 이 진언의 산스크리트어는 “가떼 가떼 빠라가떼 빠라상가떼 보디 스와하(gate gate pāragate pārasaṃgate bodhi svāhā)”인데, “가는 이여! 가는 이여! 피안으로 가는 이여! 피안으로 완전하게 가는 이여! 큰 지혜를 깨쳐 행복하여라!”로 번역하는 것이 합당하다고 할 것이다. 그 까닭은 이어서 밝히려 하거니와, 큰 지혜를 깨쳐 피안으로 완전하게 가는 이의 완전한 행복이 손에 잡힐 듯하다.

박희택 열린행복아카데미 원장 yebak26@naver.com

[1599호 / 2021년 9월1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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