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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김영삼 정권의 조계사 경찰 투입

기자명 이병두

‘수배자 연행’ 이유로 두 차례 공권력 투입…갈등 초래

1994~1995년 공권력에 쫓긴 수배 노동자들 조계사로 피신
명동성당과 달리 사찰이 노동자들 울타리 된 상징적 사건
무리한 공권력 투입으로 불교계와 대립…국무총리 유감표명

경찰투입 예상을 알리는 신문 기사(‘경향신문’ 1995. 6. 6).
경찰투입 예상을 알리는 신문 기사(‘경향신문’ 1995. 6. 6).

앞선 두 차례 글(제19, 20회)에서 다루었듯이 문민정부를 자처했던 김영삼(이하 YS)정권은 5년 동안 불교계와 갈등을 이어갔는데, 이번에는 ‘수배자 해산과 연행’을 이유로 YS정권 시절에 조계사에 두 차례나 공권력을 투입했던 상황을 살펴보기로 한다.

1994년 3월말에서 4월 초에 걸친 조계종 개혁불사 과정에서 첨예하게 맞섰던 불교계(조계종)와 YS정권은 몇 달 뒤 전국기관차협의회(전기협) 노동자들이 조계사를 찾아오고 개혁회의에서 그들의 농성을 허용하면서 다시 갈등을 겪게 되었다. 서울 종로5가 기독교회관에서 농성하다 6월26일 경찰이 투입되어 강제 해산된 뒤 ‘안전하게 머물 곳’을 힘들게 찾아다니던 전기협 노동자들은 6월27일 조계사에서 받아주어 잠시 쉴 수 있게 된 것이다. 당시 신문보도에 따르면, “전기협 파업노동자와 가족 등 150여명이 경찰의 해산 작전을 피해 조계사 경내로 들어가 불교계를 신변보호용 울타리로” 삼았고 조계종 측에서는 “‘내 집안에 들어온 사람은 절대 내치지 않는다’는 절 집안의 오랜 전통에 따라 이들에게 퇴거요청을 하지 않기로 결정했다”고 한다. 그리고 이 일은 “불교 사찰이 ‘어려운 처지’의 사람들이 안심하고 찾을 수 있는 넉넉한 품이 된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으로 “과거 군사정권 시절 반정부 시위와 농성의 메카였던 명동성당에서는 파업노동자들의 자진퇴거를 요구하고 있는 반면 불교계가 이들을 감싸고 안아 대조를 이루고 있다”는 평가를 받기도 하였다.(‘한겨레’ 강희철 기자의 ‘조계사 농성장소로 첫 허용 눈길’ 기사. 1994. 6. 29.)
 

기관사들의 파업 소식을 전하는 한겨레 신문 기사(1994. 6. 24).

실제로 명동성당은 이보다 앞서 6월23일에 명동성당을 찾아 농성을 시작한 서울지하철노조 노동자들에 대하여 본당 사제단과 사목협의회 공동명의로 여러 차례 자진퇴거를 공식적으로 요구하고 신자와 신부들이 농성장 앞에서 침묵시위를 하며 농성중단 압력을 넣기도 하였지만, 불교계에서는 전기협 노동자들을 끝까지 감싸 안아서 매우 다른 모습을 보여준 것이다.(서울지하철 노조는 해산 압력을 견디지 못하고 결국 9월12일에 명동성당 농성을 풀게 된다.)

