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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사림의 진출과 스님의 처우 변화

기자명 민순의

국가 공인 스님들 활동에도 혐오 저지른 사림

도첩 발급받고 국가 행정업무 종사·관리자 역할한 스님들
조정도 부도첩승 인력 동원 후 도첩 발급 상식적으로 통용
신진 사림 관료들, 본인 토지 확보하고자 사찰 공격 추정

이긍익(李肯翊, 1736~1806)의 ‘연려실기술’에 따르면 “연산조 이후로 서울에 있는 사찰들을 모두 폐하여 관청으로 사용했기 때문에 양종(兩宗)이 헛이름만 청계사(淸溪寺)에 의탁하여 이름을 선종(禪宗)이라 하였다.”고 전해진다. [청계사]
이긍익(李肯翊, 1736~1806)의 ‘연려실기술’에 따르면 “연산조 이후로 서울에 있는 사찰들을 모두 폐하여 관청으로 사용했기 때문에 양종(兩宗)이 헛이름만 청계사(淸溪寺)에 의탁하여 이름을 선종(禪宗)이라 하였다.”고 전해진다. [청계사]

아직도 많은 이들이 조선시대를 ‘숭유억불’의 시대로 규정하곤 한다. 이 표현에는 신중할 필요가 있다. 시리즈의 앞선 글에서 소개해 왔듯이 조선은 불교를 ‘억압’하지 않았다. 새 나라를 창업하고 경영했던 임금과 신료들은 공식적으로는 유교 특히 성리학의 사상을 국정의 통치 이념으로 삼았지만, 그들의 개인 신앙은 대부분 불교를 향해 있었다.

행정과 법률 영역에서 불교 교단과 스님들은 차라리 국정의 파트너에 가까웠다. 그 단적인 근거가 바로 세종 6년(1424)에 있었던 국가공인 사찰의 지정과(‘세종실록’ 24권, 6년 4월 5일) ‘경제육전’과 ‘경국대전’의 법전에 등재된 도첩과 승과의 승정제도이다.

자신의 평생 신역(身役) 값에 해당하는 정전(丁錢)을 지급하고 도첩을 발급받은 스님은 나라에서 승인하는 공식적인 승려의 자격을 갖고서 일종의 공무원과 같이 기능하였다. 그들은 국가공인 사찰에 일임된 수륙재 등 국행 불교의례와 독서당 관리 지원 등을 담당했고, 또 별와요, 활인원, 한증소, 원우, 귀후소 등에 소속되어 기와 제작, 병자 구휼, 여행객 지원, 무연고 시신 수습 등의 행정업무에 종사하였다.

도첩승 가운데 승과에 합격하여 법계를 획득한 고위급 스님들은 임금의 낙점 하에 공인 사찰의 주지로 임명되었는바, 임금의 재가가 요구되는 이 제도의 과정 자체가 공인 사찰과 도첩승들이 일종의 행정기관 및 공무원의 자격과 기능을 행사하고 있었음을 알려준다. 이로 보건대 별와요 등의 행정기관에서 관리자로 활동한 스님들 역시 일정 정도 이상의 법계를 받은 스님을 대상으로 하여 공적 재가 시스템을 통해 임명된 것으로 보기에 충분하다. 물론 그 휘하에서 실무를 담당하던 스님들 역시 공적 업무에 투입된 존재인 만큼 응당 도첩을 소지한 공인승(公認僧)으로 채워졌을 것이다.

하지만 개국 초 나라 전체 인구의 10%를 차지한 것으로 추정되는 스님이 모두 도첩을 받을 수 있는 처지였던 것은 아니며, 따라서 대부분의 스님들은 국가비공인의 사도승(私度僧)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들은 분명 체발묵의(剃髮墨衣)한 스님이었으되 나라의 입장에서는 신역 값을 지불하지 않은 일반인이었을 뿐이므로 발견 즉시 징발의 대상일 수밖에 없었다. 그들을 내버려둔다는 것은 곧 국가 병력의 유실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조선 전기 내내 무도첩승에 대한 추쇄(推刷)가 국정 운영의 주요한 이슈가 되었던 까닭이다.

다만 이 경우에도 대안이 전무했던 것은 아니다. 세종 11년(1429) 흥천사와 태평관의 건물 수리에 무도첩승의 인력을 동원하고 그 대가로 도첩을 발급하기 시작한 이래로(‘세종실록’ 43권, 세종 11년 2월 3일 ; ‘세종실록’ 43권, 11년 3월 22일), 무도첩승의 노동력 징발과 도첩발급의 신분 구제 방침은 계속해서 지속되며 조정 일각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하나의 상식처럼 받아들여지는 경향이 있었다. 

