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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불가 나룻배 삼아 수많은 이 피안으로 이끄는 우리 시대 ‘간다르바’

  • 무진등
  • 입력 2024.06.04 15:17
  • 호수 1731
  • 댓글 0

이찬우 작곡가

1962년 초파일, 대각사서 반주 인연
운문 스님 부탁에 찬불가 작곡 시작
‘이광수 청법가’ 읽고 단번에 만들어
​​​​​​​
고향 내려와 불교 잊히는 듯 했으나
불교합창단 창립으로 불연 깊어져
300여 곡 이상 작곡하며 날개 펼쳐
“통일된 찬불가로 결속력 높이길”

이찬우 작곡가는 “많은 불자들이 언제 어디서나 부처님을 찬탄하는 찬불가를 부르고 들을 수 있으면 좋겠다”고 서원했다.
이찬우 작곡가는 “많은 불자들이 언제 어디서나 부처님을 찬탄하는 찬불가를 부르고 들을 수 있으면 좋겠다”고 서원했다.

1962년 햇살이 따갑던 어느 여름날의 종로 대각사. 당시 대학생으로 절 일을 돕던 이찬우(82·백암) 작곡가는 밀려드는 졸음에 잠시 쉴 곳을 찾았다. 때마침 법회가 끝나 사람들이 빠져나간 텅 빈 법당에 들어갔다. 이곳저곳 둘러보는데 문득 불단 아래 미닫이문이 보였다. 저 안에서 잠깐 눈을 붙여야겠다 생각하고 비좁은 공간에 파고들어 가만히 몸을 누였다. 불경스럽다는 생각이 없지는 않았으나 시원하고 아늑한 느낌이 먼저 와닿았다. 호기심에 주변을 둘러보다 머리맡에 쌓인 책 중 한 권을 골라 펼쳤다. 춘원 이광수의 ‘청법가’가 눈에 들어왔다.

“덕 높으신 스승님 사자좌에 오르사/ 사자후를 합소서 감로법을 주소서/ 옛 인연을 이어서 새 인연을 맺도록/ 대자비를 베푸사 법을 설하옵소서”

졸음에 겹던 눈이 또렷해졌다. 청법가로 작곡해봐야겠다는 생각이 불쑥 일어났다. 그곳에서 나와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책을 다시 펼쳤다. 그러자 입에서 악상이 흘러나왔다. 그렇게 반나절만에 ‘청법가’가 탄생했다.

법회 때마다 불리는 청법가를 만든 이찬우 작곡가가 처음부터 불자는 아니었다. 그가 먼저 접한 것은 개신교였다. 고등학교 2학년 말, 의대를 준비했던 그는 우연한 기회로 중학교 선생님을 따라 부산시립교향악단의 공연을 관람할 수 있었다. 로시니의 ‘세비야의 이발사’와 베토벤의 ‘운명 교향곡’이 들려오자 심장이 고동치고 온몸에 전율이 흘렀다. 놀라운 경험이었다. 이제 그에게 음악은 일생을 바쳐도 좋을 새로운 세계였다. 자신도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는 음악을 만들어야겠다고 다짐했다. 그러다 교회에 가면 피아노를 칠 수 있음을 알게 됐고 곧바로 집 근처 교회로 달려갔다. 교회 성가대에 가입해 악보를 공부하고 피아노를 연습했다.

“하나님을 믿는다기보다 피아노를 치고 싶었습니다. 교회에서 음악의 기초를 다졌습니다. 대학에 가서도 참 많은 도움이 됐죠. 지금도 마음껏 피아노를 치고 공부할 수 있도록 도와준 교회에 감사해요.”

학교에서도 음악에 대한 열정은 더욱 뜨거워졌다. 차비를 아끼고 점심을 걸러가며 주말마다 클래식 음악실에서 공부했다. 그를 보며 친구들은 “찬우가 미쳤다”고 얘기할 정도였다. 선생님들도 얌전히 공부하던 학생이 하루아침에 음악에 빠졌으니 어리둥절할 수밖에 없었다. 그것도 잠시, 모두들 그가 음악을 공부할 수 있도록 도와주기 시작했다. 신문 배달하던 친구는 차비를 아끼는 그를 아침마다 학교에 태워줬다. 다른 친구들은 음악 시간을 정규수업으로 만들고 담당 선생님을 초빙할 수 있도록 학교에 건의했다. 선생님들도 그가 음악에 집중할 수 있도록 도왔다. 수업에 방해되지 않는 선에서 그가 작곡을 공부할 수 있도록 배려했다.

