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은 참된 앎을 지향하고, 종교는 궁극적 진리를 말한다고 한다. 참된 앎이 궁극적 진리와 다르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다고 이 둘이 같다고 말하지는 않는다. 만약 이 둘이 같다면 철학이 종교이고, 종교가 철학이 될 터이니, 굳이 이 둘을 구분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철학과 종교는 공통분모가 많기는 하지만, 굳이 따져보면 종교가 그 범위가 훨씬 넓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종교는 경험세계의 범위를 넘어서기 때문이다. 그래서 종교적 언명은 그것의 참과 거짓을 구분하기가 쉽지 않으며, 그만큼 사기꾼들이 득실거리기 쉽다. 또한 배타적이며, 심지어 호전적이기도 하다. 그리고 자신만이 진리를 알고 있다고 하며 사람들을 선동하고, 유혹하고, 자신의 말을 진리로서 떠받들 것을 요구한다. 그렇지 않을 경우에는 저주를 하거나 비난을 하거나, 욕설을 하는 것에 주저하지 않는 모습을 심심치 않게 본다.
‘앙굿따라니까야’에 ‘깔라마의 경(Kālāmasutta)’이 있다. 깔라마인들은 코살라국의 께사뿟따(Kesaputta)라고 하는 작은 도시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이른바 집성촌이라고 보면 된다. 그들은 왕족 출신들이라고 알려져 있다. 이들은 부처님이 자신들의 마을에 오시자, 반색을 하며 몰려와 부처님과 대화를 나누게 된다.
[깔라마인들] 존자시여, 이곳 께사뿟따를 방문한 어떤 사문과 바라문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오직 자기의 가르침만을 설명하고 계몽할 뿐, 다른 교리에 대해서는 비난하고 욕하고 경멸하고 코웃음을 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다른 사문과 바라문들이 왔는데 그들도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존자시여, 저희는 그들 중 누가 진리를 말하고 있는지 미심쩍고 의심스럽기만 합니다.
[붓다] 깔라마인들이여, 그대들이 미심쩍고 의심스러워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깔라마인들이여, 소문이나 전승이나 여론에 끄달리지 말고, 성전의 권위나 논리나 추론에도 끄달리지 말고, 상태에 대한 분석이나 견해에 대한 이해에도 끄달리지 말고 그럴듯한 개인적 인상이나 ‘이 수행자가 나의 스승이다’라는 생각에도 끄달리지 마십시오. 깔라마인들이여, 이러한 것들이 잘못된 것이고, 이러한 것들은 현자에게 비난받을 만하고, 이러한 것들은 실천항으로 받아들이면 유익하지 못하고, 괴로움을 야기하는 것이라고 스스로 알게 되면, 그 때에 그것들을 버리십시오.
예나 지금이나 자신들만이 진리를 말하고, 알고 있다고 말하면서 다른 종교를 비난하고, 적개심을 갖게 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이 제시하는 근거는 다양한 방법으로 제시하는 권위이다. ‘아무개가 이야기했다’ 혹은 ‘성전에 쓰여있다’ ‘사람들이 지지한다’와 같은 것으로 권위를 자랑한다. 나아가 권위를 내세워 사람들을 억압하고, 정신적으로 지배하려고 한다. 그것들은 결국 사람들을 기만하고, 힘들게 하며, 궁극에는 괴로움의 수렁에 밀어 넣고 만다.
부처님은 만약 누군가가 진리를 말한다고 하면서,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는데 그 말을 듣고 유익함이 없고, 괴로움이 생겨나게 됨을 알게 되면 그것에 미련 갖지 말고 버리라고 말씀하신다.
부처님은 당신의 말이 맞고 다른 이들은 잘못된 말을 한다고 하지 않는다. 듣는 사람들이 올바로 판단할 수 있는 가르침만을 줄 뿐이다. 경전에서는 이렇게 전한다.
[붓다] 깔라마인들이여, 탐욕과 분노와 어리석음에 사로잡혀 마음이 현혹되어 살이 있는 생명을 죽이고, 주지 않는 것을 빼앗고, 남의 아내를 범하고, 거짓말을 하고, 타인에게 이와 같은 것을 권하면, 그는 오랜 세월 무익하고 고통스러울 것입니다. 깔라마인들이여, 이것들은 착하고 건전한 것입니까, 악하고 불건전한 것입니까?
부처님은 마음속의 탐진치가 있는 한, 아무리 미사여구로 말을 한다 해도 그것은 거짓일 뿐, 진실이 아니라는 것을 스스로 깨우치게 한 것이다. 스스로 깨우쳐 자신과 세상을 위해 사는 것이야 말로 진정한 삶이란 것을 깔라마인들에게 말씀하신 것이다.
이필원 동국대 경주캠퍼스 교수 nikaya@naver.com
[1607호 / 2021년 11월3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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