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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자라면 천진암 찾아 후손 못나면 어떻게 당하는지 보고 깨달아야”

기자명 해인
  • 기고
  • 입력 2022.11.25 21:06
  • 수정 2022.11.27 10:47
  • 호수 1658
  • 댓글 11

다시 읽는 ‘천진암’ 기고
김희균 전 ‘대중불교’ 편집장

천진암은 천주교가 불자들 가슴에 분노·원한 키우는 공간
그곳에 거주하던 비구니스님 내쫓으려고 온갖 횡포 자행
부처님 모셨던 금당터는 초기 천주교인 묫자리로 탈바꿈

1995년 기고 당시 ‘해인’에 실렸던 천진암 터. 천진암 터를 파헤친 뒤 대성당 터로 조성된 곳에서 가톨릭 신자들이 순례행사를 진행하고 있다.

경기도 광주 천진암은 스님들이 초기 가톨릭 신자들을 도왔던 절이었지만 지금은 온통 가톨릭 성지로 뒤바뀐 곳이다. 이에 대해 불교계 내부에서 비판과 분노의 목소리가 나온 것도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이 글은 월간 ‘대중불교’ 편집장이었던 김희균씨가 ‘천진암터에서 천주교가 벌이는 백 년 동안의 시위’라는 주제로 해인사가 발간하는 ‘해인’ 1995년 12월 166호에 기고했던 글이다. 해인사의 동의를 얻어 게재한다. 편집자

[한국관광공사]
[한국관광공사]

지난여름에 불자 김환봉씨가 ‘대중불교’를 찾아왔다. 십여 년 만의 만남이라 반갑게 안부를 묻고 나니 그는 뜻밖의 주문을 했다. “천진암 되찾기 운동”을 벌이자는 주문과 함께 ‘대중불교’에서 기사를 쓰라는 것이었다.

천진암에 대해 한을 품은 사람이 어찌 그이뿐이랴. 수많은 불자들이 무슨 체증처럼 천진암에 대한 한을 지니고 있다. 그러면서도 마음만 그럴 뿐 막상 힘을 모으지 못하는 못난 불자들.

그의 말을 들으면서 저 밑바닥에 잠재워두던 허탈감과 함께 슬며시 부아가 치밀었다. “아니, 그만큼 상세히 보도할 때는 잠자코 있다가”하는 생각이 스치면서, 불교계에 대한 회의가 겹쳐서이다. ‘대중불교’(당시는 ‘대원’)에서는 이미 1986년 12월호와 89년 9월호에 이 사건을 상세히 다루었으나 그에 대한 반응이 얼마나 미미했던가.

천진암 생각만 하면 못난 불교계가 더욱 미워진다. 해봐야 소용없다는 오랜 좌절감에 대뜸 그의 의지를 꺾어버렸다. “되찾기 운동을요? 누가 동참한대요?” 그를 그렇게 보내놓고 마음 편할 리 없었다. 내내 빚진 마음이었다.

천진암 사건은 이미 몇몇 사람이나 한두 단체가 해결할 수 있는 사안을 훨씬 넘어섰다. 더구나 뒤끝이 무르기 이를 데 없는 불교인들의 성품으로 봐서, 스님들이 관심 밖의 일로 여기는 한, 저들을 당해낼 재간이 영영 없다.

이번에 스님들이 많이 보는 ‘해인’에서 천진암 사건을 다루니 기대하는 마음이 크다. 전국 사암에서 지난번 개혁 때와 같은 의지를 가진다면 안 될 일 무엇 있겠는가. 적어도 그 정도의 단결력은 있어야 천진암을 찾을 수 있고, 제2의 천진암 사건을 방지할 수 있으며, 불교를 향한 외풍을 막아낼 수 있다.

