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늘은 참선 철야 정진을 하는 날입니다. 그래서 화두(話頭)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화두는 간화선(看話禪)의 핵심으로, 수행자가 본래면목(本來面目)을 찾는 가장 직접적인 수행법입니다. 이 수행법은 시대와 환경에 따라 조금씩 변화해 왔습니다. 기후와 풍토, 그리고 사람들의 근기(根機)가 다르니 수행법도 달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불교가 중국으로 전래된 뒤, 중국에서는 선종(禪宗)이 발전하며 조사선(祖師禪)으로 특화되었습니다. 이를 조사선 시대라고 말합니다. 조사선의 핵심을 조사 스님들이 내놓은 깨달음의 노래입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며 많은 문제가 생겼습니다. 후대 사람들이 조사 스님들의 말씀을 깊이 참구할 생각은 하지 않고 단지 시로 알고 읽거나 희론(戱論)으로 삼기 시작했습니다. 이것은 수행자의 길을 막는 큰 장애이며 병폐였습니다.
그래서 조사 스님들의 깨달음의 노래 가운데 하나를 들어 참구하는 가르침이 제시됐습니다. 이렇게 해서 간화선이 태동하게 되었습니다. 물론 간화선의 뿌리는 부처님에게 있습니다. 부처님께서 출가하시며 “어째서 이 세상이 이렇게 되었는가?”라는 의문을 품으셨던 것처럼, 간화선 또한 의문에서 시작됩니다.
간화선이 명료해지기 시작한 것은 송나라 때입니다. 바로 대혜종고(大慧宗杲) 스님에 의해서입니다. 당시 사람들은 생각이 너무 많았습니다. 지식과 논리에 지나치게 치우쳐 있었습니다. 많은 사람이 경전을 외우고 해석하며 수행을 논리적으로 접근하려 했습니다. 제대로 수행은 안 하면서 그저 외우고 이야기하는 것으로 업을 삼으니 병폐도 그런 병폐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대혜 스님은 이런 태도를 병폐로 지적하며, 조사 스님들이 남겼던 어록에서 화두를 뽑아 참구하는 간화선을 주창한 것입니다. 화두를 통한 수행은 분별심(分別心)을 끊고, 본래 청정한 마음으로 돌아가는 길입니다.
깨달음은 언어 이전의 소식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희론으로 삼아 지적유희를 벌이니, 딱 화두 하나만 명료하게 들게 한 것입니다. 침묵은 어떻게 보면 불이중도(不二中道)를 이야기 한 것입니다. 선불교에서 “개구즉착(開口卽錯), 입을 열면 곧 그르친다”는 말이 있듯이, 깨달음은 논리와 언어로 설명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화두를 단순히 외우거나 논리적으로 이해하려는 태도는 수행에서 벗어난 것이며, 오직 깊은 몰입이 필요합니다.
여러분도 경험한 적이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어떤 일에 대해 골몰하고 있으면 순간 자신을 잊어버리는 순간이 옵니다. 다른 사람이 와서 툭 치면 그때 제정신으로 돌아오는 경우가 있습니다. 화두를 이렇게 들라는 겁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화두를 들 생각은 안 하고 어렵다는 생각부터 일으킵니다. 화두를 들기 위해서는 바로 그 생각부터 내려놓아야 합니다. 쉽다는 생각도 물론 내려놓아야 하지요. 쉽다 어렵다는 생각 자체가 양견(兩見)이며 분별입니다. 결코 중도(中道)가 아닙니다. 그러니까 선입견 없이 받아들이는 자세가 중요합니다.
대표적인 화두로는 ‘이뭣고(是甚麼)’가 있습니다. “부모미생전(父母未生前), 나의 본래 모습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입니다. 이렇게 화두를 붙들고 번뇌 망념을 내려놓은 채 깊이 참구하면, 반드시 깨달음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이렇게만 하면 번뇌망상이 다 사라지는데, 제대로 참구할 생각은 안 하고 좀 더 쉬운 방법을 찾아 헤매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 방법을 찾으면 또 좀 더 쉬운 방법, 또 쉬운 방법 이렇게 해서 끝이 없습니다. 사람 심리가 그렇습니다. 그러나 수행은 그렇게 해서 결코 되지 않습니다. 화두를 받으면 오로지 그 화두에 몰입해야 합니다. 그것이 수행입니다.
제가 겪었던 일을 하나 들려드리겠습니다. 한때 제가 도반들과 함께 어느 허름한 절 같은 곳에서 선방을 잘 일궈보겠다는 원력으로 새벽 저녁을 참선하고 오전과 오후는 그야말로 열심히 일한 적이 있습니다. 그때 얼마나 일을 열심히 했는지 아마도 평생 하려는 일을 그때 다 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눈코 뜰새 없이 일을 했습니다.
그때 길 모퉁이를 돌아가면 작은 초가집이 하나 있었습니다. 흙으로 지은 집인데 부엌이 따로 없어서 집 밖에 나 있는 아궁이에 불을 때면 연기가 집 안으로 자욱하게 들이차서 방에 들어갈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불을 때고 나왔다가 몇 시간 후에 들어가 자곤 했습니다.
어느 날 저는 아궁이에 불을 때며 “이뭣고” 화두를 들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불길이 확 솟아오더니 아궁이 속에서 뭔가가 튀어나왔습니다. 깜짝 놀라서 보니, 그것은 쥐였습니다. 쥐는 불이 붙은 채로 숲으로 달렸습니다. 아궁이 속에서 뜨거운 불길을 참다가 생사를 걸고 튀어나온 것입니다.