그러나 전기협의 농성이 장기화되면서 문제가 불거지기 시작했다. 주변을 경찰력이 에워싸고 검문검색이 이루어지자 조계사 신도들은 신행에 불편을 겪을 수밖에 없었다. 농성 시작 40여일이 된 8월13일에는 총무원에서 이들에게 “8월 말까지 경내에서 철수해달라”고 요청하는 상황에 이르렀지만 노동자 측에서 받아들이지 않다가 결국 농성 57일째인 9월1일에 경찰병력을 투입하여 강제해산하고 전기협 간부들을 연행하기에 이르렀다. 문제는 경찰에서 “조계사 측과 긴밀하게 협의해 공권력을 투입했다”고 밝힌 데 반하여 총무원 측에서는 “경찰이 3‧29와 4·10법난에 이어 또다시 경내에 공권력을 투입한 것은 매우 유감스러운 일”이라면서 “경찰에 전기협 노동자들의 퇴거조치 협조를 요청한 적이 없다”고 반박하며 전혀 상반된 주장을 했다는 점이다. ‘조계종이 먼저 공권력 투입을 요구하지는 않았을지라도 공권력 투입 통보를 받고서 강력하게 항의하지 않는 방식으로 묵인했을 가능성’을 제기하는 이들도 있지만, 명확하게 밝히기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다만 당시 종단을 대표하던 개혁회의로서도 조계사 신도들이 겪는 불편과 무언의 압박을 더 이상 견디기 어려워 공권력 투입을 통보받거나 다른 경로를 통해서 알고 있으면서도 ‘모른 척’ 하며 묵인했을 수는 있다.

1995년 6월 6일 오전 8시 한국통신 노조원 강제연행 장면(출처: ‘현대불교’ 1995년 6월 14일자 1면).
1995년 6월 6일 오전 8시 한국통신 노조원 강제연행 장면(출처: ‘현대불교’ 1995년 6월 14일자 1면).

전기협 노동자들의 조계사 농성사태가 경찰력 투입과 노동자 강제 연행으로 개운하지 않게 마무리된 지 채 1년도 안 된 1995년 5월27일에 한국통신(KT) 노조간부 일곱 명이 조계사에서 단식농성을 시작하면서 YS정권과 불교계는 또다시 갈등에 휘말리게 되었다. (명동성당에도 노조 간부 여섯 명이 들어가 단식농성을 하였는데, 1년 전과 달리 가톨릭에서도 이들을 보호하며 평화적 해결을 주장했다.) 개혁회의를 거쳐 1994년 11월에 취임한 총무원장(월주)이 여러 차례 “대화를 통해 해결되기 바란다”며 공권력 투입 반대 입장을 밝히고 총무원 소임자 스님들이 정보통신부 장관을 만나 중재안을 이끌어냈지만 “불법 파업자와 협상은 없다”는 KT 측의 강경 입장에 밀려 폐기되고 말았다. 사용자 측이 이처럼 완강한 태도를 보이는 데에도 불구하고 조계종에서는 가톨릭과 협력하며 6월5일에 “교섭이 진행되는 동안 현 노조 집행부의 사법처리를 유보한다”는 중재안을 만들어 정통부 장관과 KT사장에게 전달했지만 YS정권은 이 노력을 완전히 무시하고 6월6일 경찰력 투입을 강행하고 말았던 것이다.

조계종의 중재 노력이 가장 활발했던 6월5일 바로 다음날이자 공휴일(현충일)에 조계사에 경찰력을 진입시켜 단식농성 중이던 노조간부 전원을 연행한 것인데, 이 과정에서 불교계의 중재 노력을 완전히 무시했을 뿐만 아니라 정권 스스로 “종교계의 중재 노력을 역이용했다”는 추측과 평가가 나올 수밖에 없게 만들었던 것이다.

1994년과 1995년에 조계사에 경찰력을 투입하여 노조원들을 강제 연행한 사건은 그렇지 않아도 갈등을 이어가며 불편했던 YS정권과 불교 사이의 골을 더 깊게 하였다. 경찰력 투입 당일부터 정권 규탄 시위가 펼쳐졌고, 6월15일에는 조계사에서 대통령 사과와 책임자 처벌을 요구하는 대규모 시국법회를 개최하였다. 결국 6월16일 국무총리(이홍구)가 유감표명을 하며 수습에 나섰으나 총무원과 중앙종회에서 “총리의 유감표명은 공권력 투입에 대한 충분한 해명이 될 수 없다”며 단호한 입장을 견지하였다. 2015년 12월 민주노총 한상균 위원장 연행 문제를 두고 긴장상태에 있을 때 ‘조계사에 네 번째 공권력 투입할까’라는 기사 제목에서 알 수 있듯 그때까지 조계사에 경찰을 공식 투입한 세 차례 중 두 번이 YS정권 기간에 있었다는 사실이 많은 것을 말해준다.

이병두 종교평화연구원장 beneditto@hanmail.net

[1611호 / 2021년 12월1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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