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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베토벤의 칸타타 ‘조용한 바다와 즐거운 항해’

기자명 김준희

채워도 채워지지 않는 갈애로 시작하는 칸타타 

19세기 초 낭만주의에도 합창 제시한 고전주의 완성자 베토벤
괴테가 쓴 시에 영감 받아 언어로 그려진 세계 운율로 담아내
청력 상실 운명 맞서 싸우던 베토벤 고통…합창곡에 녹아 있어  

독일 본 중앙우체국 앞 베토벤 동상. 
독일 본 중앙우체국 앞 베토벤 동상. 
1802년 베토벤이 직접 쓴 ‘하일리겐슈타트의 유서’.
1802년 베토벤이 직접 쓴 ‘하일리겐슈타트의 유서’.

베토벤의 칸타타 ‘조용한 바다와 즐거운 항해, Op.112’는 같은 이름의 괴테 시를 합창 음악으로 탄생시킨 곡이다. 이 곡은 오케스트라와 혼성 4부 합창을 위해 작곡되었는데, 베토벤이 1812년 괴테를 만난 후 그의 문학에 관심을 가지게 되어, 그의 시를 탐독한 후에 작곡하게 되었다. 이 곡에는 베토벤의 ‘장르에 대한 갈망’이 담겨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기악 음악에 있어서 그 누구보다도 모범적인 행보를 보였던 고전주의의 완성자 베토벤이 낭만주의의 중심 장르인 ‘예술가곡(Lied)’을 합창과 오케스트라를 위한 작품으로 확장시킨 것은 베토벤의 후기 작품에서 찾을 수 있는 또 다른 면모이다. 동시에 합창을 포함한 완전한 오케스트라 교향곡의 모습을 꿈꾸는 베토벤의 음악적인 철학을 느낄 수 있다.

19세기 초반 낭만주의 시대에는 성악과 피아노를 위한 예술가곡이 유행했다. 예술가곡의 가사는 독일 문인들의 낭만주의 서정시에 음악을 결합시킨 것으로, 시대적인 배경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산업혁명 이후 피아노가 대량 생산되어 보급되고, 출판업이 발전하여 악보가 유통되기 시작했고, 경제력이 있던 중산층이 예술에 더 많은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동시에 일반 대중이 음악회를 더 많이 찾는 시기였다.

이런 시기에 예술가곡을 바탕으로 19세기 서정적 합창 음악의 발전적인 모델을 제시한 베토벤은 진정한 고전주의의 완성자이자 낭만주의의 예견자라고 할 수 있다. 대규모 합창단이 대략 1830년대 이후 성행하게 되었으므로 이 작품은 낭만주의의 미래를 안내하며, 동시에 우리에게는 익숙한 교향곡 9번 ‘합창’ Op.125의 마지막 악장을 떠올리게 한다.

괴테의 두 개의 시 ‘고요한 바다’와 ‘즐거운 항해’는 모두 1795년에 지어져서, 이듬해 ‘문예연감’에 나란히 실렸다. 괴테는 이 두 시에서 서로 다른 느낌과 상황의 강한 대비를 주었기 때문에, 베토벤은 음악적 아이디어를 생성해 내기 수월했다. 그는 괴테에게 “이 두 개의 시 사이에 존재하는 대비는 음악으로 표현해도 그 효과가 변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저의 음악이 당신의 시에 잘 알 수 있다면 저에겐 더 이상의 기쁨은 없을 것입니다”라는 내용의 편지를 보냈다.

이미 제목에서부터 독일어로도 ‘고요한 바다’는 ‘Meeres Stille’로 부드럽고 정적인 느낌이며, ‘즐거운 항해’는 ‘Glückliche Fahrt’로 불안정하지만 역동적인 운율의 느낌을 준다.

언제 뿜어낼지 모르는 무시무시한 에너지를 담고 움직이지 않는 바다는 다음과 같이 묘사 되고 있다. ‘물속에 깊은 고요가 깃들고/ 바다는 잠잠하다/ 사공은 근심스럽게/ 고요한 수면을 둘러본다/ 어느 곳에서도 바람 한 점 불지 않고/ 죽음 같은 고요가 무섭게 밀려온다/ 끝없이 넓은 바다에/ 물결 하나 일지 않는다.’

