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88년, 대전 용두동은 한국전쟁의 잔해가 고스란히 남아 있는 땅이었다. 피난민들이 모여 만든 피난촌, 주소지도 없는 판잣집들이 언덕을 뒤덮었다. 삶의 터전이라기보다 생존을 위한 마지막 피난처처럼 보이는 마을이었다. 한국전쟁이 끝난 지 30년 가까운 세월이 흘렀지만 마을엔 전쟁의 상흔이 남긴 환자들과 노인 인구가 많았다. 피난민이 사는 곳이니 변변한 병원이 있을 리 만무했다. 병원이 있다고 해도 하루 사는 것도 팍팍한 살림에 병원비가 있을 리 없었다. 그래서 아파도 치료를 거부하는 이들이 대다수였다. 이런 마을에 갓 대학을 졸업한 패기 넘치는 청년 한의사가 한의원 간판을 달았다. 25살 최창우 한의사. 한의원의 주인이었다.
“1988년 용두동은 여전히 한국전쟁이 끝나지 않은 곳이었습니다. 삶의 상처는 치유되지 않았고, 가난과 병고는 또 다른 전쟁이었습니다. 주민들에게 병원치료란 사치였습니다. 그러나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저는 그곳에 한의원을 열어야 했습니다. 그들이 어디서도 찾을 수 없던 희망을, 자비와 의술로 전하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그를 바라보는 주민들의 눈빛은 차가웠다. 낯선 청년 한의사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분위기였다. 전쟁의 상흔과 가난이 만들어낸 의심과 경계가 그의 앞을 가로막았다. 가난이나 아픔을 모를 것 같은, 무엇보다 이 사회의 최고 학벌인 한의사가 판자촌 같은 허름한 동네에 한의원을 낸다는 것이 왠지 모르게 불편했다. 그러나 그는 이런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아픈 사람이 있으면 어디라도 마다하지 않았다. 하루에도 수십 번씩 미로처럼 좁고 비탈진 언덕길을 부지런히 오르내리며 환자를 찾았고, 돈이 없다는 말에도 그의 치료는 멈추지 않았다. 비록 고단한 날들이었지만 그는 항상 부처님을 떠올리며 마음을 다잡았다.

“부처님께서는 왕위와 부귀영화를 버리고 고행의 길로 나아가셨습니다. 그분의 길을 따르는 제 삶 또한 쉽지 않았지만, 그 길이 바로 제가 가야 할 길이라 믿었습니다.”
그의 진심은 서서히 주민들에게 가 닿았다. 그의 한의원 문턱은 점점 낮아졌고, 의심의 눈길로 바라보던 주민들도 점차 그를 신뢰하기 시작했다. 아프면 와서 상담하고 치료받고 의지하는 동네에서 가장 편한 곳으로 점차 탈바꿈하기 시작했다. 결코 생계를 위한 진료가 아닌, 사람을 위한 진료는 입소문을 탔다. 그리고 그는 무엇보다 뛰어난 한의사였다. 그의 치료를 받고 새로운 삶을 살게 된 환자들의 사연이 전국 각지로 퍼졌다. 움직이지 않던 손이 펴지고, 원인을 알 수 없는 통증에서 벗어난 환자들이 제비처럼 사방에서 환자를 물고 왔다.
“신념과 젊은 날의 패기로 환자들을 찾아갔던 그 날들은 돌이켜보면 저에게도 정말 힘들었던 시간이지만, 다시 돌아간다 해도 같은 선택을 할 것 같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온 중생을 위해 왕자의 자리, 전륜성왕의 운명에서 벗어나 고행의 길을 기꺼이 걸으셨습니다. 불자로서 한의사로서 편한 길보다 환자들이 필요로 하는 곳에 가겠다는 저의 선택도 부처님의 길을 따라 걷는 일이었습니다.”
그는 1963년 부처님오신날, 대전에서 태어났다. 독실한 불자였던 부모님 밑에서 자란 그는 절에 드나드는 일이 집 문턱을 넘는 것처럼 자연스러웠다. 일상처럼 절에 다녔던 그가 본격적인 신행활동을 시작한 것은 불교종립학교인 보문고에 진학하면서부터였다.
“제가 부처님오신날에 태어난 것을 보니, 저의 불연은 아마도 숙연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제가 진정 불자로 거듭나게 된 계기는 고등학교에 진학하면서부터입니다. 당시 고등학교 진학제도가 시험에서 평준화로 바뀌면서 무작위로 고등학교를 배정받게 됐는데, 공교롭게도 불교종립학교인 보문고등학교에 진학했기 때문입니다.”

