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이 양주동산에게 물었다. “어떤 것이 부처입니까.” 동산이 말했다. “삼이 서 근이다.”
양주동산(襄州洞山)은 수초종혜(守初宗慧: 910~990)로서 운문종의 선사이다. 본 문답은 가장 일반적 법거량(法擧量)의 유형에 속한다. 납승이 묻고 선지식이 답변하고 있는 경우가 그렇고, 또한 더 이상 왜 그런지 따지며 왈가왈부 않는 것이 그러하며, 언뜻 보기에 질문과 동떨어진 동문서답과 같은 것이 그러하다. 그 까닭은 이 문답에 대한 전후의 배경지식 내지 선문답에 대한 상식이 없는 경우에는 수수께끼와도 같이 전혀 얼토당토 않는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서도 선문답의 형식에 얽매이거나 매너리즘에 빠져 있지 않다. 그것은 지극히 간명직절(簡明直截)하고 깔끔하게 진행되어 있는 문답이면서 참으로 다양한 내용을 담아내고 있기 때문이다.
‘부처란 무엇인가’ 내지 ‘어떤 것이 부처인가’를 묻는 형식은 일찍이 경전에도 드러나 있다. ‘불설여래부사의비밀대승경(佛說如來不思議祕密大乘經)’에는 “어떤 것이 부처님의 출세입니까”라는 질문에 대하여, 부처님은 “발보리심이 바로 부처님의 출세입니다”라고 답변한다. 이와 같은 문답은 다양한 형식으로 전개되면서 이후 선종에서는 불법의 근본적인 대의에 대한 물음으로 일반화되었다. 불법을 조금이라도 공부한 사람에게는 일체중생실유불성(一切衆生悉有佛性)이라는 말은 상식으로 통한다. 일체중생에게는 모두 불성이 있다는 정도의 말로 통한다.
그러나 적어도 본 문답에서는 그것을 따지지는 않는다. 그런 만큼 명쾌하다. 부처란 소위 삼이 서 근이라는 답변이다. 삼은 베를 짜기 이전에 아직 가공되지 않는 식물의 껍질 그대로를 가리킨다. 그런데 뜬금없이 부처가 무엇이냐는 질문에 대하여 서 근이라는 말은 또 무엇인가. 이래저래 그 개념적인 의미를 따지는 것은 문답의 본의로부터 점점 더 멀어져 간다. 그러면서도 부처 내지 삼이 서 근이라는 말에 대하여 마냥 묻어두고 회피할 수만은 없다. 왜냐하면 부처와 삼이 서 근이라는 것은 지극히 밀접한 관계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본래 그렇다. 본래 그렇다는 말에는 부처와 삼은 다르지 않다는 점에서 밀접한 관계이고, 같지 않다는 점에서 밀접한 관계라는 의미가 담겨 있다. 그러나 본 문답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좀 더 구체적인 설명이 요구된다.
실유불성(悉有佛性)이라는 의미가 논서에서는 적어도 세 가지 의미로 이해되고 있다. 하나는 일체중생은 법신으로 우주법계에 편만하다는 의미이다. 둘은 일체중생은 평등하여 차별이 없다는 의미이다. 셋은 일체중생은 부처의 종자를 지니고 있다는 의미이다. 따라서 이 점을 이해하고 보면 질문과 답변은 지극히 명백해진다. 더 이상 의문의 여지를 남겨두지 않는다. 그래서 부처란 무엇인가 하는 승의 질문에 대하여 동산이 어떤 답변을 해도 부처 아닌 것이 없는 셈이 된다. 이쯤 되면 질문과 답변은 지극히 상식적이다. 삼이 서 근이라는 말뿐만 아니라 콧구멍 속의 코딱지라고 말해도 합당한 답변이고, 창 틈새의 먼지라고 말해도 또한 그와 같다. 그것은 불성이 법신으로 우주에 편만하고 있는 까닭이다. 이제 승은 자신이 괜히 물었다는 생각을 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질문에 대하여 답변을 듣기 이전과 답변을 들은 이후의 상황은 천지만큼이나 다르다. 답변을 듣기 이전에는 승 자신이 실유불성이라는 의미는 알고 있었을지라도 그러한 사실을 자각하지 못하고 있는 경우였기에 그저 중생일 뿐이었지만, 정작 답변을 듣고 보니 자신이 알고 있는 실유불성의 의미가 자각되는 찰나에 승 자신은 더 이상 중생이 아니라 법신인 줄을 터득하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동산이 답변한 삼이 서 근이란 한편으로는 중생이고 부처이며 중생이 그대로 부처라는 자각에 해당하지만, 한편으로는 질문한 승 자신이고 답변한 동산이며 답변을 들은 승 자신에 해당한다. 그러나 부처는 굳이 삼이 서 근이라는 입장이 아니어도 좋다.
김호귀 동국대 불교학술원 HK교수 kimhogui@hanmail.net
[1610호 / 2021년 11월24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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