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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 남북한산성의 의승 윤회입번(輪回⼊番)

기자명 민순의

전국 대상으로 국가통제 받는 승군 조달 방식

총섭이 승도 모집 및 관리 위임…산성축조·수비 전담
승군 배치 상례화로 군현 단위 국가권력 통제에 놓여
숙종부터 사찰별 산성수비 2개월씩 교대근무 시행해

눈 쌓인 남한산성의 모습. 조선 후기 남한산성과 북한산성에서는 전국의 사찰에서 정해진 인원수의 스님들이 2개월마다 돌아가며 복무하는 의승 윤회입번이 시행되었다.
눈 쌓인 남한산성의 모습. 조선 후기 남한산성과 북한산성에서는 전국의 사찰에서 정해진 인원수의 스님들이 2개월마다 돌아가며 복무하는 의승 윤회입번이 시행되었다.

지난 글의 말미에서 숙종 40년(1714)의 기사를 다음과 같이 인용하였다. “외방(外方) 사찰에 있는 승도의 다소(多少)를 조사하여 남한산성과 북한산성에 각기 의승(義僧)을 350명씩 정하고, 액수를 정하여 차례로 번을 들게 하소서”(‘숙종실록’ 55권, 40년 9월25일)

남한산성은 일찍이 임진왜란 때에도 왜적의 방어를 위한 진지로 기능하여 사명당 유정 스님이 60여 명의 승도와 함께 주둔하였다. 이들은 “시종 싸움터에 드나들었고 모두가 정예하고 용맹스러워 싸움에 익숙하다”고 인정되었으나, “이번에 해산하여 보낸다면 후일 조발하기 어려울 것이니, 유정에게 그대로 거느리고 남한산성에 들어가 있게 하여 위급할 때 쓸 수 있도록 대비하자”는 비변사의 건의가 받아들여졌다.(‘선조실록’ 80권, 29년 9월12일) 유정 스님은 이미 그보다 2년 전인 선조 27년(1594) ‘총섭장(總攝將)’으로 임명되어 경상도 악견산성(岳堅山城)과 이숭산성(李崇山城)의 수축에 경력이 있던 터였다.(‘선조실록’ 48권, 27년 2월27일)

남한산성의 주둔 작전에서도 승군 편성 및 관리의 책임은 유정 스님에게 주어졌다. “선과(禪科)·승직(僧職)·도첩(度牒)을 유정과 의엄에게 물어서 각각 (공명첩(空名帖·수취자의 이름이 기재되지 않은 백지 임명장)) 몇 장씩을 작성해 주고 그들로 하여금 쌀을 구입하여 그 군사를 먹이도록 했다.”는 후속 기사(‘선조실록’ 83권, 29년 12월8일)는 유정 스님에게 승도의 모집과 관리가 전적으로 위임되었음을 말해 준다. 함께 언급된 의엄 스님은 여주의 파사산성(婆娑山城)에서 유정 스님과 같은 역할을 담당하였다.

인조 2년(1624) 남한산성을 대대적으로 수축할 때에도 공사의 책임은 총섭 벽암각성 스님에게 위임되어 있었다. “요즈음 듣건대 승려에게 총섭이라는 이름을 붙여 주어 마치 국가가 각도에 분부하듯 독자적으로 각처에 호령하게 하였다고 하는데, 어찌 국가가 직접 외방에 호령하지 못하고 일개 총섭의 손을 빌린단 말입니까?”(‘인조실록’ 7권, 2년 10월16일)라는 지사(知事·정2품 관직) 김류의 발언은 산성의 축조와 방어에서 교단의 역할과 총섭의 지휘권을 다시 한 번 확인해 준다.

그런데 이처럼 교단과 총섭에게 위임되어 있던 산성 관리의 관행은 이후 변화를 맞이하게 되었다. 숙종 13년(1687) 강화도에 의승을 설치하는 문제를 논의하는 자리에서 다음과 같은 기록이 등장한다.

“당초 남한산성을 축성할 때 승도에게 부역을 시키고, 일곱 개의 사찰을 세워 여러 도의 승려들에게 분정(分定)하여 입번(⼊番)하게 하였습니다.…남한산성의 의승은 비록 전국(팔로(八路))에 분정하지만 폐단이 오히려 많습니다. 지금 연백과 남양, 풍덕 등은 모두 야읍(野邑)인지라 승도가 본래 적어 적은 수의 승려들이 윤회입번(輪回⼊番)하는 것은 반드시 힘이 모자랄 것입니다.”(‘승정원일기’ 324책, 숙종 13년 9월 22일.)

