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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탄압 속에 얼룩진 삼계교사(三階敎史)와 이후의 동향

기자명 법공 스님

철저한 봉쇄 아래서도 명맥을 이어가다

정부·귀족·대사찰 손익 영향 줘
삼계교 재물 분산되고 활동금지
교단 바깥에서 생생한 모습 보여

보통 종교의 흥망성쇠는 시대의 정치와 그 운을 같이한다. 본고의 4회 끝에서도 언급했듯 삼계교는 무진장행등의 훌륭한 행법으로 가난으로 인해 고통받는 빈고의 중생을 제도했으나 정부·귀족들 손익에 영향을 줘 탄압의 원인이 됐다. 

무진장시(施)를 펼치고자 했던 무진장원(院)이 폐쇄됐고, 그 원인은 크게 두 가지로 분석된다. 첫째 무제(武帝) 폐불 원인인 승려 타락에 삼계교가 직간접적 영향을 받았다는 것. 둘째 후원자 고경의 실각으로, 유일한 재원활동인 무진장행이 금지됐다. 

그렇다면 시기에 따라 어떤 탄압의 역사가 있었는지 간략하게 살펴보자.

제1회: 문제(文帝) 개황 20년(600), 금단(禁斷), 유행이 허락되지 않음.
제2회: 측천무후 증성 원년(695), 이단(異端)이며, 전적은 위경(僞經)시.
제3회: 측천무후 성령 2년(699), 활동이 걸식, 절곡(絶穀), 지계, 좌선에 한 함.
제4회: 현종개원 9년(721), 화도사 무진장을 제거, 재물을 분산시킴.
제5회: 삼계원의 격장을(隔障)제거, 삼계승 이외 승과 거주하게 함.

탄압은 시기가 흐르면서 점차 가중됐다. 제4회인 현종개원 9년(721)에는 정부가 교단의 경제적 기반이던 무진장을 제거하고, 재물도 분산시킨다. 

정부·귀족의 손익에 영향을 준다는 것도 주요 이유였지만, 여기엔 큰 사찰도 포함돼 있었다. 

당시 민중들은 조정의 잦은 전쟁과 노역, 세제 등을 견딜 수 없어 사찰로 피난한 이들도 적지 않았다. 하지만 가족부양으로 출가마저 가능하지 않았던 이들은 고리(高利)라도 사용해 살아남아야 했다. 

이때 삼계교의 신행은 3자(정부·귀족·대사찰)가 민중의 고혈(膏血)을 짜고 있을 때 이들 생활에 구체적인 구제책을 제공했던 것이다. 

삼계교의 금단(禁斷) 역사는 책부원구에서 살펴볼 수 있다. 이 사료에 따르면 복선사 등의 삼계승이 무진장을 창시하니, 매년 정월 4일 천하의 사녀(士女)에게 전(錢)을 베푼다고 한다. 호법(護法)을 위한다는 명목으로 빈녀(貧女)를 구한다고 사칭하여 간기(姦欺)를 꾸밈은 진정함이 아니므로 이를 금지해야 한다고 기록돼 있다.

그렇다면 무진장이 폐쇄된 이후의 삼계교 동향은 어떠했을까?

삼계교는 무진장이 제거되고 철저한 봉쇄 아래에 있었지만 멸망하지 않았다. 오히려 교단 바깥에서 생생한 모습을 보였다. 

특히 덕종 연간(800)에는 삭제된 삼계교전적이 ‘정원록’에 회생돼 다시 기록됐고, ‘장안지’10의 ‘남문지동의령방’조(南門之東義寧坊條)는 “화도사는 본래 진적사로서…무덕 2년에 화도사로 개칭됐다. 사중에 무진장원을 두었는데, 경종이 화도경원(化度經院)이라는 금문액문(金文額文)을 하사했다”고 언급하는 등 경종대(825~826)까지 삼계교의 명맥이 유지됐고 활동했다는 것을 살펴볼 수 있다. 가장 구체적인 기록은 ‘송고승전’에서 보인다.

1) 영은산의 도표 스님은 비구가 되어(757), 장경 3년(822)에 입적하지만, 전묘(田苗)를 두어, 무진재(無盡財)를 설치하며 대중과 같이 했다.

2) 신태 스님은 사분율에 능통하며, 좌구는 짚을 깔았다고 할 정도로 계행인이었으며, 시주를 모아 상주무진재(常住無盡財)에 넣어 대중과 함께했다.

3) 원관 스님은 불경을 연마하며…천보말 가업을 버리고, 낙북의 혜림사에 들어가…공용무진재(公用無盡財)가 되어, 하루 한끼 승중(僧衆)의 음식으로 3년을 살았다.

무진재와 관련한 세 명의 기록이 남아있긴 하지만 여기서 무진재는 공용이나 상주라고 해 그 분배권은 승단 내부에 지정돼 있었다. 

그러므로 신행이 창립했던 무진재와 같은 사회 기곤이나 궁핍을 돕는 기능까지는 이르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물론 이시기에는 혹독한 탄압을 피해서 교단의 존립자체에도 힘에 부쳤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시대를 거치면서 무진재는 비분(悲分), 비전물(悲田物) 등 성격이 아니라 상주승물(常住僧物), 승물(僧物)의 의미로 축소됐다. 

법공 스님

또 시식(施食)을 받아 누가 빈궁자인가를 찾아 가난한 이에게 걸식의 절반을 나누어 준다는 무애무차(無涯無遮)의 설재(設齋)를 행하던 대승의 정신에서도 후퇴한 것은 확실하다.

법공 스님 동국대 경주캠퍼스 전 선학과 겸임교수
hongbub@hanmail.net

 

[1611호 / 2021년 12월1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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