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장경’에 의하면 지장보살은 부처님께 아뢰기를 ‘일체중생이 성불할 때까지는 해탈하는 것을 미루고, 미륵보살이 올 때를 기다려 그때 부처되는 인연을 짓겠다’고 했습니다. 지장보살의 크신 원력은 말로 다 설명할 길이 없습니다. 그렇기에 지장보살을 염하는 것만으로도 중생들의 고통은 다 사라진다고 했습니다.
지장보살의 원력은 늘 우리 곁에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지장보살이 가르침을 가까이하지 않고 어리석은 생각에 빠져서 길을 잃고 헤매고 있습니다. 어디로 가야 될지 누구를 의지해서 공부할지 방황하고 있습니다. 참담함을 금할 수가 없습니다.
보살은 명호만 있지, 실제 모양이 없습니다. 여러분 중에 지장보살을 실제로 보신 분이 있습니까? 지장전에 모셔져 있는 분은 실제 지장보살은 아닙니다. 지장보살은 여러분 각자의 마음속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깨달음의 눈으로 보지 못하기 때문에 볼 수 없는 것입니다. 불보살을 직접 친견하기 위해서는 그런 성품을 갖춰야 합니다. 그런 성품을 갖추려고 노력할 때 보살이 우리 가까이에 다가와서 깨달을 수 있는 원인을 제공하고, 스스로 본래 부처였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그런데 우리는 너무 어리석어요. 매달리는 데만 익숙해요. 너무 괴로우니까 매번 절에 와서 부처님께 소원 성취를 빕니다. 부처님이 다 이루어주면 좋은데 그것을 이루게 하기 위해서는 내 정성이 필요해요. 바깥으로 구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안으로 살피는 것도 그것 못지않게 중요합니다. 안으로 진정한 지장보살의 원력이 무엇인지를 부처님 가르침을 통해서 전해 받고, 그것을 실천해서 증명할 수 있는 내가 되도록 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선지식을 친견하고, 그 선지식의 가르침에 의해서 자기 안에 있는 선지식을 일깨워서 보살의 원력으로 거듭나야 합니다. 그럴 때 소원이 성취되는 것이지, 바깥으로만 매달리고 뭔가 해달라고 해서 이뤄진다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부처님은 우리의 어리석음을 벗어나도록 무엇을 어떻게 하라고 경전을 통해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가르침은 돈오돈수한 눈으로, 불보살의 위신력으로 거듭났을 때 소화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갖추지 못하니 어떤 의미인지 잘 알지 못합니다. 그냥 ‘경전에 이렇게 쓰여 있으니 그렇게만 하면 된다더라’, 정도로 머물러 있으니 진정한 가르침을 알지 못합니다. 이 고통이 어디서 왔는지, 언제부터 이런 고통을 받고 있는지 나를 돌아보지 않고서는 그 고통의 원인을 알 수 없습니다. 고통의 원인을 알고, 그 괴로움에서 벗어나기 위해 노력했을 때 고통이 없는 세상, 해탈의 즐거움을 비로소 누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쉽지 않습니다. 누구나 그것을 원하지만, 그런 가르침을 가까이하고 있으면서도 모릅니다. 그것을 알기 위해서는 눈 밝은 선지식이 필요한 것입니다. 마치 시각장애인이 눈 뜬 사람으로부터 길 안내를 받아야 하는 것처럼 선지식의 도움을 받아야 바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어떤 분이 눈을 뜬 분이냐? 부처님은 지장보살을 내세우고, 경우에 따라 관세음보살, 문수보살, 보현보살을 내세워 고통받는 중생들을 제도하기 위해 방편을 열어 보이셨습니다. 중생들도 불보살의 말에 의지해서 그대로 실천하면 미래에 올바른 가치를 지닌 지혜의 눈을 뜨고 거듭나서 좋은 곳에 태어난다고 하셨습니다. 중생들이 스스로 어리석음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그런 법문을 하신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큰 절마다 계시는 선지식을 계속 모셔서 법문 듣고, 자기를 점검하고, 과연 내가 누군지 알아야 합니다. 이치로라도 살피고, 실제 체험해서 ‘아! 이거구나’ 하는 깨달음을 얻어야 합니다. 그런 인연에 의해서 보살이 되고, 또 보살이 되기 전에는 아라한과를 증득해야 합니다. 아라한과를 증득하는 것은 굉장한 것입니다. 남방불교에서는 수행을 통해서 아라한과를 증득하는 것을 최고의 이상으로 삼습니다. 그렇지만 거기에 머물고 집착해서도 안 됩니다. 우리는 대승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또 다른 눈을 한 번 더 떠야 합니다. 어떤 정신적인 벽을 깨뜨리고, 넘지 못보살 하는 그런 것을 넘어설 때 그 위치가 바뀔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천편일률적으로 10년 전이나 10년 지난 뒤나 같은 말만 되풀이하다 끝나는 겁니다. 자기 수행 정진의 역량만큼 드러내서 함께 할 수 있는 보살행을 해야 합니다. 그 첫 번째가 보시입니다. 보시라는 것은 물건만 주는 게 아닙니다. 정신적인 가치관을 열어서 눈을 뜨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 공덕은 돈보다도 더 귀합니다.