“제가 수업시간에 작곡하고 있어도 뭐라고 하지 않으셨어요. 수업에 방해만 되지 않는다면 언제 어디서든 작곡하도록 응원해주셨습니다. 음악을 할 수 있게 주변이 모두 도와주는 듯했죠.”

눈 떠서 잠들 때까지 음악에 빠져 지낸 지 2년 6개월, 그는 경희대 작곡과에 진학했다. 찬불가 ‘보현행원’ 작곡으로도 유명한 고 정민섭 작곡가를 단짝 친구로 만난 곳도 그곳에서였다. 대학 2학년 때 그는 정민섭 작곡가의 부탁으로 대각사에서 피아노를 반주하게 됐고 평생의 불연(佛緣)이 시작됐다. 

“그 친구가 대각사 운문 스님과 친분이 있어 절에서 피아노 반주를 자주 했더라고요. 그런데 부처님오신날이 다가오자 대뜸 저에게 반주를 부탁했습니다. 학창시절 교회를 다녔지만 음악이라면 뭐든 좋다 싶어 흔쾌히 하겠다고 했죠.”

찬불가 반주가 끝나자 정 작곡가는 절에서 작곡가 겸 합창단 지휘를 맡아볼 것을 권유했다. 운문 스님이 찬불가 운동으로 불교를 중흥하고자 대각사에 ‘연희어린이합창단’을 창단했고 그에 맞춰 작곡가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운문 스님은 ‘나는 나는 불교꽃’이라는 제목의 불교 시를 건내며 작곡을 부탁했다. 그가 곧바로 이를 작곡하자 스님은 학교 등록금부터 숙식까지 모두 지원해주겠으니 절에서 생활하며 노래를 만들어달라고 했다.

대학생활과 절 소임을 함께 살며 바쁜 나날이 이어졌다. 새벽이 되면 운문 스님은 작곡할 불교시를 건냈고, 학교에서 강의를 마치고 절에 오자마자 찬불가 작곡을 이어갔다. 엄청난 양이었다. 스님의 요청으로 시작한 찬불가 작곡이었지만 점차 불교가 좋아졌고 그 심오함에 매료됐다. 그가 청법가를 작곡한 것도 그 무렵이다. 
 

부산 안국선원 합창단과의 단체사진.
부산 안국선원 합창단과의 단체사진.

찬송가 작곡에 익숙했던 그는 가곡형태로 찬불가를 작곡했다. 그러나 점차 불교는 한국에서 오랜 역사를 지닌 만큼 조금 달라야한다고 생각했다. 고민 끝에 우리 전통음악의 음계인 ‘궁(宮)·상(商)·각(角)·치(徵)·우(羽)’ 오음계로 찬불가를 만들어갔다. 기르던 머리도 귀찮게 느껴져 스님처럼 아예 삭발했다. 여법한 관점에서 생각하고 불자의 모습으로 바뀌어가는 그를 보며 친구들은 출가하려는 것이 아닌지 묻기도 했다.

그러나 대학 졸업이 다가오자 부산에 있는 가족들의 생계를 책임져야 한다는 부담감이 커져갔다. 졸업과 동시에 무작정 부산으로 내려왔다. 운전으로 생계를 근근이 이어가는 아버지의 지친 어깨 뒤로 가난에 힘겨워하는 어머니, 동생 4명의 모습이 보였다. 손을 보태야겠다는 생각으로 일터에 뛰어들었다. 낮에는 음악학원 강사로, 저녁에는 해운대 나이트 클럽에서 피아노반주를 했다. 밤낮으로 일하며 번 돈의 대부분은 가족의 생활비에 보탰다. 집안 형편은 조금씩 나아졌지만 일에 지친 그에게 불교는 잊히는 듯했다. 

