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계교의 창시는 신행 스님(540~594)이 고안한 특출한 사상이다. 말법관에 의지해 모든 불교를 시(時)·처(處)·인(人), 삼계(三階)로 분류했는데, 이는 교법 가치에 의존하기 보단 시대적 기능을 중시했다. 시기 상응의 실천적 포교 방법으로 당시 불교를 지양하며 발전한 종파다.
이렇게 훌륭한 사상을 지닌 삼계교가 왜 근대에 이르러 빛을 발하게 됐을까. 그 원인으로 ‘삼계교 탄압’이 지목되고 있다.
삼계교는 수대(隋代)의 신행 스님에 의해 창시돼 당대(唐代)에 걸쳐, 불교의 위기를 극복하고 민중을 기반으로 교단을 재구성하려고 했던 혁신적인 불교운동이다. 하지만 이러한 삼계교 사상은 다섯 차례에 걸친 정부의 탄압으로 역사 뒤안길로 스러져 갔다.
역사의 흔적은 종교사·문학사·미술사 등 980년경까지, 400~500여년을 유지했으나 그 이후론 활동을 전혀 찾아볼 수 없다. 삼계교 실태를 보여주는 기록은 600~700년대 ‘개원석교록’ ‘역대삼보기’ ‘대주간정중경목록’ 등 활동 금지를 전하고 있는 것이 전부다. 그러니 정체를 파악하기가 불가능한 종파였다. 어찌됐든 이는 이후에 자세히 논하기로 하자. 지금은 근래 발견에 대한 전후 사정만 살펴보기로 한다.
그렇다면 근래 삼계교 연구 상황은 언제 뚜렷하게 드러난 것일까. 이는 1900년대 이르러 둔황 천불동 석굴(막고굴제16~제17굴) 책임자 왕 도사(왕원록)가 막고굴 제16굴을 수리하던 중 다량의 고문서를 발견하면서부터였다. 이후 1915년부터 일본의 시취경휘(矢吹慶輝)가 대영박물관의 ‘둔황출토고사본’(스타인 모집분)과 프랑스 파리국민도서관장, 둔황출토고사본(페리오 모집분), 북경경사(北京京寺)도서관장 둔황본 등을 수집해 연구성과가 1922년 도출됐다. 하지만 다음해 관동대지진으로 논문 전체가 소실됐고, 각고의 노력 끝에 이듬해인 1924년에 완성하기에 이른다.
여기서 잠깐 스타인과 페리오가 천불동의 관리인인, 왕 도사를 매수해 각기 자국으로 실어간 고문서 실황을 간략히 알아보자. 영국의 스타인이 둔황에 도착해 1907년 3월부터 한문문서 8102점을, 여기에 단편을 더하면 1만여점을 1~3차에 걸쳐 가져간다. 대부분이 한문문서다. 하지만 이외에 고지지(古地志)·도교경전·의·약학·호(戶)적·전적(田籍)·사원조직·사회경제사학 등 고문서가 포함돼있다.
프랑스의 페리오는 1908년 2월 둔황에 도착한다. 그는 중국어가 유창했다. 왕 도사로부터 석실 안 조사를 허락받았고, 동양학자였던 그는 하루 만의 조사로 고문서의 가치를 빠르게 간파했다.
이후 한문 경전을 위시로 이란계·인도계 문서도 포함하고 있을 것이라 추측했고, 20여일 정도에 브라흐미·토하라·투르크·티베트문서와 불전 이외의 한문문서 등 5000여점을 선정해 자국으로 가져간다. 석실(石室) 유서의 정수가 프랑스로 건너가게 된 과정이다.
후일, 중국인들은 둔황에서 도둑맞은 유물이라 해 이를 ‘둔황겁여록(敦惶劫餘祿)’이라 불렀다. 스타인과 페리오 활약으로 나머지 문서 9871점은 중국 정부가 북경도서관으로 옮긴다.
왕 도사는 교활하게 또다른 은닉 경권을 일본 오타니 탐험대에 넘긴다. 이렇게 일본인들도 귀중한 문서를 지니게 된다. 왕도사의 최초 방문객은 러시아 오브르체프이다. 하지만 그는 고사본 두 꾸러미 정도의 수확만 있었고 러시아 올덴부르그는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시작될 무렵, 천불동벽화를 조사한 계기로 상트페트르부르크의 에르미타주미술관에 1만여점 둔황문서를 지니게 된다. 이외에도 1914년 스타인이 재차 방문했을 때 왕 도사는 경전 600권, 다섯 상자에 가까운 고문서를 양도했다고 한다. 미국인 랭든 워너도 석굴 벽화를 절단하고, 120cm의 반가좌보살채소상을 도굴했다고 전한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론 다행스러운 일이다. 1934년 중국문화혁명 시기, 이 자료들이 중국에 있었다면 모두 소각돼 아예 삼계교는 세상 빛을 보지 못했을 수도 있다. 세계사 혼란기였던 제국들의 강탈과 1차 세계대전 등 당대 흐름은, 둔황 유서 발견으로 반전됐고 금세기 들어 동양학 발전을 이룰 수 있는 크나큰 계기가 된 것도 아이러니컬하지만 틀림없는 사실이다.
무엇보다 자칫했으면 뒤안길로 사라질 뻔한 삼계교의 사상이 후세에 전하게 된 건 일본의 시취(矢吹) 덕분이다.
법공 스님 동국대 경주캠퍼스 전 선학과 겸임교수
hongbub@hanmail.net
[1607호 / 2021년 11월3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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