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락 중생들은 이른 아침마다 각자 옷자락에 갖가지 아름다운 꽃을 가득 담아 타방의 십만 억 부처님께 공양을 올린다.”
법장비구가 세운 서원 중 제23원은 극락의 대중이 모든 불국토 부처님께 공양을 올리는 일에 대한 것입니다. 대승불교에서 부처님께 직접 공양 올리는 일은 큰 공덕 중 하나입니다. ‘대승기신론’에서는 불퇴전지에 이르지 못한 중생은 부처님께 친승공양(親承供養)하면 정정취에 이를 수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극락의 중생은 왕생하여 이미 정정취가 되었지만, 여전히 날마다 부처님께 공양을 올립니다.
‘무량수경’은 이 부분을 좀 더 상세하게 서술합니다. 밥 한 끼 먹는 정도의 시간에 시방의 무량한 불국토에 계시는 부처님께 공양을 올립니다. 이렇게 짧은 시간에 타방 불국토를 왔다 갔다 할 수 있는 이유는 바로 부처님의 위신력 덕분이라고 합니다.
공양물도 ‘아미타경’에서는 꽃만 언급되지만, ‘무량수경’에 따르면 향, 기악, 일산, 당번 등 무수한 공양물을 원하는 대로 올릴 수 있습니다. 제24원으로 일으킨 바대로 올리고 싶은 모든 공양물은 생각하면 바로 준비됩니다. 부처님께 예배하고, 이 공양물을 받들어 위로 던지면 허공에서 이 모든 것이 ‘꽃으로 만든 일산[花蓋; puṣpacchatra]’으로 변화하는데, 그 광명은 찬란하고, 향기가 두루 풍깁니다. 이 꽃 주위는 4백만 리나 되는데 계속 늘어나 삼천대천세계를 뒤덮고 나서 땅에 내린 순서대로 저절로 사라집니다. 그때 그곳 보살들이 기뻐하며 음악을 연주하고, 부처님의 덕을 찬탄합니다.
‘대지도론’에는 앞을 보지 못하는 제자 아나율의 바늘에 실을 꿰어주는 석가모니불의 일화가 있습니다. ‘한량없는 공덕의 바다 끝까지 채운 붓다께서 왜 또 공덕을 지으려 하시냐’는 물음에 다음과 같은 답을 하십니다. “나는 비록 공덕을 짓는 데 있어 끝까지 이르렀지만, 본래부터 공덕을 짓는 데 만족하는 마음이 없었기에 부처가 되었다. 따라서 부처가 된 지금도 공덕 짓는 일을 멈추지 않는다.” 정각을 이룬 부처님도 공덕 짓는 일을 그만두지 않으시는데 중생은 얼마나 공덕을 지어야 깨달음에 이를 수 있을까요?
‘무량수경’에는 “교만하고, 저열하고, 게으르면, 이 법을 믿기 어렵나니, 숙세에 여러 부처님을 뵈어야만 이 같은 가르침을 좋아서 듣게 된다”라는 게송이 있습니다. 정토법문을 믿지 못하는 이유가 부처님과의 인연이 적어서 그렇다는 말이 됩니다. 만약 극락에 대한 믿음이 단단하다면 분명 부처님과의 인연이 돈독한 것입니다.
믿음이 있다면 희망이 없지는 않지만, 여전히 지금 중생은 어려움이 많습니다. 부처님만큼 공덕을 짓기도 어렵고, 부처님을 직접 뵐 수 없는 세상에 태어났기에 부처님께 직접 공양 올리는 최고의 공덕을 지을 수 없습니다. 따라서 극락에 왕생하여 아미타불을 친견하고, 법문까지 직접 들으면서 또 타방 부처님께 공양을 올리는 보살들이 그저 부러울 뿐입니다. 그래서 세친은 ‘원생게’를 통해 “아미타불 덕분에 공덕의 바다가 가득 찬다”고 노래했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낙담만 할 수는 없습니다. 지금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을 찾아야 합니다. 그래서 용수는 부처님의 명호를 부를 것을 권한 것 같습니다. 현재 우리에게 주어진 최고의 불공은 아미타불의 덕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명호를 부르는 일일 것입니다. 오늘의 불공을 올립니다. 나무아미타불.
미탄 스님 mitankha@gmail.com
[1768호 / 2025년 3월 12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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