경기도 광주군 퇴촌면 우산리 앵자봉에 천진암이 있었다. 다 알고 있듯이 천진암은 한국천주교가 태동한 탯자리이다. 천진암은 한때 300여 스님이 수행 정진하던 도량이었으나, 조선시대의 억불정책으로 스님들이 대부분 어디론가 떠나고 불과 십여 분만 남아 있었다. 18세기 중엽, 한가롭던 천진암에 젊은 유학자 몇 명이 찾아들어 유교 경전을 공부했다. 그들은 이익의 영향을 받아 실학과 서학에 눈을 떴고, 권철신을 중심으로 그의 아우 권일신, 정약전, 이승훈, 김원성 등이 모여 조심스럽게 서학의 강의를 거듭해 나갔다. 여기에 또 한 젊은이 이벽이 가담하면서 신앙수련을 겸하게 되었다. 이벽은 본격적으로 선교를 주도하는 인물이었다. 이때 이벽은 천진암이 아닌, 같은 앵자산 동쪽 아래쪽에 자리 잡은 주어사에 머물면서 천진암을 오르내린 것으로 기록은 전한다. 그러니까 당시 두 곳의 절을 빌려준 셈이었는데, 보통 대표권을 부여해 천진암이라 한다.

이들은 천진암에서 4년이 넘게 강학을 계속했고, 마침내 1784년 이승훈을 북경에 파견, 영세를 받게 한다. 천진암과 주어사는 그렇게 오랜 기간 천주교를 위해 배려를 아끼지 않았다. 그러나 당시 천주학은 전통사상에 크게 위배된다 하여 천주학을 공부하거나 천주교를 유포한 사람들은 참형을 당하였다.(1801년, 신유박해). 그때 천진암을 지키던 스님 10여명도 죄인을 숨겨 주었다는 죄명으로 참수당했다. 그 뒤 주인을 잃어버린 천진암은 폐사가 되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그 천주교의 태를 받아준 천진암은 지금 천주교회에 의해 흔적조차 없이 사라졌다. 천진암 법당터엔 현재 천주교 초기 인물 이벽 부부, 권일신 부부, 이승훈 부부, 권철신 부부, 정약종 등 다섯 묘를 이장해 놓았으며, 앵자산 일대가 제 모습이 아니다.

부처님을 모셨던 금당으로 추정되는 곳에는 천주교인들의 묘가 버젓이 자리 잡고 있다. [경기도 홈페이지]
부처님을 모셨던 금당으로 추정되는 곳에는 천주교인들의 묘가 버젓이 자리 잡고 있다. [경기도 홈페이지]

절터는 폐사가 되어도 유적지인 법이다. 사찰 소유가 못 되면 국유지로 보존되는 게 상례이다. 천진암 터는 십중팔구 광주군의 군유지였을 터이나 이 지역의 면장이 땅을 사겠다 하자 순순히 매매된 듯하다. 1970년대 후반, 천주교측은 수원교구(교구장 김남수) 대주교의 지시로, 천주교인이던 면장을 통해 천진암 터 일대를 모두 사들이기 시작했다. 천진암이 한국천주교회의 발상지라는 사실이 알려지자 대대적인 성역화 작업을 시작한 것이다.

1979년, 천주교측은 천진암 성역화 1백년 계획을 수립, 착수하기에 이른다(주최는 천주교 수원교구로 되어 있다). 이 과정에서 천주교측은 성역화 중심 지역인 대성당 터 바로 옆의 영통사와 회령사 동지역 주민 간에 숱한 갈등을 일으켰다. 영통사, 회령사는 이들의 성역화 작업에 큰 걸림돌이었다. 천진암 일대 앵자산 전역을 성지로 꾸미려는데, 그 안에 사찰이 들어앉아 있음이 눈엣가시였다. 그들은 사찰을 몰아내려고 온갖 회유와 협박을 가했다.

영통사와 회령사에 드나드는 길은 하나뿐이다. 성역화가 진행되고 있는 정문은 관음리를 지나 우산리에서 앵자산에 오르는 길뿐이다. 천주교측은 스님과 불교신도들에게 이 길을 내어주지 않았다. 이곳은 우리 땅이라는 식이었다. 절에 가려는 신도들은 번번이 심문과 저지를 당했다. 심지어는 부처님오신날에도 경찰과 군인을 동원하여 주민등록증을 조사하고 공양 보따리를 풀어 헤치며 빼앗는 사태가 벌어져 실랑이를 벌이곤 했으니, 천주교측의 살벌함은 일일이 열거하지 못할 지경이었다.