그 순간 저는 깨달았습니다. 공부도 저렇게 해야 하는구나. 쥐가 불 속에서 고민했다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이쪽으로 나갈까, 저쪽으로 나갈까?” 망설였다면 그대로 타 죽었을 것입니다. 쥐는 아무 생각 없이 본능적으로 결단을 내려 생사를 뛰어넘었습니다. 화두를 들 때도 이와 같아야 합니다. 아궁이를 탈출한 쥐처럼 분별을 내려놓고 오로지 화두에 온전히 몰입해 생사를 뛰어넘어야 합니다.
수행은 은산철벽(銀山鐵壁)을 뚫는 것과 같습니다. 은산철벽은 하늘을 찌를 듯한 높은 산과 단단한 철벽을 뜻합니다. 수행자는 이처럼 거대한 난관 앞에서도 물러서지 않고 나아가야 합니다. 그 은산철벽의 의미를 저는 불붙은 아궁이를 뛰쳐나오는 쥐를 통해 체득할 수 있었습니다.
폭포를 거슬러 오르는 연어도 마찬가지입니다. 연어는 폭포에서 떨어지더라도 다시 도전합니다. 떨어지면 다시 오르고, 떨어지면 다시 오르고. 그렇게 끝없이 올라갑니다. 중국 전설에 폭포를 거슬러 오르면 용이 된다는 말이 있다고 합니다. 등용문(登龍門)이 바로 그런 의미입니다. 연어도 폭포를 넘는데, 우리에게 무엇이 장애가 될 수 있겠습니까?
수행자는 연어처럼 끝없이 정진해야 합니다. 뗏목이 거센 물살을 헤치고 올라가듯, 끊임없이 노를 저어야만 앞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수행에서 중요한 또 하나의 요소는 스승에 대한 믿음입니다. 수행자는 스승을 절대적으로 믿어야 합니다. 신라 말 고려 초, 구정선사(九鼎禪師)와 무염국사(無染國師)의 이야기를 들려드리겠습니다.
옛 서울, 그러니까 당시에는 한양입니다. 한양에서 강릉으로 가는 길목에는 대관령 고개가 있었습니다. 어느 겨울날, 비단 장수 청년이 눈 덮인 대관령 고개를 넘고 있었습니다. 고갯마루에서 노스님 한 분이 바지를 풀고 앉아 있었습니다. 그런데 노스님이 추운 날씨 속에서 ‘으으’ 하고 신음소리를 내고 있었습니다. 알고 보니 스님은 옷 속에게 이(虱)에게 피를 공양하고 있었습니다. 이의 피 빨림으로 인한 가려움을 스님은 참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때 비단 장수 청년은 이 모습을 보고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스님께 물었습니다. “어떻게 하면 스님처럼 될 수 있습니까?” 스님은 대답하셨습니다. “내가 하라는 대로 할 수 있겠느냐?” 청년이 그러겠다고 하자, 스님은 청년을 데리고 월정사 근처의 조그마한 토굴로 갔습니다.
스님은 청년에게 솥을 걸라고 지시했습니다. 청년은 솥을 걸었지만, 스님은 그것을 주장자로 치며 무너뜨리고 다시 걸라고 했습니다. 이렇게 아홉 번이나 솥을 걸게 했습니다. 그러나 청년은 단 한 번도 불평하지 않고 스승의 말씀에 따랐습니다. 이 청년이 바로 구정선사이며, 그 스승이 무염국사입니다.
스승을 믿는 것은 곧 부처님을 믿는 것이며, 나 자신이 본래 부처임을 믿는 것입니다.
화두를 참구할 때는 스승의 말씀을 따라 의문을 품고 끝까지 몰입해야 합니다. 조주(趙州) 스님의 화두 “개에게 불성이 있습니까?”라는 질문이 있습니다. 어떤 선객이 와서 조주 스님에게 “개에도 불성이 있습니까?” 이렇게 물었습니다. 그때 조주 스님은 “무(無)”라고 대답하셨습니다. 그런데 부처님께서는 ‘열반경’에서 “일체중생 실유불성(一切衆生 悉有佛性)”이라고 하셨습니다. 부처님께서 모든 중생에게는 불성이 있다고 했는데 왜 조주 스님은 없다고 했을까 이게 화두입니다. 만약 그때 바로 의문을 품지 않고 조주 스님이 ‘열반경’의 가르침도 모르다니, 나보다 훨씬 배움이 짧구나 하고 떠나버렸다면 이는 근기가 약한 것입니다. 의문이 바로 화두입니다. 화두를 논리로 풀려고 하면 수행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오직 몰입하여 깨달음을 얻어야 합니다.
여러분은 본래 부처입니다. 다만 무명의 구름이 마음을 덮고 있을 뿐입니다. 수행은 이 구름을 걷어내는 길입니다. 물이 흘러가다 보면 결국 바다에 닿듯, 참구하고 또 참구하다 보면 스스로 본래면목을 확인하는 날이 올 것입니다.
철야 정진에서 화두를 깊이 들고 몰입해 보십시오. 본래 부처임을 확인하는 값진 시간이 될 것입니다.
정리=주영미 기자 ez001@beopbo.com
이 법문은 백담사 기본선원 조실 영진 스님이 11월 7일 조계사 선지식 철야용맹정진 법회에서 법문한 내용을 요약정리한 것입니다.
[1755호 / 2024년 12월 4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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