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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월결사 인도순례 17일차] 영취산 영산회상에 다시 울려 퍼진 묘법연화의 감로 법문

2월25일, 교화·교단 성장 든든한 터전 되어준 라즈기르 도착
영취산에 올라 법화경 독송…교단 첫 도량 죽림정사터 참배

영취산에 오른 순례단이 영취산 정상의 향실에서 예불을 모셨다. 
영취산에 오른 순례단이 영취산 정상의 향실에서 예불을 모셨다. 

상월결사 인도순례단이 17일 만에 수많은 법이 펼쳐진 도시이자 교화와 교단 성장의 든든한 터전이 되어준 라즈기르에 도착했다.

영취산으로 오르는 길.
영취산으로 오르는 길.

2월25일 새벽 비까이푸르를 출발한 순례단은 제티안, 팔두를 거쳐 라즈기르 북동쪽에 위치한 영취산에 이르렀다. 날개를 접고 앉은 독수리 모양의 바위로 인해 ‘신령스런 독수리산’이라 불리는 영취산은 부처님께서 ‘법화경’를 설한 장소로 불화 ‘영산회상도’의 무대로 불자들에게 각인돼 있다. 또 부처님께서 설법 중 말없이 연꽃 한 송이를 들자 마하가섭만이 이를 알아듣고 미소를 지었다는 염화미소(拈花微笑)의 역사적인 장소로 익히 잘 알려진 곳이다.

영취산은 산밑에서 도보로 30분 거리다. 가파르지 않지만 쉼 없이 이어지는 오르막길로 그리 녹록지는 않다. 부처님과 천이백오십 대중들이 오르내렸을 그 길을 순례단은 석가여래좌불을 앞에 모시고 말없이 발걸음을 옮겼다. 정상에 가까워질수록 경전을 새겨넣은 타르초와 누군가의 서원이 담긴 돌탑들이 군락을 이루고 있었다. 순례단의 앞뒤로 티베트와 태국을 비롯해 다른 나라의 많은 불자들이 영취산을 오르고 있었다.

정상에는 부처님의 설법을 기념하는 설법단 ‘여래향실’이 고졸한 모습으로 남아있다. 순례단은 부처님을 향실에 모시고 향과 꽃을 공양 올린 뒤 칠정례로 예를 올렸다. 잠시 숨을 고르고 마음을 가다듬는 입정에 이어 7조 조장인 이태경 보살이 대표로 ‘법화경’ 독송하며 이번 순례의 의미를 되새기는 시간을 가졌다.

“내가 본래 세운 서원은 나와 다름없이 평등하다는 것을 알려서 모두가 불도에 들도록 하기 위함이다. 사성제와 팔정도를 닦아 열반을 증득하거나 12연기를 닦아 해탈에 이르거나 육바라밀을 실행하여 깨달음을 구하거나 단지 방편으로 갖가지 길을 보여주었을 뿐이니 불자가 자기에 맞는 도를 행한다면 반드시 부처를 이루리라.”

산꼭대기 우뚝 솟은 설법단은 좁았다. 사방 절벽의 한복판에 있어 더욱 성스럽고 신비했다. 이곳에서 울려 퍼지는 ‘법화경’은 그래서 더욱 마음을 울렸다. 존재하는 모든 생명의 평화와 모든 존재의 평등, 그리고 우리 안의 불성을 일깨워 반드시 성불을 이루리라는 서원이 각자의 마음을 울렸다. 순례단 모두는 마하가섭처럼 인도 순례의 의미를 가슴으로 새기며 미소를 지었다.

비록 석가모니 부처님은 계시지 않지만, 그 거룩한 분께서 이곳에서 설하신 내용을 읽어내려갔을 뿐이지만 순례단 모두 부처님께 직접 가르침을 받는 듯 마음을 모아 정성을 다했다. 당시 부처님께서 ‘법화경’을 설하실 때 대중들이 느꼈을 감동도 이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 모두의 가슴에 부처님이 있고, 또한 그 아름다운 가르침이 전해지며, 그 가르침을 따르는 승가와 재가가 지금 한자리에 모였다. 이보다 더 장엄하고 복된 광경은 없었을 것이다.