괴테가 이탈리아 여행 중에 겪었던 내용을 떠올리며 쓴 이 시는 그의 서간집에 다음과 같이 설명되고 있다. “카프리 뒤에 있는 사이렌 암벽은 우리에게 잊지 못할 인상을 남겼고, 우리는 이에 홀려서 완전히 맑은 하늘 아래서 일어나는 신기한 일, 그리고 완전한 바다의 고요, 말하자면 이 바다의 고요로 말미암아 거의 가라앉아 버릴 것 같았습니다.” 요동치지 않는 고요한 바다는 자연의 묘사인 동시에 언어적 회화로 표현된 괴테의 정신이었다.

베토벤은 이 부분의 시작을 D장조의 안정된 으뜸화음으로 고요하게 시작했다. 네 성부가 빚어내는 정제된 선율은 큰 움직임 없이 진행되는데, 시의 맨 첫 부분인 ‘물속에 깊은 고요가 깃들고/ 바다는 잠잠하다’를 반복한다. 잠잠한 바다에 대한 두려운 감정을 극대화 한 것이다. 오케스트라의 f(포르테, 세게 연주하라는 뜻)로 시작하는 후반부는 상행과 하행을 반복하며 물결치는 바다와 그 위를 누비는 즐거운 항해사의 마음을 표현한 것만 같다.

어쩌면 괴테의 시와 베토벤의 음악은 ‘해결하기 어려운 하나의 과제’에 대한 갈망과 그것의 ‘자연스러운 해결’을 나타내는 것일지도 모른다. 극복하기 어려운 현실의 무언가에 대한 끝없는 욕구와 채워지지 않는 욕심, 그리고 뒤따르는 고통이 이 칸타타의 첫 부분이 아닐까? 물론 그 고통의 원인은 ‘번뇌’에서 기인한다. 그 번뇌의 가장 근본은 ‘갈애(渴愛)’이다. ‘담마빠다’의 ‘갈애의 품’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나온다.

“세상에서 이기기 어려운 갈애, 그 저열한 것을 이기는 자가 있다면, 그것으로부터 온갖 근심들이 떨어진다. 마치 물방울이 연잎에서 떨어지듯이.”

윤회의 근심과 고통의 뿌리를 ‘갈애’라고 밝히는 내용이다. 갈애의 번뇌는 극복하기 어려운 번뇌지만, 그 갈애를 이기면 온갖 근심과 고통이 사라지게 되는데, 그것을 연잎에 맺힌 물방울이 떨어지는 것으로 비유하고 있다.

갈애가 극복되면 온갖 근심과 걱정, 그리고 고통이 연잎의 물방울이 떨어지듯 상당히 자연스럽게 떨어지게 된다. 30대부터 귀가 잘 들리지 않아 고통의 시간을 보내며 자신의 운명에 맞서 싸우고 도전하던 베토벤이, 청력상실에서 오는 고통과 번뇌, 그리고 음악가로서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운명을 극복하고 빚어낸 소중한 음악이 합창곡에 전부 담겨 있는 것 같다.

음악 역사상 가장 위대한 작곡가로 꼽히는 베토벤은 비록 불교와는 인연이 없었을지라도, 부처님의 말씀처럼 속박된 삶에서 스스로 벗어나 진정한 자유를 누릴 수 있었던, 가장 불교와 가까운 위대한 작곡가라고 생각된다. 그의 후기 작품 속에는 그의 바른 견해와 용기가 담겨 있다. 고요한 바다가 품은 두려움과 긴장이 말끔히 가시고, 바람에 자연스럽게 몸을 맡긴 항해사는 베토벤 자신이 아니었을까? 서양 음악사의 수많은 합창 작품 중, 가장 문학적 아름다움이 돋보이는 합창곡을 들으며 바다 위로 작디 작은 번뇌와 근심의 물방울을 떨쳐내는 상상을 해본다.

김준희 피아니스트 pianistjk@naver.com

[1605호 / 2021년 10월20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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