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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6. 제85칙 동산경묘(洞山莖茆)

선자의 삶은 영원한 현재에 초점을 두는 것

승이 사후 한줄기 띠풀 됐다 함은
영원한 현재의 이치를 일러준 것
중생적 삶의 차원에 머문 물음을
보살행 사는 삶의 차원으로 승화

승이 동산에게 물었다. “죽은 스님은 천화한 후에 어디로 갔습니까.” 동산이 말했다. “화장한 이후에는 한 줄기 띠풀[一莖茆]이 되었다.”

일찍이 남전보원(南泉普願: 748~834)의 제자인 장사경잠(長沙景岑)이 망승(亡僧)을 앞에 두고 손으로 주검을 어루만지며 말했다. “대중들이여, 이 승은 진실을 터득함으로써 그대들을 위해 깨침의 강령을 보여주었다. 알겠는가.”

본 공안은 장사경잠의 이 공안에 근거하여 이루어진 문답상량이다. 동산양개(洞山良价: 807~869)는 중국 조동종의 개조인데, 행지면밀(行持綿密)하고 용의주도(用意周到)한 선풍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그런 만큼 일상의 생활에서 성취되고 있는 일거수일투족 낱낱의 행위가 그대로 수행이고 깨침이며 교화의 면모를 보여준다. 생사일대사(生死一大事)에 대하여 민감한 출가납자들의 경우는 바로 이와 같은 일용의 삶에서 묻어나는 행위가 그대로 자기의 본분사(本分事)가 되고 타인의 모범이 된다는 점에서 어느 것 하나라도 소홀히 간주할 수 없는 진지한 행적을 보여주고 있다.

특히 생사의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당처에서 죽음은 단순한 죽음으로 끝나지 않고 세상을 바꾸어 지속적으로 보살도를 실천한다는 점에서 선승의 죽음을 천화(遷化)라고 한다. 이 세상에서는 죽었을지라도 분명히 다른 세상으로 가 이 세상에서 마치지 못한 원력을 이어간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용어가 여기에서는 죽은 후에 한 줄기 띠풀이 되었다는 표현으로 등장해 있다. 문답에 등장하는 일경묘(一莖茆)는 일경모(一莖茅)이다. 띠풀이라고 표현했지만 일반적으로 풀[草]을 의미하는데, 가축이 뜯어먹고 사는 자양분에 해당한다. 자신이 죽어서 풀로 환생함으로써 사람뿐만 아니라 가축을 비롯한 일체중생을 먹여 살리는 행위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주목해야 할 점은 따로 있다. 승은 죽은 이후에 어디로 가는지를 묻고 있다. 그러나 동산의 답변은 죽은 후를 가리키지 않는다. 죽은 이후를 논하는 것은 형이상학적이고 관념적인 이해방식으로 그것은 진정한 선자의 면모가 아니다. 선자는 철저하게 현실에 매진한다. 그래서 선자의 삶은 영원한 현재에 초점을 맞춘다. 지금‧여기‧이것으로 표현되는 선자의 생활방식은 과거를 묻지 않고 미래를 묻지 않는다. 다만 과거라고 할지라도 그것은 현재 속의 과거이고, 미래라고 할지라도 그것은 현재 속의 미래를 가리킨다. 과거와 현재와 미래는 언제나 현재에 바탕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런 까닭에 죽은 세상의 문제에 대한 승의 질문에 대하여, 동산의 답변은 현재 살아가고 있는 이 땅에서 발생한 띠풀을 가지고 응수한 것이었다. 이것은 생사의 문제라기보다는 영원한 현재의 이치를 일러준 것이다. 승으로 살고 있던 경우와 띠풀로 발생해 있을 경우는 시간의 차원에 속하는 전후의 관계가 아니라 어떤 역할을 하고 있느냐는 행위의 관계이다. 그래서 아무리 죽은 스님이라고 해도 단순히 죽어 있는 것만을 가리키지 않고 죽은 이후에 다시 태어난 띠풀이라고 해도 새로 발생한 것만을 가리키지는 않는다. 죽기 이전과 죽은 이후라는 말은 스님을 기준으로 바라본 것이지만, 띠풀을 기준으로 바라보면 발생하기 이전과 발생한 이후의 문제가 된다. 동산의 답변은 죽은 스님과 발생한 띠풀은 그대로 여전히 같은 땅에 존재하고 같은 시간에 존재하며 같은 행위로 작용하고 있는 존재라는 것이다.

굳이 선자들이 활용하고 있는 용어를 들이밀자면 변역생사(變易生死)이다. 질문한 승의 입장으로는 중생적인 삶의 차원에 해당하는 분단생사(分段生死)의 차원으로 본 문답이 시작되었지만, 동산의 답변은 그것을 보살행으로 살아가고 있는 삶의 차원으로 승화시켜주고 있다. 동산의 답변은 단도직입으로 죽음의 문제보다는 당면한 현실의 문제에 직면하라는 것이다. 이런 점으로 보면 일종의 우문현답(愚問賢答)이라고 해야 할까, 아니면 현문우답(賢問愚答)이라고 해야 할까. 스님이 죽은 것은 그저 없어진 것이고, 띠풀이 자라난 것은 그저 발생한 것일 뿐이다.

김호귀 동국대 불교학술원 HK교수 kimhogui@hanmail.net

[1607호 / 2021년 11월3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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