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법화경’은 천태종의 소의 경전입니다. 물론 어떤 경전이든 소중하지 않은 경전은 없습니다.
그래서 부처님 말씀을 ‘금구성언(金口聖言)’이라고 합니다. 금은 변하지 않습니다. 중생의 말은 오늘은 참이라도 내일은 거짓일 수 있습니다. 진리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옳다고 얘기했던 부분이 달라질 수도 있고 거짓이 될 수도 있습니다.
좋은 일을 하려고 한 일이 나중에 나쁜 결과로 나타난 경험이 있을 것입니다. 별로 도우려고 생각하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결과가 좋게 나타나는 경우도 있습니다. ‘소가 뒷걸음질하다 쥐 잡는다’는 것처럼 말입니다. 이것이 중생이 사는 삶입니다. 그래서 가끔은 아전인수를 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나는 도우려고 하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내가 행한 부분이 좋은 결과가 나타나면 공덕을 지었다고 생각합니다. 내가 누구를 돕겠다고 생각해서 한 일이 아닙니다. 그냥 우연히 했을 뿐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그 부분을 가지고 공덕을 지었다는 생각을 하면 안 됩니다. 공덕이 아닙니다. 그건 그 사람의 복일 뿐이에요. 그런데 오늘날 우리는 내가 엄청난 것을 베풀어서 그가 잘 된 것처럼 착각합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좋은 마음으로 행해야 공덕이 될 수 있습니다. 결과가 마음과 달리 나오더라도 그것은 공덕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행동도 중요하지만 어떤 마음으로 행하느냐가 참 중요하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가 ‘법화경’을 시작한다고 하니까 다들 걱정을 합니다. 등록하긴 하는데 내가 끝까지 갈 수 있을까 걱정이시죠? 어떤 사람이 봄에 씨앗을 뿌려놓고 결과를 걱정하는 거랑 똑같습니다. 어쨌든 봄에 씨앗을 뿌려야만 가을에 결실이 가능하듯 여러분들은 시작을 두렵게 생각하지 마시고 최선을 다하는 여러분들이 되어 주시기 바랍니다.
그럼 왜 우리는 ‘법화경’을 공부해야 할까? 왜 천태종은 소의경전을 ‘법화경’으로 했을까요? 우리가 추구하고 있는 수행, 부처님의 가르침을 실행하는 부분의 방법, 그런 모든 근본정신이 ‘법화경’에 있기 때문입니다.
부처님의 8만4천의 가르침, 즉 49년의 긴 세월의 가르침을 가장 완벽하게 정리하신 분이 바로 천태종의 종조라고 얘기할 수 있는 지자대사입니다. 지자대사께서 머물던 공간이 바로 중국의 천태산이었습니다. 지금도 천태산에는 국청사라고 하는 지자대사에 의해서 만들어진 절이 있고 지자대사가 수행하셨던 터가 남아 있습니다. 지자대사께서 그곳에서 가르침을 펴시고 ‘법화경’을 집대성하셨습니다.
그런 지자대사는 왜 동토가문의 석가 재현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는 걸까요. 부처님의 가르침은 49년 동안 8만4000가지의 설법이 있었기 때문에 내가 본 경전이 최고라고 다투는 경우들이 가끔 생겼어요. 그것은 우리나라도 마찬가지였고 중국에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절에서 제일 먼저 감동을 준 스님이 최고라고 생각하듯이 먼저 감동한 경전이 제일이라고 서로 다퉈요. 그렇다면 왜 다툴까요? ‘내가 옳고 너는 틀렸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이 너무 방대하다 보니까 내가 접한 경전이 최고라고 주장하는 경우들이 너무 많았어요. 그런데 문제는 처음부터 끝까지 부처님의 가르침을 완벽하게 이해하신 분이 별로 없어 혼란이 더욱 가중됐습니다.
그렇지만 지자대사께서는 부처님의 일대기를 완벽하게 이해를 하셨기 때문에 부처님이 설법 내용을 잘 정리하셨습니다. 지자대사께서 모든 경전의 시기에 따라 정리를 하셨는데 그것을 오시팔교(五時八敎)라 합니다. 다섯 가지 시기에 따라 여덟 가지 가르침으로 분류했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오시(五時)는 무엇일까요.
첫째가 화엄시(華嚴時)고, 둘째가 아함시(阿含時), 셋째가 방등시(方等時), 넷째가 반야시(般若時), 다섯째가 법화열반시(法華涅槃時)입니다. 조금 어려워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렇지만 너무 그렇게 신경 쓸 것 없어요. 그냥 아주 편안하게 들으시기만 하면 됩니다. 5시8교(五時八敎)를 통해 다섯 가지 장르로 부처님의 가르침을 정리하셨는데 첫째가 화엄시(華嚴時)라고 했습니다. 그럼 화엄시라고 하는 건 뭘 이야기를 하는 걸까요. 대방광불화엄경(大方廣佛華嚴經)을 말합니다. 여러분도 잘 알고 있는 ‘화엄경(華嚴經)’을 말하는데, 그 화엄경을 설한 시기를 화엄시라고 하는 겁니다.
그럼 화엄시의 때가 언제일까요.