그러다 몇 해 뒤 불교음악이 다시 그를 찾아왔다. 당시 부산진구어머니합창단을 지휘하던 고향 친구가 불교합창제에서 지휘해줄 수 있는지 물었다. 친구는 교회 집사였기에 선뜻 지휘에 나서기 어려웠다. 그렇게 부산 코모도호텔에서 열린 불교합창제에 지휘자로 무대에 섰다. 그가 ‘청법가’ 작곡가라는 사실을 전해들은 불자들은 불교합창단 창립을 요청했고 그렇게 1986년 ‘우담바라 합창단’이 창단했다.

양산 청불사에서 지원을 받아 법회에서 찬불가 공연하며 규모를 키워간 ‘우담바라 합창단’은 단원이 50여 명으로 늘어났다. 부산 여러 사찰, 모임에서도 불교 합창단이 속속 창립되는 등 찬불가 바람이 거세게 불었다. 부산 시내에 창립된 38개의 불교합창단에서 모인 불자들로 구성된 불교연합회 합창단도 창립됐다. 불교연합합창단장에 그가 선출되면서 찬불가 작곡가로서의 날개를 펼치기 시작했다.

2001년 세계종교음악합창제 이태리가르다 초청 찬불가 발표에서 은상을 받고, 2002년 부산과 2004년 독일 브레멘에서 열린 ‘세계합창올림픽 종교음악’에 참가해 각각 동메달을 수상했다. 2004년부터 2019년까지는 수불 스님이 주지로 있는 부산 안국선원 합창단의 지휘를 맡았다. 2009년에는 조계종 총무원장상을 수상했으며, 2010~11년에는 조계종 문화부 ‘신작 찬불가’ 위촉 작곡가로 활동했다. 2012년에는 제1회 불교음악상 대상을, 2013년에는 작곡부문 묘음불교문화상을 수상하며 역량을 펼쳐나갔다.

올해 1월 개최한 ‘제 4회 이찬우 작곡발표회’에서 함께 부산 안국선원장 수불 스님과 이 작곡가.
올해 1월 개최한 ‘제 4회 이찬우 작곡발표회’에서 함께 부산 안국선원장 수불 스님과 이 작곡가.

지금도 부산금강합창단, 불승종 부산선원합창단, 부산포교사합창단, 붓다보이스콰이어의 지휘를 맡으며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올해 1월에는 ‘제4회 이찬우 작곡발표회’를 열어 15분 분량의 교성곡 ‘어느 암자의 사계절’ 등 새로운 찬불가를 선보였다. ‘나는 나는 불교꽃’을 시작으로 ‘청법가’ ‘석굴암 부처님’ ‘애착을 끊어라’ ‘일천강에 비치는 달’ 등 300곡 이상을 작곡한 그에게 찬불가는 그의 삶이고 음악인생이었다.

“찬불가에는 한국문화의 아름다움과 부처님 가르침이 담겨있습니다. 찬불가를 따라 부르며 자연스럽게 불법을 받아들이고 신행활동으로도 이어질 수 있지요.” 

그는 종단 차원에서 찬불가 심의위원회를 만들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찬불가를 공식적으로 인정해주는 단체에서 인증받은 찬불가를 중심으로 찬불집을 발간하고 사찰마다 통일된 찬불가를 불러야 한다는 것이다.

“기독교는 체계적이고 통일된 찬송집을 토대로 노래를 부릅니다. 우리 불교에서도 이런 체계적인 시스템을 갖출 필요가 있어요. 그래야 소속감과 결속력이 생기고 찬불가도 대중성과 생명력을 지니게 돼 100년, 200년 뒤까지 불릴 수 있습니다. 부처님 법이 오래도록 이어져야 하지 않겠습니까?”

많은 불자들이 언제 어디서나 부처님을 찬탄하는 찬불가를 부르고 들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이찬우 작곡가. 경전에 등장하는 불교음악의 신 간다르바가 천상의 노래로 부처님을 찬탄하듯 그도 찬불가를 나룻배 삼아 수많은 이들을 피안으로 이끄는 우리시대의 간다르바이다. 

이지윤 기자 yur1@beopbo.com

[1731호 / 2024년 6월 5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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