그는 보문고에 진학하자마자 불교학생회에 가입했다. 불교학생회 첫 법회에 참석하는 그는 큰 충격을 받았다. 법회에 참석하는 선배들의 신심이 상상 이상으로 깊었기 때문이다. 스스로 불자라고 생각했던 그는 지금까지의 신행 생활을 반성하게 됐다. ‘반야심경’을 외우고 목탁 치는 법을 배우며 그는 누구보다 열심히 불교학생회 활동에 참여했다. 주말 법회에 거의 빠지지 않고 참석했다. 이렇게 1년을 보내고 2학년이 됐을 때 그는 학생회 구도부장을 맡아 법회집전을 직접 주관하게 됐다.
그러던 어느 날, 보문산 구암사에서 주말 법회를 진행했는데 한 스님께서 그를 보더니, 마치 부처님이 제자들에게 수기를 주듯 말했다. “너는 나중에 의사가 되겠구나.” 그 말은 낯설고도 깊게 가슴에 박혔다. 문과생이었던 그에게 의사의 길은 상상조차 하지 못한 일이었지만, 그 말은 시간이 흘러 그의 삶을 바꾸는 화두가 됐다.
그리고 세월이 흘러 열심히 공부를 하던 고등학교 3학년 시절, 당시 친한 친구로부터 대전대에 한의대가 신설된다는 이야기를 듣게 됐다. 그리고 무엇보다 신설되는 학과인 만큼 문과와 이과 구별 없이 지원이 가능하다는 말에 스님에게 들었던 화두 같았던 이야기가 ‘문득’ 떠올랐다. 이렇게 그는 대전대 한의학과 1기로 진학했다.
“부처님오신날에 태어난 것도, 보문고에 입학한 것도, 한의대에 진학한 것도 우연이 아닌 모든 것이 부처님께서 저에게 주신 시절 인연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돌이켜봤을 때 우연하게 들려주신 스님의 한마디는 혜안에서 비롯된, 저를 향한 일종의 수기였다고 생각합니다.”
대학에 진학해서도 대전대 불교동아리에 가입해 신행활동을 지속했다. 각종 법회는 물론 사찰순례 등에도 열심히 참여했다. 방학에는 가방 가득 책을 짊어지고 산사로 들어가서 학업에 매진했다. 당시 그가 찾았던 절은 충남 금산의 태고사. 당시 태고사에 계셨던 도천 스님께 방을 얻고 방값으로 신도들에게 법회 안내문을 보내는 일을 도왔다. 공부에 지칠 때면 108배를 올리고 새벽예불에도 참석해 흐트러진 마음을 다잡기도 했다.
그렇게 신행과 학업에 열정을 쏟았던 대학 생활을 마치고 개원한 한의원이 바로 피난촌이었던 용두동의 ‘대중한의원’이었다. 당시 선배들은 그를 극구 만류했다. 한의사가 귀하던 시절, 서울 강남을 비롯해 목 좋은 곳에 개업한다면 큰돈을 벌 수 있었다. 안타깝게 여긴 선배들이 한달 넘게 그를 찾아와 전망 좋은 곳들을 추천하며 달랬다. 그럼에도 그는 뜻을 굽히지 않았다. 그리고 35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고집스럽게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성심성의껏 환자들을 진료하며 쌓인 명성은 입소문을 타고 전국에 퍼져나갔다. 환자들을 위한 헌신과 환자들의 입소문은 그를 10대부터 12대까지 세 번에 걸쳐 대전시한의사회장의 소임을 맡게 했다. 그는 대전시한의사회장 재임 기간에 국내외 의료봉사를 활발하게 펼쳤다. 특히 베트남 해외의료봉사활동과 중국 연변 의료시설 지원 등은 봉사를 넘어 한국의 한의학을 세계에 알리는 데도 기여했다.
그의 삶은 아들에게도 깊은 영향을 미쳤다. 대를 이어 한의사의 길을 선택한 그의 아들은 현재 아버지가 운영하던 한의원을 이어받아 환자들을 돌보고 있다. 아들은 어릴 적부터 아버지가 환자들에게 기울였던 정성과 헌신을 가까이에서 지켜보며 자랐다. 아들은 3년 전 아버지의 뒤를 이어 용두동에서 한의원을 운영하며 아버지가 열었던 길을 겹치듯 걷고 있다. 물욕 없이 청빈하고 자비로운 삶을 살았던 아버지의 신념 또한 그대로 이어받았다.

그는 이제 35년 한의사로서의 삶을 정리하고 모교인 보문고 총동창회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대전충남 유일의 불교종립학교인 보문고의 발전이 곧 지역 불교중흥의 원동력이 될 것이라는 믿음에서다. 그는 태국에서 이운된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모교에 봉안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진신사리를 통해 학교를 불심의 중심지로 만들고자 한다. 그의 노력은 지역 불교 발전을 위한 또 다른 길로 이어지고 있다.
“부처님 사리를 모교에 봉안하는 것은 단순한 행사가 아닙니다. 학교가 불심의 씨앗을 품고, 더 많은 사람들이 부처님의 가르침을 접할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입니다.”
그는 또 대전 지역에 불교방송국이 설립되기를 꿈꾸고 있다. 불교방송국이 지역 불심을 키울 원동력이 될 것이라 믿고 있기 때문이다.
“광역시 중 유일하게 자체 불교방송이 없는 곳이 대전입니다. 미약한 대전충남 지역의 불심을 키우기 위해 불교방송국이 생겼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혼자만으론 역부족일 수 있지만 불자 한명 한명의 원력이 모인다면 분명 흐름을 바꿀 물줄기가 트일 것입니다.”
37년 전 피난촌에서 시작된 그의 자비행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물욕을 멀리하고 자비심으로 이어온 그의 삶은 참 불자의 전형이었다. 그리고 전법과 포교를 향한 그의 발걸음은 지금도 불국토를 꿈꾸며 이 땅에 한발 한발 큼직한 족적을 남기고 있다.
유화석 기자 fossil@beopbo.com
[1762호 / 2025년 1월 22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 이 기사를 응원해주세요 : 후원 ARS 060-707-1080, 한 통에 5000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