우리는 늘 깨어 있어야 합니다. 죽은 송장처럼 그런 삶을 살아서는 안 됩니다. 그래야 눈과 귀가 열리고 육근이 청정해집니다. 청정하다는 것은 무엇인가요? 단순히 깨끗한 게 청정한 것은 아닙니다. 청정은 물들지 않는 겁니다. 더러움에 물들지 않고, 깨끗함에도 물들지 않는 순수 본연한 것이 청정입니다. 청정한 모습을 직접 체험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어떤 가르침을 통해서 눈을 뜰 수 있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그것이 불자로서 거듭나는 겁니다. 최상의 불자로 거듭나려고 하면 잘 사는 게 문제가 아닙니다. 정신적으로 깨어나야 합니다. 그런 모습으로 거듭날 때 탈바꿈되는 것이고, 변화가 일어납니다.
부처님은 최상승법을 얘기하셨습니다. 또 많은 분들에게 대승의 가르침을 열어 보이셨습니다. 그러니 최고의 어떤 가치관에 눈뜨기 위해 수행자로서의 원력을 갖고 노력해야 합니다. 나이가 들었다고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내일 눈을 감더라도 오늘 끝까지 하겠다는 원력을 갖고 실천해 나가야 합니다.
철학자 스피노자는 내일 지구의 종말이 오더라도 오늘 사과나무 심겠다고 얘기했습니다. 하물며 부처님 가르침을 믿는 불자들이 어리석은 생각에 빠져서 구태해지면 되겠습니까. 모든 가능성을 열어서 청정한 기운이 온몸과 마음에 함께 퍼져서 더 많은 사람들이 안락을 얻을 수 있도록 기도해야 그 의미가 커지는 겁니다.
포교를 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자기 스스로 불교가 뭔지 알고 진심으로 포교를 해야 합니다. 누구든지 불교로 전환할 수 있도록 부처님 가르침을 얘기해 줄 때 불자가 세상에 많이 출연하는 것이지, 그냥 한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영화를 보다가 감동해서 펑펑 울 때가 있는 것처럼, 법문을 듣고 마음 깊은 곳에서 울림을 줄 때 중생이 제도되는 것입니다. 어리석은 번뇌 망상, 미망의 꿈에서 깨어나 탐진치 삼독을 변화시킬 수 있는 힘을 가질 때 중생 구제, 중생 제도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려면 자신부터 변화시켜야 합니다. 자기도 제도 못하는데 어떻게 남을 제도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100일간 기도를 하고 법문을 듣는 것은 그런 가르침을 배우고 실천하기 위해서입니다. 어떤 분이 어떤 법문을 하시든 정성스러운 마음으로 들을 때 그 가르침을 받을 수 있습니다. 정성이 필요합니다. 겸손에 정성이 깃들면 탑을 쌓는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탑만 쌓는 게 아닙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탑을 쌓는 것이에요. 그런 정성으로 우리는 거듭나야 합니다. 그럴 때 부처님 가르침이 귀에 쏙쏙 들어오고, 지혜로운 눈이 나도 모르게 떠지게 됩니다. 그런 공부 인연을 우리가 짓고 살아야 합니다. 그렇게 할 때 내가 바뀝니다. 결과가 좋아집니다. 그러니 지장 100일 기도를 정성 들여서 하세요.
지장보살의 원력으로 여러분들의 삶이 달라지게 됩니다. 대게 지장보살을 명부전에 모십니다. 그런데 명부라고 할 때 ‘깜깜하다’는 느낌을 갖고 달갑지 않게 생각합니다. 그건 선입견입니다. 지장보살은 깜깜한 것을 밝게 해주는 힘이 있어요. 실제로 지장보살은 살아있는 영가와 죽은 영가를 동시에 천도하게 만드는 위신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어둠을 밝히는 지혜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흔히 제사를 지낸다고 하는 데, 절에서는 제사를 지내는 것이 아닙니다. 재를 지내는 것이에요. 재를 지낸다는 것은 영가들이 부처님의 가르침을 만나 지혜로운 눈을 뜨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불교를 제대로 알면 굳이 유교식으로 제사를 지낼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절에 와서 재를 지내는 것으로 충분합니다. 조상들이 가는 곳을 제대로 알아서 바르게 천도하면 되는 것입니다. 형식에 집착할 필요도 없습니다. 오직 우리는 지혜로운 눈을 뜨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그것을 가르치기 위해 지장보살이 그 모습을 나툰 것입니다. 중생의 어리석음을 일깨우기 위한 보살행인 것이지요. 그런 지장보살의 원력을 믿고 염하면서 지혜로운 눈을 뜨기 위해 지극한 마음으로 정진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렇게 된다면 여러분은 곧 고통에서 벗어나 일상에서 행복을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좋은 인연 맺으시길 기원합니다.
정리=주영미 기자 ez001@beopbo.com
이 법문은 6월 1일 금정총림 범어사(주지 정오 스님) 설법전에서 봉행된 ‘2024 백중지장기도 선지식 초청법회’ 초재에서 금정총림 율주 수불 스님이 설한 내용을 요약한 것입니다.
[1736호 / 2024년 7월 10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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