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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 제90칙 오봉루전(五鳳樓前)

깨침은 일상에서 무엇으로든 작용하고 있다

깨침이 오봉루 앞에 있다는 것은
깨침이 항상 주변에 있단 가르침
도중인은 깨침 가운데 사는 사람
그 살림도 특별치 않음 일러준 것

승이 풍혈에게 물었다. “깨침[道]이란 무엇입니까.” 풍혈이 말했다. “오봉루 앞에 있다.” 승이 물었다. “그러면 깨친 사람[道中人]은 무엇입니까.” 풍혈이 말했다. “성황사(城隍使)에게 물어보라.”

풍혈은 풍혈연소(風穴延沼: 896~973)로 남원혜옹(南院慧顒: 860~930)의 법맥을 이은 임제종 제4세이다. 본 문답은 지극히 고상한 것은 지극히 가까운 곳에 있음을 에둘러 일러주고 있다. 깨침[道]은 수행하는 납자들에게는 궁극의 목표이다. 평생을 바쳐서 깨치려는 수행은 깨침에 대한 믿음과 더불어 그것을 임의대로 활용하려는 욕구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 깨침에 대한 그림자나 단서도 찾지 못하고 있는 상황에서는 무척이나 궁금할 수밖에 없다. 승의 경우도 예외가 아니다. 깨침에 대하여 그것이 과연 무엇이냐고 단도직입으로 묻는다.

그 답변이란 한편으로는 직접 일러주는 것이기도 하고, 또 한편으로는 간접적으로 지시해줌으로써 승 스스로 찾아볼 것을 권장하는 것이기도 하다. 여기에서는 두 가지 방식을 모두 구사하고 있다. 승의 두 가지 질문에 대하여, 처음의 질문에 대해서는 직접적으로 승의 면전에 답을 들이밀어 주고 있다. 깨침이란 지금·바로·여기·이것을 벗어나 있지 않는다는 것을 구체적으로 일러주었다. 그것이 바로 오봉루(五鳳樓)가 그대 앞에 있다는 답변이다. 오봉루는 당나라 때 낙양(洛陽)에 건축한 누각의 명칭이라는 것은 삼척동자도 알고 있다. 그래서 실제로는 낙양에 있을지라도 모든 사람의 면전에 있는 것으로 간주되어 있다. 이 말은 승 그대가 질문하고 있는 깨침이란 다름이 아니라 그대가 알고 있는 오봉루처럼 항상 주변에 있다는 것을 일러준 것이다. 깨침이라고 해서 저 멀리 아득한 거시기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깨침은 그것을 알고 있는 사람에게는 마치 오봉루가 앞에 있듯이 누구도 도저히 부정할 수 없이 분명하게 작용하고 있다는 말이다. 깨침은 우리의 일상생활에서 언제나 누구에게나 어디에나 무엇으로든지 작용하고 있음을 다음과 같이 말한다.

두 번째 질문에 대해서는 풍혈이 간접적으로 지시해주고 있다. 그와 같은 깨침을 구비하고 있는 사람이란 어떤 사람인가 하는 것이다. 도중인(道中人)이란 깨침을 얻고 깨침 가운데서 살아가고 있는 사람이다. 그러한 사람의 살림살이도 또한 특별할 것이 없다고 일러준다. 그에 대해서 풍혈은 성황묘를 관리하는 사람에게 물어보라고 일러준다. 이제는 풍혈 자신의 말을 통하는 특수한 답변보다도 오히려 모든 사람에게 깨침의 작용이 드러나 있음을 일러주기 위하여 성황묘를 관리하는 사람을 지목하고 있다. 답변을 추구하기 위하여 선지식을 멀리 찾아갈 필요가 없다. 마을마다 없는 곳이 없는 성황묘를 관리하는 사람에게만 물어보아도 그것으로 충분하다는 것이다. 옛적부터 중국의 도시나 마을에는 우리나라의 성황당에 해당하는 성황묘(城隍廟)를 모심으로써 도시나 마을을 수호해준다고 믿었다. 성황묘에서 성은 성이나 성곽이고, 황은 물이 없는 해자를 의미한다. 그래서 성을 두른 물 없는 못으로 성을 수호하는 것을 의미한다. 성황사(城隍使)는 성황묘를 관리하는 사람으로, 여기에서는 누구에게나 친밀하게 접근할 수 있는 인물을 상징한다.

풍혈 자신의 직접적인 답변보다도 승 자신이 직접 답변을 해결하라는 지시를 해준 것이다. 그래서 만약 승이 성황사에게 묻기 위하여 직접 찾아가는 경우라면, 그 승은 아직도 풍혈의 답변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셈이다. 왜냐하면 성황사에게 물어보라는 말을 듣는 찰나에 깨침으로 살아가고 있는 사람이 주변에 파다한 줄을 알았더라면 굳이 찾아가서 물을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애써 찾아가서 묻는 경우에도 성황사의 답변은 너무나 명백하다. 자신은 성황묘를 관리하는 일을 맡고 있다는 것이다. 마치 농부는 농사를 짓고, 어부는 물고기를 잡으며, 장인은 물건을 만드는 것이야말로 개개인이 깨침을 충분히 작용시켜가는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는 풍모와 같다.

김호귀 동국대 불교학술원 HK교수 kimhogui@hanmail.net

[1612호 / 2021년 12월8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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