그뿐만 아니라 당시 법화종 사찰 영통사 주지였던, 여든이 넘은 비구니스님(임엽 스님)을 사이비 승려라 모략하였으며, 또 신자들을 동원하여 절마당에 와서 찬송가를 불러제끼며 절 내놓으라 시비하기를 일삼았다. 회령사는 영통사에서 5분여 거리에 있는 총화종 사찰이었는데, 회령사도 같은 고초를 겪었다.

마을 주민들의 피해도 적지 않았다. 조만간 그 일대가 군립공원으로 지정될 것이니 땅을 헐값에 팔고 떠나라고 할 뿐더러, 관권과 결탁한 듯 증개축 허가도 내주지 않아서 원성이 잦았다.

여든이 넘은 영통사 주지 스님의 ‘살아남기’는 치열하였다. 저들의 그 폭력에 가까운 극성스러움에 분노하며 어떻게든 이겨내고자, 앵자산에서 마지막 남은 영통사를 지켜내고자 관계 당국에 진정함은 물론, 많은 불교 단체와 종단에 저들의 비인간적인 면면을 호소했다. 그러나 누구도 이 노스님의 호소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신도들은 자연 줄어들었고, 노스님도 지쳐 어디론가 떠났다. 결국 앵자봉에 마지막 절 영통사와 회령사는 저들의 손으로 넘어갔다. 한국천주교회의 천진암 성역화는 그렇게 진행되어 벌써 20년이 가깝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한국불교 거대 종단인 조계종에서는 그동안 침묵으로 일관해 왔다. 영통사와 회령사가 조계종 사찰이 아닌 까닭도 있었을 것이다. 만에 하나 종파를 문제 삼아 이 중대한 사안을 외면했다면 조계종은 한국 불교사에서 두고두고 직무유기죄를 면하기 어려울 것이다.

대성당 터로 향하는 오르막길 끝에 대형 십자가가 보인다.
대성당 터로 향하는 오르막길 끝에 대형 십자가가 보인다.

우산리에서 잘 닦인 산길을 따라 올라가다 보면 앵자봉 앞서 느닷없이 거대한 십자가가 눈앞을 가로막는다. 십자가가 얼마나 거대한지는 직접 보지 않고는 상상하기 힘들 정도이다. 십자가가 세워진 위치는 주차장과 정문을 지나 100여 미터쯤 올라가서였다.

양옆에 산봉우리를 세워두고 가운데 산봉우리를 반쯤 깎아내린 듯 높은 평지를 만들었는데, 그곳이 바로 수평 광장 3만 평에 이르는, 100년 계획으로 세우는 천주교 대성당 터이다. 아직 광장과 행사장으로 쓰이는 성당 터는 정문에서 올라오다 만나는 쪽을 10여미터 높이로 시작해 높고 거대한 돔을 형성하듯이 조성되어 있다. 성당 터 양옆으로 길을 내어 오르게 되어 있다.

저 아래 정문이 내려다보이는 성당 터 정면 발치에 상상을 초월하는 크기의 십자가를 세웠으니 거리감과 공간감, 시각적인 효과가 겹쳐 섬뜩하기까지 하다. 그 풍광 좋은 산을 깎아내린 것만도 엄청난 자연 파괴일뿐더러 자연과 이질적인 거대한 십자가를 깊은 산 속에서 만난다는 사실은 더욱 섬뜩하다.

대성당 터 아래 단에는 2미터쯤 되는 높이에 시멘트를 둘러 바르고, 노란 페인트 글씨로 “한국천주교 백년 계획 천진암 대성당터(1979년 6월24일~2079년 6월23일)”라 쓰여 있다. 앵자봉 초입에서 초대형 십자가를 만났을 때에 이어 두 번째의 섬뜩함을 맛본다.

무엇보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대목이 있다. 왜 하필 백년인가. 3만평의 터에 아무리 엄청난 성당을 짓는다 해도 백년은 결코 만만한 세월이 아니다. 유럽의 세계적인 성당이라도 옮겨놓는단 말인가. 그들이 어떤 성당을 짓는다 하더라도 속내는 뻔하다. 백 년 동안 응집력을 키우고 교세를 확장하며, 대내외적으로 시위를 하겠다는 것이다. 불교인들이 집안일에만 몰두하고 있을 때가 결코 아니다.

