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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선(55) 조사선 수행 - 하

기자명 법보

법문 듣던 중 ‘이것’과 하나 돼
부정적 생각에 시달리지 않아
‘법’과 ‘나’ 모두 사라진 체험 후
‘일 없는 사람’ 실감하며 공부

화면이 멈추듯이 툭 끊어졌다가 다시 이어지는 현상을 겪은 날부터 마치 한 짐 내려놓은 듯 마음이 가벼워졌다. 무심선원 김태완 선생님과 면담하니 별다른 말 없이 꾸준히 공부를 이어가라고 조언했다.

그날도 법문을 듣고 있었다. 선생님이 “이것입니다” 하며 손가락을 들어 올리는데, 순간 온 우주가 확 열리며 ‘이것’과 딱 하나가 되어 드러났다. 나도 모르게 ‘앗! 세상에 이런 일도 있구나’라고 놀라움을 감출 수 없었다. 이때부터 이해되지 않았던 법문이 비로소 내 얘기처럼 소화되기 시작했다.

체험 이후부터 강박적으로 완벽을 지향한 ‘내 모습’에 집착하지 않게 됐다. 예전에는 업무상에서 실수하거나 가족과 다투게 되면 ‘내가 더 잘해야 했는데’라는 죄책감이 끊임없이 올라와 온종일 시달렸다. 하지만 그 체험 이후 문득문득 올라오는 괴로운 생각이 죄책감으로 이어지지 않았고, 그러한 부정적인 생각도 사실 ‘이것’을 벗어나지 않음이 선명해졌다. 그저 그동안 내가 내 생각에 속아왔다는 사실이 지극한 현실로 다가왔다.

그리고 1년 반 정도 지난 어느 날, 퇴근하고 동네를 산책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농구공만 한 물방울이 눈앞에 나타나더니 ‘쪼로록’ 줄어들다가 ‘팡’ 터져서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다음 순간 그전까지 문득문득 확인되던 ‘이것’이 강렬해지며 마치 육체와 정신을 한꺼번에 끌어당기듯이 확연해졌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동안 법이라고 생각했던 ‘이것’이 한순간 사라져 버렸다. 처음엔 ‘공부가 잘못되었나’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하지만 이내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맛보고, 느끼고, 생각하는 모든 것이 ‘이것’ 아닌 게 없다는 사실이 스스로 드러났다. 이때부터 늘 따라다니던 상기병도 함께 사라졌다.

그렇게 꾸준히 공부를 이어나가며 몇 년이 흘렀다. 그날도 양치하려고 세면대 앞에 섰다.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은 그대로인데 ‘내 흔적’이 감쪽같이 사라졌다. 깜짝 놀라 손바닥을 뒤집어 보았다. 분별 생각으로 보는 내 모습은 그대로인데 어디에도 ‘내 흔적’을 찾아볼 수가 없었다. 그러더니 지금껏 경험하지 못했던 공포심과 죄책감 등 온갖 부정적인 경계가 한꺼번에 들이닥쳤다.

보이고 들리고 느끼는 것이 걸리고, 먹고 마시고 사는 것 모두가 마음에 걸렸다. 하다못해 숨 쉬는 것 하나하나 걸려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특히, 여태 도반에게 가끔 한마디 했던 ‘법’에 대한 말이 얼마나 부끄럽고 수치스럽게 다가오는지, 정말 쥐구멍에 들어가 숨고 싶은 심정이었다. 만약 공부하지 않았다면 거기서 바로 무너졌을 법한 두려움이었다.

그렇지만 ‘헐~ 이런 경계도 오는구나’ 하며 피식 웃고 넘어갔다. 그러더니 다음 순간 아무 일이 없어졌다. 너무나도 말끔해지고 평범해졌다. 옛 스님들이 ‘이 공부는 일 없는 사람[無事人]이 되는 공부’라고 하셨듯 정말로 아무런 할 일이 없어져 버렸다.

이제는 정기법회만 참석하고 평상시엔 법문을 따로 듣지 않는다. 언제부터인지 모르겠지만 일상을 살아가는 것이 법문 아닌 것이 없다. 보고, 듣고, 느끼고, 말하고, 행동하는 것이 법문 아닌 것이 없다. 일상을 사는 것과 법문을 듣는 것이 아무런 차이가 없다. 화가 나면 화를 내고, 슬프면 울고, 기쁘면 웃는다. 그런데도 아무런 할 일이 없다. 그때그때 화나는 데서, 슬픈 데서, 기쁜 데서 진실이 확인된다.

온갖 것을 다하면서도 아무 일이 없다는 것이 이런 것인가 싶다. 아무 일 없는 즐거움, 이것은 직접 경험해보지 못하면 그 누구도 헤아리거나 상상할 수 없을 것이다.

[1763호 / 2025년 1월 29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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