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복순아, 너 나랑 살면서 소리 배워라”
19세였다. 주민등록증을 막 받아든 때였고, 그저 판소리가 좋아 무작정 공연을 따라다니며 배우고 연습하던 참이었다. 당황스러웠다. 물론 소리꾼을 꿈꾸고 있었지만, 아무래도 처음 본 선생님의 도제가 되는 건 망설여졌다. 그러자 선생님은 “나 아무한테나 이런 말 안 한다. 대학 가야지. 내가 판소리 알려주마”하며 강한 말투로 권했다. 소리에 대한 열망이 컸던 소녀는 결국 선생님을 따라나섰다.
동초제 판소리 전수자 차복순(담화련·49) 명창이 재능의 꽃을 피우기 시작한 순간이다. 이름난 소리꾼인 그는 바로 그날부터 국가무형문화재 판소리 대가 이일주(1936~2023) 선생님의 도제로 들어가 동초제 다섯 바탕을 모두 사사했다. 동초제는 여러 판소리 명창들의 소리 중 좋은 점만 골라 재탄생시킨 판소리 계파로 동편제, 서편제, 만정제, 박녹주제, 보성제 등과 함께 국내에서 세가 큰 판소리 계파 중 하나다. 뿐만 아니라 전인삼 명창의 강산제 ‘춘향가’, 이성근 명창의 박동실제 ‘열사가’, 최승희 명창의 정정렬제 ‘춘향가’를 모두 사사한 실력파이기도 하다.
차 명창은 불교적 색채가 진한 ‘심청가’와 ‘흥보가’를 중심으로 전국 사찰에서 음성공양을 올리며 판소리와 불교를 잇는 가교역할에 매진하고 있다. “치열하게 갈고 닦으며 소리로 대중을 위로와 안식으로 이끄는 소리꾼의 길은 보살이 추구하는 ‘상구보리 하화중생’의 길과 크게 닮아있다”는 그의 눈웃음에서 일평생 수행자로 살아온 삶이 엿보였다.

어린 소녀는 이일주 선생님의 생활에 익숙해져야 했다. 새벽 4시에 일어나 쌀을 안치고 걸레를 들었다. 집안 곳곳 싹싹 문지르고 나면 아침을 먹었고, 선생님과 함께 등교했다. 하교하고 나면 다시 밥을 지었다. 선생님이 퇴근할 때까지 소리 연습을 게을리할 수 없었다. 조금이라도 실수하면 불호령이 떨어졌기 때문. 매일매일 숨 떨리는 긴장의 반복이었다.
“하루도 울지 않는 날이 없었어요. 우리 선생님은 그야말로 호랑이였거든요. 왕 중의 왕이에요. 불같은 성격은 기본이고 화를 내면 안광이 살벌하게 쏟아졌어요. 너무 힘들어 도망가고 싶었죠. 근데 또 그럴 용기는 없었어요. 오로지 연습, 연습에만 몰두할 수밖에 없었죠.”
부모님의 극심한 반대에도 도전한 길이기에 포기할 수 없었다. 아버지도 평소 판소리를 즐겼고, 어머니도 장구를 좋아했지만 전문 소리꾼의 길은 허락하지 않았다. 수없이 회초리를 들며 마음고생한 부모님께 쉽게 포기하는 모습은 더더욱 보이기 싫었다. 대학 졸업 후 전북도립국악원 창극단에 입단해서는 하루도 쉬지 않고 작품과 공연 연습에 매진했다. 오전 9시부터 오후 3시까지 업무와 각종 잡일을 도맡았고, 퇴근해서는 새벽 1시가 되도록 선생님과 개인 공부에 매달렸다.
자랑스러운 딸이 되려는 노력은 금세 성과를 보였다. 2000년 제4회 임방울국악제에서 ‘심청가’를 5시간에 걸쳐 완창했고, 25세의 나이에 장원인 대통령상을 수상했다. 임방울국악제는 국악인들에게 신인 등용문으로 불리는 최고 권위의 대회다. 전주대사습놀이 일반부에서도 장원(문화관광부 장관상)을 하며 역대 최연소 ‘명창’으로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딸의 성공을 지켜본 부모님은 동네 사람들에게 은근슬쩍 자랑하는 등 딸을 대견해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런데 “길한 해를 절대 놓치지 말라”며 갑작스러운 결혼을 권유했다. 마침 극단 입단 당시 서류를 봐준 공무원과 관계에 진전이 있었다. 이른 감이 있었지만 흔쾌히 가정을 이루고 두 딸을 낳았다. 그러나 판소리를 육아와 동시에 하기엔 많은 어려움이 뒤따랐다. 포기하려던 순간도 여러 번이다. 친딸처럼 여겨준 선생님의 존재가 아니었다면 ‘명창 차복순’은 없었을 것이다.
“선생님의 노후를 모시며 ‘나를 왜 제자로 삼았나’고 물으니 ‘때리고 혼내도 전부 받아들이고, 밥상을 엎어도 묵묵히 다시 차려오는 심성이 이뻤어. 오목조목 말도 잘하고 똑똑한 아이가 소리꾼 팔자라니 내가 책임져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지’ 하더라고요. 대통령상을 수상할 당시 선생님의 조언이 생생해요. 40대 50대가 받던 상을 25세 병아리가 받으니, 많은 사람이 우리 선생님을 두고 수군댔어요. 그런데 선생님은 ‘시기와 질투를 신경 쓸 시간 없다. 지금부터 진짜 공부다. 나는 널 대명창으로 만들고 말 테니 놀지 말고 연습이나 하라’며 독려했어요. 제 삶의 길이 선명해진 순간이에요.”