특히 세조와 성종 대에 대규모로 발급된 노동력 징발에 대한 도첩 발급은(‘성종실록’ 10권, 2년 6월 8일 ; ‘성종실록’ 157권, 성종 14년 8월 29일) 당시 정전을 지급할 능력이 되지 못하는 다수의 스님들이 공인승으로 승격되는 데에 큰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조선 전기의 ‘실록’ 기사에서 불교와 스님들에 대해 성토하는 듯한 분위기의 글을 빈번히 접한다고 해서, 그것이 단순히 불교에 대한 억압을 의미하는 것으로만 받아들이는 것은 위험한 일이다. 물론 개인의 신념에 따라 불교와 스님들에 대해 비판적인 시선을 견지한 유신(儒臣)들이 없지 않았지만, 분명 이 시기 불교에 대한 국가 당국의 태도는 합리적인 것이었다. 비록 그것이 고려시대까지 전 사회적으로 견지되었던 불교에 대한 전적인 우대와 공경의 태도는 아니었다고 해도 말이다.

하지만 분위기는 분명 변화하고 있었다. 지난 글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성종 대 사림(士林)의 정계 진출, 그리고 중종 대 이들에 대한 중용이 변화의 큰 계기가 되었다. 건국 초의 관료파가 고려시대 이래의 불교적 유풍을 지속한 예가 많고, 세조 대의 훈구파가 현실적으로 불교의 필요성을 인정한 경향이 있던 것과 다르게, 사림들은 성리학의 이념에 더욱 철저한 이들이었다. 이제 이들은 불교 교단과 스님들을 국정 운영의 파트너로 인정하기를 거부했다.

아직까지 국가의 정책 기조는 승정제도를 유지하며 불교를 합리적으로 관리‧이용하는 것이었으므로, 누수의 조짐은 개인적인 차원에서 시작되었다. 바로 지난 글에서 살펴 본 바와 같이 아직 관료의 자격을 얻지 못한 유생들이 산발적으로 사찰 방화나 승려 구타 등의 행태를 저지르는 방식으로였다. 이에 대해 임금이 법률로 징죄하려 하면 사림파 관료들이 나서 어린 유생들의 일탈일 뿐이므로 눈감아 주자고 권유하는 패턴이 되풀이되었다. 따라서 이를 두고 불교에 대한 억압이라고 이야기하기에는 여전히 어려움이 있다. 그것은 차라리 내면 깊이 자리 잡은 ‘혐오’의 태도였다.

사림파가 불교를 그토록 혐오하며 공격한 이유로 필자는 이념적인 측면 외에 경제적인 측면의 이유를 헤아리기도 한다. 사실 사림파가 정계에 세력을 넓히기 이전에 정치적 장악력을 확실히 틀어쥐고 있던 세력은 세조 대에 대거 진출한 훈구공신들이었다. 세조는 자신의 정권 창출과 유지에 기여한 이들에게 세 번에 걸쳐 총 134명의 공신을 책봉하였는데, 이는 건국 이후 세조 이전까지의 전체 공신 숫자에 버금가는 것이었다. 세조는 이러한 적극적인 공신 우대 정책으로 자신의 권력을 유지‧관리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로 인해 남발된 엄청난 양의 공신전(功臣田)은 세조 이후 진출한 신진 사림 관료들에게 돌아갈 땅이 충분치 않음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했다. 결국 사림은 훈구공신과 싸우는 한편, 새로운 토지의 확보하고자 적지 않은 사원전을 보유하고 있던 사찰을 공격하게 되었던 것으로 필자는 추정한다.

2번의 사화(士禍)로 사림을 축출했던 연산군이 그렇다고 불교를 예전과 같이 다시 합리적으로 대했던 것은 아님을 지난 글에서도 이미 살펴보았다. 반정으로 그 뒤를 이은 중종도 불교에 박하기로는 연산군 말년과 다를 바가 없었다. 한양의 주요 도심 사찰인 흥덕사와 흥천사, 그리고 원각사는 연산군 9~11년(1503~1505)에 불타거나 용도 변경된 이후 여전히 복구되지 않았고, 심지어 중종 11년(1516)에는 기신재를 폐지하고 ‘경국대전’의 ‘도승(度僧)’ 조항을 삭제하는 등 각종 승정 및 불교행정 제도가 줄줄이 폐지되기에 이른다.(‘중종실록’ 25권, 11년 6월 2일 ; ‘중종실록’ 27권, 11년 12월 16일.) 그리고 이는 중종 재위 초 임금이 가장 신임하던 조광조와 이제 조정에 확실히 뿌리를 내리기 시작한 사림파의 득세와 무관치 않은 것이었다.

지난 글에 계속하여 질문은 이어진다. 이제 스님들은, 특히 국가공인의 스님들은, 모두 어떻게 된 것일까?

민순의 한국종교문화연구소 연구위원 nirvana1010@hanmail.net

[1672호 / 2023년 3월 15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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