입번(⼊番)이란 관리가 관청에 들어가 차례로 당직 또는 숙직을 서는 것을 말한다. 한자가 다른 입번(立番)이라는 말도 있는데 이는 교대로 근무한다는 뜻이며, 특히 군대에 복무하는 것을 이렇게 표현하였다. 이날의 논의에서는 결국 강화도에 대한 의승 윤번(=윤회입번) 설치안이 부결되고, 수년 후 강화도 내의 사찰에 승장(僧將)의 인신(印信)을 주어 정해진 인원수에 맞춰 스님을 모집하게 하는 것으로 결정되었다.(‘승정원일기’ 346책, 숙종 17년 윤7월7일.)

숙종 대의 이러한 일련의 논의 과정에서 확인되는 것은 소위 ‘의승의 윤회입번’이라는 것이 총섭 또는 승장으로 대변되는 교단에 승군의 모집과 관리를 위임했던 기존의 방식과는 다른 것이라는 점과, 바로 그 의승 윤번의 방식이 어느 시점부터인가 남한산성에 적용되어오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또 의승의 윤회입번은 전국을 대상으로 시행되었으며, 승려 수가 충분치 않은 지역에 대해서는 부과되기 어려운 제도라는 사실도 확인된다.

그러니까 의승 윤번은 사찰이나 승직을 지닌 교계 지도자의 주도하에 모집되는 방식이 아니라, 전국의 여러 고을에 돌아가면서(윤회(輪回)) 나누어 정하여(분정(分定)) 복무케 하는(입번(⽴番)) 승군 조달 방식을 말하는 것이다. 이들은 “순서에 따라 일정한 기간 동안 의승역을 지고 입역 기간이 종료되면 다시 거주하던 사찰로 돌아갔다.”(박세연, 19쪽.) 조선 초부터 국가의 승단 노동력 이용 즉 승역(僧役)은 다양한 목적과 방식으로 이루어져 왔지만, 양란을 거치고 주로 산성 등지에 승군을 배치하는 일이 상례화되면서 중앙정부-도-군현의 위계를 통해 분정 조발되며 보다 촘촘히 국가권력의 통제하에 놓이게 되었던 것이다.

물론 조선 후기의 모든 승역이 다 윤회입번 방식으로 이루어졌던 것은 아니다. 숙종 대의 논의에서 알 수 있듯이 지역적 특성과 상황에 따라 총섭, 승장에게 위임되는 승군 모집 방식과 의승 윤번의 방식이 공존하며 혼재했다. 서두에 재인용한 숙종 40년의 ‘실록’ 기사에서처럼 남한산성과 북한산성에 의승의 윤번이 시행되었고, 정조 때 지어진 용주사 외영(外營)의 승도들도 남‧북한산성과 동일한 방식으로 운영된 듯한 정황이 있다.(‘承政院日記’ 1799책, 정조 22년 10월19일, “⿓珠寺 旣置摠攝 團束僧徒 付之外營 間試砲放 此與南北漢僧卒無異.”) 윤번하는 의승의 숫자는 남한산성과 북한산성에 각각 350명씩이라고 언급되었는데, 관련하여 숙종 1년(1675)의 다음 기사를 참조할 필요가 있다.

“남한산성의 일곱 사찰은 각기 팔도에 분속되어 있습니다.…한 사찰을 더하여 여덟 사찰이 되었는데 각도의 의승으로 하여금 스스로 식량을 갖추어 산성의 절에 입번(立番)하게 하였으니 그 역이 심히 고통스러웠습니다. 그리고 호남의 의승은 6번으로 나누어 아무 달에 아무 사찰을 세우며, 1년에 한 사찰에서 입번하는 승려가 항상 백여 명을 내려가지 않았으니, 한결같이 군사가 상번하는 예와 같이 상번하는 의승이 왔습니다”(‘承政院日記’ 244책, 숙종 1년 1월19일)

의승을 6번으로 나누어 아무 달에 아무 사찰을 세웠다는 것은 2개월마다 사찰별로 교대근무가 이루어졌음을 의미한다. “이렇듯 의승은 1년에 2개월 동안 상번하여 산성에 수직하고, 입번하는 비용은 일체 자신이 속한 사찰에서 부담했으며, 정해진 입역 기간이 끝나면 다시 사찰로 돌아갔다.”(박세연, 22쪽.) 다만 여전히 풀리지 않는 한 가지 의문은 왜 윤회입번하는 스님들을 의승이라 불렀는가 하는 것이다. 혹시 산성으로 매개되는 양란기 의승군 궐기의 정신을 이어받고자 하는 취지에서 붙여진 이름은 아니었을까? 짐짓 추정해 볼 뿐이다.

※본문의 ‘의승 윤번제도’ 이해는 박세연의 ‘17~18세기 승군역(僧軍役) 운영방식의 변화와 의승방번전제(義僧防番錢制)의 시행’(‘불교학보98’, 2022, 19쪽.)에 크게 빚지고 있으며, 원전 이외의 따옴표 인용문 또한 같은 글에서 직접 인용한 것임을 밝힌다.(숫자는 인용된 페이지.)한국

민순의 종교문화연구소 연구위원 nirvana1010@hanmail.net

[1696호 / 2023년 9월 13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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