[한국관광공사]
[한국관광공사]

백년 성당 터를 지나 오른쪽 산길을 따라 한참을 오르다 보면 천진암 감멜수녀원, 천진암정모성당, 한국천주교회 창립사연구원, 천진암성모상, 천진임박물관 등 여러 개의 안내 표지판을 만난다. 앵자산 골골에 천주교 부속 건물들이 세워져 있음을 알 수 있다. 어쩌면 그 장소들은 예전의 암자 터이리라.

성당터에서 천진암터까지는 어림하여 1km쯤 될 듯하다. 숲이 우거진 산속 오솔길을 따라 올라가면 ‘한국천주교회창립선조 5위 묘’가 성역처럼 잘 조성된 터전 위에 안치되어 있다. 그곳이 천진암터이다. 현지 자료에 따르면 천진암 터는 5천여 평. 5인 묘가 들어선 바로 그 지리는 한눈에 금당터(金堂; 그 절의 큰법당)임을 알 수 있다. 못난 후손들이 부처님 모셨던 자리를, 모셔야 할 자리를 빼앗겨 타종교인 묫자리로 내주었다. 도무지 할 말이 없다. 지난 봄 기자가 찾았을 때 그곳에서 천진암 터임을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한참 만에 ‘천진암터’라 쓰인 작고 낡은 팻말을 발견했는데, 5인 묘역을 오르는 계단 옆에서 나무 사이로 쓰러져 얼굴을 감추고 있었다.

불자라면 모름지기 천진암 터에 가봐야 한다. 그리하여 그곳에서 몇 번이고 못난 불교계를 한탄하고 분노를 느껴봐야 한다. 후손이 못나면 어떤 일을 당할 수 있는지를 깨달아야 한다. 그리고 한국천주교회가 불자들의 가슴에 얼마나 크나큰 분노와 원한을 키우고 있는지를 알아야 한다.

예부터 풍광이 뛰어난 앵자봉이었다. 앵자봉 일대 천진암 주변에는 주어사를 비롯해 백련암, 석이암, 봉태암, 일출암, 범어사, 샛절 등이 있었다. 따라서 고을 이름도 예부터 절막, 관음리. 약사골이라 불렀다. 그러나 오늘날 앵자봉 아랫마을 그 어디에도 절골의 인정스러움은 찾을 길 없고 살벌함이 깃든 위엄만이 있다.

입구에는 천진암에서 ‘암’을 빼고 ‘천진 성지’라고만 적혀있다.

불교에서 천진불(天眞佛)은 본래 면목의 부처를 이른다. 그런 의미에서 붙여진 천진암이란 이름에 ‘천진암은 천주(天主)의 진리(眞理)이고, 주어사(走魚寺)도 그리스도를 상징함이니 둘 다 깊은 뜻이 담겨 있다’고 해석하면서 정당성을 부여하고 있는 정도이다.

불교계는 이제 시야를 넓혀 지금 밖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를 살펴야 한다. 그리고 앵자산 일대는 당연히 교계에서 답사, 연구해야 할 과제이며 천진암 일대를 되찾는 일은 한국 불교의 자존심이 걸린 문제라고 봐도 지나치지 않다. 지금도 늦지는 않았으나 꾸물거리고 있을수록 멀어진다는 사실은 확실하다. 또한 불교인들이 이렇게까지 마음을 앙다져 먹고 한을 키우게 된 데는 전적으로 천주교측의 책임이 크다. 천진암이 천주교의 발상지임은 누구도 부인하지 않는다. 그러나 천진암을 천진암으로, 수많은 사찰이 들어서 있던 앵자산을 앵자산으로 보존하면서도 얼마든지 성역의 역할은 할 수 있었다. 천진암은 천주교의 성역 이전에 불교의 성역이었다는 사실을, 성역화의 전 과정에서 지나치게 간과한 데에서 불교인들의 서운함이 맺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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