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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월결사 인도순례 37일차] 불교 의지해 천민의 삶 이겨낸 불자들 응원에 순례길이 밝았다

3월17일, ‘싯다르트의 땅’ 뜻하는 시다르트나가르 27km 행선
불자 주민들, 불교기에 부처님·암베드카르 사진 들고 맞이해

상월결사 인도순례 ‘생명존중, 붓다의 길을 걷다’는 3월17일 37일차 행선을 진행했다.

깊은 새벽 맑은 목탁 소리에 이어 아침 종성이 흐려진 정신을 맑게 깨웠다. 아침예불과 ‘반야심경’ 봉독으로 불자의 삶을 확인한 후, 발원문으로 전법의 마음을 다졌다. 손톱 같은 그믐달을 지남 삼아 새벽 순례길로 나아갔다.

상월결사 인도순례 ‘생명존중, 붓다의 길을 걷다’는 3월17일 37일차 행선을 진행했다. 순례단은 파르사 숙영지를 출발해 피카우라, 나자르가라와, 자가히야를 거쳐 지기나마피까지 27km를 행선했다. 평일 새벽임에도 이날 순례길에는 마을마다 유독 많은 사람들이 나와 순례단을 맞이하고 박수로 응원했다. 행정구역상 방문하는 마을 모두 ‘싯다르트의 땅’이라는 뜻을 지닌 시다르트나가르 지역에 속한 탓인지 불교기를 들고 스스로 불자임을 밝히는 이들이 유독 많아 더욱 눈길을 끌었다.

손톱 같은 그믐달을 지남 삼아 새벽 순례길로 나아갔다.
평일 새벽임에도 이날 순례길에는 마을마다 유독 많은 사람들이 나와 순례단을 맞이하고 박수로 응원했다.

새벽 행선 중 쉬어간 두 번째 휴식처는 더욱 각별했다. 당초 휴식 공간은 파카우라 마을 입구의 공터를 이용할 계획이었으나 마노즈 고담 박사가 자신의 집 마당에 머물기를 요청해 순례단은 그곳에서 휴식을 취했다. 불가촉천민 출신의 마노즈 고담 박사는 20여년 전 델리에서 공부하던 중 암베르카트가 설립한 인도불교협회를 통해 부처님의 가르침을 알게 됐고, 이를 계기로 자신은 물론 아내와 자녀들까지 모두 불교에 귀의했다.

행정구역상 방문하는 마을 모두 ‘싯다르트의 땅’이라는 뜻을 지닌 시다르트나가르 지역에 속한 탓인지 불교기를 들고 스스로 불자임을 밝히는 이들이 유독 많아 더욱 눈길을 끌었다.
37일차 순례의 아침 공양은 떡국이었다.

고담 박사는 “신분의 굴레는 벗어날 수 없다고 생각했는데, 인간을 포함한 모든 생명은 불성을 가진 평등한 존재라는 가르침에 큰 감명을 받았다”며 “이에 저를 포함한 가족 모두 불자가 됐고, 인연 있는 사람들에게도 불교를 포교하고 있다”고 말했다. 실제 고담 박사의 집 앞에서는 그의 가족뿐 아니라 함께 개종한 10여명의 불자들이 순례단을 맞이했다. 회주 자승 스님은 감사의 마음을 담아 108염주 등을 선물했으며, 고담 박사 등 불자들은 존경의 뜻으로 회주스님에게 삼배를 올렸다.

아침 공양을 전후해 새벽과 아침이 나뉜다.

이날 고담 박사를 비롯해 순례길에서 만난 불자들은 불교기와 함께 부처님과 암베드카르 박사의 사진을 함께 들고 있었다. 인도의 종교분포는 힌두교 79.8%(9억1000명), 이슬람교 14.2%(1억5000명), 기독교 2.3%(2600만명), 시크교 1.7%(2170만명), 불교 0.7%(910만명), 자이나교 0.4%(458만명), 기타 0.9%다. 인도에서 절멸되다시피 한 불교가 그나마 명맥을 유지하게 된 것은 간디와 쌍벽을 이루며 인도의 또 다른 아버지로 추앙받고 있는 암베드카르(1891~1956) 덕분이다.

인도인들에게 간디가 영혼의 아버지라면 암베드카르는 국가의 아버지다. 그럼에도 암베드카르는 간디의 그림자에 가려 유독 우리나라에서는 조명받지 못했다. ‘인도 독립의 정신적 지도자’라는 간디의 행적이 식민 지배를 겪은 우리에게 강렬한 정서적 공감을 일으켰기 때문일 것이다.

아이들의 응원에 합장으로 감사의 마음을 전하는 순례단. 

암베드카르는 ‘인도 헌법의 아버지’로 칭송받으며 독립국가 인도 탄생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인물이다. 그런 그에게 따라붙는 또 하나의 수식어는 ‘불가촉천민 해방의 선구자’다. 그는 본래 힌두교 신자였지만 힌두교의 교리가 카스트의 원리를 제공하는 원천이며 그 속에서는 신분제도에 대한 개혁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절감해 말년인 1956년 불교로 개종했다.