부처님께서 출가를 하시고 6년을 수행하셨습니다. 그런데 6년 동안 완벽하게 도를 닦은 것은 아닙니다. 6년이라고 하는 시간 동안 부처님은 다양한 걸 경험하셨습니다. 많은 스승도 만났고 여러 가르침을 실행했습니다. 그중에 마지막에 하셨던 부분이 고행 수행입니다.
인간이 감내할 수 있는 고통의 한계는 어디일까요. 부처님께서는 밥도 굶어보고 가시방석에 앉아도 보고 온갖 고통을 다 감내하면서 당신을 극한으로 몰아붙였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육신에 고통을 줘도 깨달음하고는 거리가 멀었어요. 목욕도 하지 않고 손톱도 길렀으며, 온갖 고통을 다 겪었습니다. 부처님의 고행상으로 불리는 불상을 보신 기억이 있을 겁니다. 눈은 움푹 파이고 뱃가죽이 등에 붙을 정도로 살이 빠져서 갈비뼈와 핏줄이 밖으로 모두 드러날 정도였습니다. 그때 부처님께서는 다섯 명의 비구와 함께였습니다.
그렇지만 부처님은 고행을 통해 깨달음을 얻을 수 없다는 것을 알고 다섯 명의 비구와 헤어져 다른 길을 찾게 됩니다.
먼저 강에서 목욕합니다. 그리고 수자타라고 하는 여인이 올린 우유죽, 요즘으로 얘기하면 요구르트를 공양받습니다. 그리고 정신을 차립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스님들한테 공양을 가장 많이 올리는 게 뭔 줄 아세요? 우유입니다.
그래서 수자타라고 하는 여인이 부처님께 올린 공양은 무척이나 중요합니다. 이 공양이 부처님께서 깨달음을 얻는 과정에 중요한 역할을 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열반에 드실 때 이 공양에 대해 다시 말씀하십니다. 여러분도 알다시피 부처님께서는 춘다라고 하는 대장장이가 올린 공양을 드시고 병을 얻어 결국 열반에 드셨습니다. 부처님께서 춘다의 공양을 받고 극심한 병고에 처했을 때 많은 사람들이 춘다를 비난했습니다. 그러자 부처님께서는 수자타의 공양을 받고 깨달음을 얻었듯이 춘다의 공양을 받고 열반에 들었으니 최고의 공양이라고 칭찬을 하신 겁니다. 이걸 보면 부처님께서는 참 대단한 분입니다. 깨달음을 얻기 위해서 힘을 얻었던 그 우유죽도 큰 공양으로 인식이 되지만 춘다의 공양으로 인해 열반에 드셨는데 그 공양이 최고의 공양이라고 칭찬을 아끼지 않으셨다는 점이 놀랍습니다.
여러분이 같은 상황이었으면 어땠을 것 같습니까? 누군가가 좋은 것을 주었다고 해서 받았는데 그걸 먹고 내가 죽는다면 그 사람이 좋은 사람으로 느껴질까요? 그런데 부처님은 춘다가 올린 공양이 최고의 공양이라고 하신 겁니다. 사실 부처님은 춘다의 공양 때문에 돌아가신 게 아닙니다. 모든 것이 때가 돼서 돌아가신 것입니다. 이를 너무나 잘 알고 있기에 부처님께서는 그리 말씀하신 것입니다.
진리는 오는 것도 진리지만 가는 것도 진리입니다. 부처님은 진리를 거스르지 않은 분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들이 원하는 진리는 어떤 것일까요. 나에게 손해가 되는 것이 진리가 될 수 있을까요? 우리는 손해가 되는 것은 진리라고 쉽게 인정하지 않으려 합니다. 생로병사(生老病死)의 모든 부분이 다 괴로움의 요소인데 우리는 이 부분을 피해 가려고 합니다.
그런데 그것을 비켜 갈 수 있을까요. 좋은 것도 진리고 나쁜 것도 진리라는 점을 꼭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좋은 것이 있으면 나쁜 것이 반대급부로 생기기 마련입니다.
음(陰)과 양(陽)입니다. 만나면 좋은 거지만 헤어지면 슬픈 거잖아요. 그렇지만 만나기만 하고 헤어지지 않으면 어떻게 될까요? 또 만남만 있고 헤어짐이 없으면 어떻게 될까요?
헤어짐이 우리에게 감정적으로는 슬플 수 있으나, 헤어지는 부분도 진리인 것입니다. 이 세상 모든 부분은 그렇게 존재하게 돼 있어요.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수자타와 춘다의 두 가지 공양이 모두 소중하다고 말씀하신 겁니다.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서 부처님께서 수자타라는 여인이 올린 우유죽을 먹고 목욕을 하고 정신을 차려서 다시 보리수나무 아래에 앉아서 7일을 명상에 들어서 깨달음을 얻으셨습니다. 그리고 성도 후 첫 번째로 21일간 진리 속에서 설하신 법문이 바로 ‘화엄경’이고 이때를 화엄시라 하는 것입니다.
정리=류현석 대구·경북지사장
이 법문은 2025년 3월 12일 대구 대성사 법화경 해설 법회 입재식에서 월도 스님이 하신 법문을 요약한 게재한 것입니다.
[1769호 / 2025년 3월 19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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