신심 깊은 불자였던 이일주 선생님을 따라 여러 사찰을 찾으며 그 역시 불자로 거듭났다. 굳세고 당찬 목소리로 음성공양을 펼치는 선생님과 호응하는 사부대중을 보면 절로 환희심이 일었다. 시간적 여유가 생길 땐 ‘맑고 향기롭게’ 운동을 일으킨 법정 스님(1932~2010)의 서적을 읽으며 고된 생활의 위안으로 삼았다. 이런 경험은 육체적, 정신적으로 극한에 이르렀을 때 자연스럽게 사찰을 찾도록 이끌었다.
직장생활과 대학원 석사과정, 강의, 육아를 병행하던 2006년. 그에게 이상 증상이 생겼다. 오히려 몸이 버티는 게 이상했다. 쉬지 않고 달려오다 한순간 무너졌다.
“처음엔 견딜 수 있어서 단순히 ‘내가 늙었구나’ 했죠. 병원에서도 아무 이상이 없다고 했어요.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자리에서 일어날 수 없었어요. 한 달 병가를 냈는데도 나아지지 않았고, 무기력증 속에 머리마저 들지 못했습니다. 이러다 죽겠다 싶어 부축받으며 무작정 해인사를 찾아갔어요.”


4박 5일 단기출가 프로그램에 참여했다. 새벽 3시에 일어나 예불을 올린 뒤 성철 스님 부도탑에서 참선정진에 들었다. 아침엔 격려차 방문한 큰스님들의 법문을 듣고 저녁엔 가만히 앉아 정진을 반복했다. 그간 원했던 부처님 법을 만나서였을까. 놀랍게도 몸에 힘찬 기운이 흘렀다. 일주일 전까지 음식조차 넣지도 못하던 몸이 팔팔히 움직였다. 정진을 회향하자 활기찬 20대로 돌아간 기분이었다.
그 후 해인사를 중심으로 신행생활을 이어오다 당시 해인사 승가대학장 법진 스님에게 가르침을 받았다. 완주 송광사 주지로 취임한 법진 스님은 불교학당을 열고 차 명창을 초대했고, 현재 매주 월요일 저녁에 2시간씩 정진하고 있다. 부처님오신날에는 항상 대표로 나서 육법공양을 올린다. 해인사에서 인연 맺은 도반들과 1년에 한 번씩 모여 3천배 철야정진도 진행하고 있다.
2021년 코로나 팬데믹은 소리꾼들에게도 치명적이었다. 답답한 마음을 해소하고자 인터넷 법문을 찾아보던 중 오대산 월정사 유튜브가 눈에 들어왔다. 월정사 수행원장 자현 스님의 법문은 사회적으로 격리된 차 명창의 가슴을 울렸다. ‘월정사 금강경 봉찬기도’에 동참해 독송과 사경을 시작하는 계기로 작용했다. ‘금강경’을 독송하며 ‘부모은중경’도 읽기 시작했다. 7년 전 아버지가 돌아가시며 큰 상처를 입은 어머니를 위로하고픈 마음으로 ‘부모은중경’ 주제의 창극을 하기도 했다.

“제가 아난다 역할을 맡아 부처님께 가르침을 받는 모습을 연출했어요. 저를 낳아주고 키워주신 어머니와 선생님께 무한한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싶어요. 지금은 뇌졸증을 앓고 있는 어머니를 간호하며 못다한 효도를 하고 있습니다.”
차 명창은 특히 심청가에 애정이 간다. ‘부모은중경’과 화엄의 가르침이 공존하고, 한 사람의 장님을 특정하는 게 아닌 천하 모든 장님을 구제하는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심청가에는 한 꽃이 피어남으로 인해 수만가지 꽃이 활짝 피는 화엄사상이 담겨 있습니다. 현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이 서로 의존 속에 관계 맺고 있음을 알면 부모와 은사, 주변인과 악연 구분 없이 친절한 태도를 갖출 수 있습니다. 많은 대중이 공연을 통해 화엄 사상을 체득하고 ‘친절’한 사람으로 거듭나길 기원합니다.”
부모와 선생님에 대한 존경심과 ‘화엄사상'에서 비롯된 인류애는 후학 양성으로 표출되고 있다. 그는 전북대, 우석대, 전남대, 전통고를 넘나들며 자신의 내공을 아낌없이 전하는 중이다. 매년 12월 제자 16명과 ‘동초제 흥보가’ 완창 공연도 개최하고 있다.
한낮의 포근함이 달빛에 젖은 늦은 저녁, 연습실을 찾은 제자를 위해 북채를 잡는 그의 손끝에서 아름다운 화엄의 꽃이 피어오른다. 묘음보살의 현신이다.

전주=고민규 기자 mingg@beopbo.com
[1726호 / 2024년 4월 24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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