불가촉천민의 신분으로 태어난 암베드카르는 성장 과정에서 다른 불가촉천민들과 다를 바 없는 차별과 혐오를 겪어야 했다. 그런 그의 인생에 단 하나의 행운이 있었다면 그의 부모가 아들 교육에 매우 열성적이었다는 점이다. 그의 양가 식구들은 보편적 형제애의 관점에서 카스트를 거부한 것으로 유명한 시인 카비르(Kabir, 1440~1518) 성인을 기리는 신앙 단체에서 활동하고 있었다. 영국군 소속의 직업 장교이자 군사학교 교장이었던 암베드카르의 아버지는 자식들에게 마라티어(Marathi)와 영어로 작문, 수학, 장문의 힌두 서사시 등을 가르쳤다. 말년에 불가촉천민 인권운동가로도 활동한 그의 아버지는 마하라쉬 출신의 사회개혁가이자 최초로 인도에 불가촉천민을 위한 학교를 만들었던 마하트마 조티바 풀의 친구이자 추종자이기도 했다.

이러한 집안 환경 덕분에 암베드카르는 1913년과 1923년 사이에 뉴욕의 컬럼비아대학에서 석·박사 학위를, 런던대학에서 이학 석박사 학위를 받는 등 인도에서 가장 교육을 많이 받은 사람에 속하게 되었다. 그는 또한 런던변호사회에도 가입했으며 박사 학위 취득 후에 독일의 본(Bonn)대학에서 연구를 계속했다.

암베드카르는 이후 정부 각료, 신문사 편집장, 대학 교수, 법과대학원 학장, 선출직 공무원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했다. 그럼에도 그는 주택 소유에 제한을 받거나 구타를 당하고 생명에 위협을 받는 등 계급적 폭력에 끊임없이 시달려야 했다. 이러한 경험들 때문에 그는, 편견 없는 힌두교인의 호의나 영국의 계획성 없는 지원으로는 암베드카르와 같은 불가촉천민들의 삶을 개선 시키는 것이 근본적으로 불가능함을 깨닫게 되었다. 결국 대중들의 폭넓은 지지를 받을 수 있는 사회 인식의 개혁만이 이러한 폭력과 편견을 줄일 수 있다고 확신하게 되었다.

37일차 순례의 이운은 비구니스님들이 담당했다.
37일차 순례의 이운은 비구니스님들이 담당했다.
등교를 위해 스쿨버스에 승차한 학생들도 순레단을 응원했다.
등교를 위해 스쿨버스에 승차한 학생들도 순레단을 응원했다.

불가촉천민의 대변인으로서 암베드카르 박사의 이러한 생각은 간디와는 정반대였다. 암베드카르는 기회 있을 때마다 “인도를 망치고 있는 것은 영국이 아니라 카스트 제도”라고 주장했고, “힌두교 자체가 싸워야 할 대상”이라고 규정했다. 결국 그는 힌두교를 포기하고 다른 종교를 찾겠다고 선언했다. 그리고 1000여 명의 불가촉천민 지도자들을 설득해 ‘종교적 정체성은 운명적인 것이 아니라 선택적인 것’이라고 바라보게 하였다.

1935년 힌두교 포기선언을 한 암베드카르는 불교 교리에서 신분제도를 넘어 인도 사회에 만연돼 있는 여성, 계층, 종교 등 갖가지의 차별을 극복할 수 있는 평등의 원리를 발견한 것이다. 암베드카르 자신이 불가촉천민이기도 했으며 그 역시 온갖 고초를 겪으면서도 결국 장관직에까지 오른 ‘인생 역전’의 주인공이었던 까닭에 그가 불교로 개종할 당시 인도에서는 수 십만 명의 불가촉천민들이 그를 따라 불교에 귀의했다. 인도의 인구주택조사에 따르면 1951년과 1961년의 10년 사이에 인도의 불자 인구가 18만 명에서 325만 명으로 증가했다. 인도에서는 지금도 이 변화의 가장 큰 원인으로 1956년 암베드카르의 불교 개종을 첫손에 꼽는다.

순례단의 편안한 순례길을 위해 마을길을 청소하는 주민들.
순례단의 편안한 순례길을 위해 마을길을 청소하는 주민들.

때문에 인도의 법당에는 부처님과 함께 암베르카르를 모시며, 불자들은 삼귀의(三歸依) 대신 암베르카르가 포함된 사귀의(四歸依)를 한다. 인도 불교계에 암베르카르가 차지하는 비중은 그만큼 지대하다.

순례단은 37일차 회향지인 지기나마피에서도 불자들의 환영을 받으며 숙영지에 도착했다. 꽃목걸이를 걸고 주고 꽃을 뿌리는 사람들에게 유달리 애정이 가는 것은 바로 자신의 집 마당을 휴식 장소로 내어주며 불자임을 당당히 고담 박사 때문이었다. 모든 생명이 평등한 세상을 역설했던 부처님의 가르침이 인도에서 이렇게 다시 일어서고 있음을 보는 것이 오늘 행선에서 순례단에게 주어진 가장 큰 가피였다.

오늘도 인도 불자들은 순례단의 37일차 회향과 저녁예불을 함께했다. 순례단은 저녁예불과 ‘금강경’ 독송 108배를 통해 부처님 가르침으로 하나가 된 한국과 인도의 불자들은 세계 곳곳에 전법의 횃불로 타오르기를 함께 기원했다.

지기나마피 불자들이 숙영지에 들어서는 순례단에게 꽃을 뿌리며 환영하고 있다.
지기나마피 불자들이 숙영지에 들어서는 순례단에게 꽃을 뿌리며 환영하고 있다.

지기나마피=김현태 기자 meopit@beopbo.com

[1673호 / 2023년 3월 22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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