영취산 법화경 독송 법회의 집전을 맡은 설도 스님은 “가슴이 벅차다”는 말로 감동을 대신했다. 스님은 “부처님께 예를 올리는 것은 특별할 것이 없지만, 오늘은 순례단이 부처님께서 걸으신 그 길을 따라 직접 발로 걸으며 영취산에 올랐기 때문에 마음가짐도 감동도 평소와 달랐다”며 “단순히 성지를 방문한 순례자가 아닌 수행자로서 새롭게 마음을 다잡는 계기가 됐다”고 미소를 보였다.

영취산을 내려온 순례단은 부처님 재세시 북인도의 강대국인였던 옛 마가다국의 수도 라르기르의 불적을 순례했다. 
영취산을 내려온 순례단은 부처님 재세시 북인도의 강대국인였던 옛 마가다국의 수도 라르기르의 불적을 순례했다. 

영취산을 내려온 순례단은 라즈기르에 남겨진 부처님의 성스러운 발자취를 차례를 방문하며 새롭게 발심하는 기회로 삼았다. 라즈기르의 옛 이름은 라자그리하, 우리에게는 왕사성(王舍城)이라는 한문 이름으로 더 잘 알려져 있다. 부처님 재세시 라자그리하는 북인도 지역 강대국이었던 마가다국의 수도였다. 동시에 북인도 일원에서 가장 큰 도시 가운데 하나였다.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수행자 시절 첫 스승이었던 알라라깔라마와 헤어진 후 새로운 스승을 찾아온 곳도 바로 라자그리하였다. 당시 마가다국을 다스리던 빔비사라왕은 첫눈에 싯다르타가 여느 수행자와는 다름을 알아봤다. 그는 싯다르타에게 나라 전부를 주겠다며 자신의 곁에 머물러 달라고 청했다. 그러나 그런 것들이 싯다르타의 관심이 아님을 안 빔비사라왕은 “깨달음을 성취한 후 가장 먼저 이 도시를 찾아와 제일 먼저 깨우침을 달라”고 청했다.

교단 최최의 사원인 죽림정사. 
교단 최최의 사원인 죽림정사. 

부처님께서는 성도하신 첫해 약속대로 라자그리하를 방문하셨다. 부처님께 귀의한 빔비사라왕은 부처님이 머무실 수 있도록 성 북문 밖에 있던 울창한 대나무숲, 죽림을 보시했다. 바로 교단 최초의 도량 죽림정사다. 부처님 입멸 후 1차 경전의 결집이 이루어진 칠엽굴, 아들 아자타삿투왕에 의해 유폐 당한 빔비사라왕 감옥터도 라즈기르에 남아있다.

순례단은 이날 영취산이 바라다보이는 빔비사라왕 감옥터와 부처님께서 머문 향실은 사라지고 대나무 숲만이 그 역사를 전하는 죽림정사를 차례로 참배했다. 세월은 흘러 모든 것이 가물거리는 역사로만 남았으며, 역사적 현장에서의 부처님 체취도 엷어졌다.

부처님의 흔적만 그런 것은 아니다. 우리 삶 속에서 불교 또한 마찬가지다. 역사적 흔적에서 부처님의 존재를 확인하듯이, 직접 부처님의 음성을 들으며 배우지는 못하지만 우리는 글로 남은 부처님의 가르침에서 역사적 흔적을 찾듯이 깨달음으로 가는 길을 잘 찾아야 한다. 우리가 굳이 부처님께서 가신 그 길을 따라 걷고 또 걷는 이유이기도 할 것이다.

17일차 일정을 회향한 순례단은 내일 세계 최초의 불교대학이자 최고 수준의 교육을 제공한 날란다사원터를 참배한 후 비구니교단이 탄생한 대림정사로 향해 부지런히 발걸음을 옮기게 될 것이다.

라즈기르=김현태 기자 meopit@beopbo.com

[1671호 / 2023년 3월 8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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