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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 이음성구아

기자명 이제열

부처님 음성도 버려야 할 뗏목

음은 단순한 소리가 아닌
부처님 설한 가르침 지칭
일체 모든 법은 명칭일 뿐
법, 실재하지 않는다고 봐

대승불교권에서 가장 큰 영향을 끼친 경전을 거론한다면 ‘금강경’이라 해도 무방할 것이다. ‘금강경’은 불립문자를 내세우는 선종에서도 소의경전으로 삼을 만큼 널리 신봉되어왔다. ‘금강경’의 핵심은 일체의 상(相)을 여읜 마음으로 머묾이 없는 보시를 행하라는 데 있다.

이 경에서 가르치는 상은 세 가지의 뜻을 지니는데 하나는 형상의 뜻을 지닌 니미따(nimitta)의 상, 또 하나는 특성의 뜻을 지닌 락샤나(lakṣaṇa)의 상, 나머지 하나는 생각의 뜻을 지닌 산냐(saṁjñā) 상이다. 이 가운데 ‘금강경’에서 주로 강조하고 있는 상은 세 번째 산냐 상이다. 주목할 점은 불교에서 생각이라는 의미의 상은 좋은 의미로 쓰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중생에게 상은 수행을 통해 깨닫고 극복해야 할 번뇌의 성격을 지닌다. ‘금강경’에서 극복해야 할 상들을 대략 열거하면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 제도상, 법상, 비법상, 체득상, 설법상, 일합상 등이다. 부처님의 무상정각이란 이러한 모든 상으로부터 벗어난 것을 말한다.

대승경전을 접하다보면 경전마다 사구게(四句偈)가 나온다. 사구게는 부처님께서 경을 설하시다가 핵심내용을 네 구절의 시 형식으로 읊으신 것이다. 사구게는 당연히 ‘금강경’에도 등장한다. ‘금강경’에는 여러 사구게가 등장하는데 그중 소리와 관련해 ‘약이색견아 이음성구아 시인행사도 불능견여래(若以色見我 以音聲求我 是人行邪道 不能見如來)’라고 했다. 만약 형상으로써 나를 보려거나 음성으로 나를 구하려 한다면 이는 삿된 길을 가는 것이라 능히 여래를 보지 못하리라는 의미다.

이 사구게는 위에서 열거한 ‘금강경’의 여러 상 가운데 부처님의 몸에 해당하는 신상(身相)과 음성에 해당하는 설법상(說法相)과 관련된 게송이다. 이 게송을 보충 설명하면, 부처님의 몸을 부처로 삼거나 부처님의 음성으로 설해진 내용을 설법으로 삼지 말라는 것이다. 부처는 모습이 없고 법은 설해질 수 없다는 것이 이 게송의 의미다. 게송의 ‘이음성구아’에서 음(音)은 단순한 소리를 뜻하는 것이 아닌 부처님의 설법을 가리킨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부처님이 이루신 깨달음 속에는 깨달은 내용으로써의 특정한 진리가 있을 거라 여긴다. 그리고 부처님은 그 내용을 중생들에게 설하여 팔만사천 경전이 생겨났다고 믿는다. 그런데 ‘금강경’은 이와 같은 엄연한 사실을 부정하고 있는 것이다. 더구나 한 술 더 떠 ‘비설소설분(非所說分)’에서는 만약 누가 여래가 법을 설한 바가 있다고 말한다면 이는 여래를 비방하는 것이라고 말하기까지 한다.

정말 불교를 웬만큼 공부하지 않고서는 수용하기 어려운 교설이다. 그렇다면 ‘금강경’에서는 왜 이렇게까지 부처님이 스스로 하신 설법에 대해 부정을 하고 있는 걸까? ‘금강경’에서는 일체의 모든 법은 명칭일 뿐 법은 실재하지 않는다고 보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법은 실재하지 않으므로 법에 따른 특별한 진리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본다. 이른바 법무아(法無我)이기 때문이다.

불교에서 말하는 법이란 무엇인가? 연기된 오온 십이처 십팔계로써, 세상에 펼쳐진 물질과 정신의 통칭이다. ‘금강경’에서는 바로 이러한 법들은 마침내 공이며 무아이며 무자성으로 실체가 없는 것이라고 강조한다. 이에 따라 오온이니 십이처니 십팔계니 물질이니 정신이니 하는 온갖 법들은 다만 명칭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법속에는 중생들에게 일러 줄만한 내용도 깃들 수 없게 된다. 이에 따라 법도 가히 설해질 수 없게 된다. 법이 실체가 없는데 어찌 설할 게 있겠는가? ‘금강경’은 철저히 법무아(法無我)를 강조하는 교리이다. 법무아의 입장에서는 부처님의 언설은 성립하지 않는다. 법무아이므로 비소설(非所說)이다. 이 때문에 부처님이 만약 누가 여래가 설할만한 법이 있고 드러낼만한 특별한 진리가 있어 설법을 했다고 여긴다면 이는 여래를 비방한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불자는 부처님의 음성, 즉 설법에 의지해야 한다. 그러나 그 설법은 법의 무아성, 공성, 무자성성을 깨닫게 하기 위한 방편이다. 이 때문에 설법도 언젠가는 버려야 할 뗏목에 불과하다. 법이 실재한다는 집착을 버리게 하기 위해 법을 설할 수밖에 없었던 부처님의 심정과 노고를 아는 사람이 몇이나 될 것인가? 새삼 법이 없는데 법을 설하신다는 무법설법(無法說法)이라는 ‘화엄경’의 말씀이 함께 떠오른다.

이제열 법림선원 지도법사 yoomalee@hanmail.net

[1607호 / 2021년 11월3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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