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옥천 봉은사 주지 현진 스님

불교에 대한 믿음을 넘어, 사유하고 실천해야 참된 수행

불교 인명학은 논리적 사유의 틀 제공…경전도 바른 논리 통해 논증해야
수행 중 겪은 극심한 고통, 논리적 사유로 극복한 뒤 감정와해기법 정립
두려움, 공포, 불안의 근본은 감정이며 이를 알고 근원 관하면 절로 소멸 

오늘의 시대를 한마디로 정의하자면, 불안의 시대, 불면의 시대, 불투명의 시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하루가 멀다하고 변하는 기술과 정보에 휘둘리고 있습니다. 블록체인을 시작으로 인공지능, 그중에서도 생성형 AI가 등장하면서 인간의 삶은 실로 예측 불가능한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습니다. 이러한 변화는 단지 산업이나 경제 분야에 국한되지 않습니다. 인간의 사고, 감정, 정체성 자체를 흔들고 있습니다. 불과 70여 년 전 6·25 전쟁의 폐허를 딛고 일어선 우리 사회는 지금 정신적 혼란의 시대를 맞고 있습니다.

이러한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어떤 마음가짐으로 이 세상을 마주해야 할까요. 물질문명은 날로 정밀해지고 있지만, 인간의 내면은 점점 더 텅 비어가고 있습니다. 정신적 피로, 감정적 고립, 관계의 단절, 존재의 불안은 어느 순간 우리의 일상이 돼 버렸습니다. 이러한 시대일수록 밖으로 향한 시선을 내면으로 돌려야 합니다. 자신 안의 혼란과 불안을 직면하고, 내적인 평화와 중심을 회복해야 합니다. 이것이 제가 인명학(因明學)과 감정와해기법을 이야기하려는 이유입니다. 불교는 단순한 믿음의 종교가 아닙니다. 부처님께서 직접 강조하셨듯이, “나의 말조차 그대로 믿지 말고, 의심하고 사유하라”는 가르침은 불교가 ‘사유의 종교’임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부처님의 말씀을 당연한 진리로 받아들이지만, 그 가르침을 의문과 탐구의 정신으로 다시 사유하고, 삶 속에서 실현해야만 진정한 불제자가 될 수 있습니다. 인명학은 바로 이런 올바른 탐구를 이끌어내는 도구입니다. 원인과 결과를 바탕으로 바른 사유를 이끌어내는 불교 논리학이며, 논증학입니다. 우리가 경험하는 괴로움, 번뇌, 의문을 해소하고 깨달음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막연한 명상이나 수행만으로는 부족합니다. 논리적 사유체계를 바탕으로 부처님의 가르침을 자기 삶에 투사하고 검토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인명학은 바로 그런 기능을 수행합니다.

고대 인도의 디그나가는 그 대표적 인물입니다. 그는 극단적인 회의론자이자 허무주의자였습니다. 특정 사상이나 철학에 집착하지 않으려 했던 그는 ‘맛지마 니까야’ 제74경 ‘디그나가경’에서 부처님을 찾아와 대화를 나눈 후, 자신의 견해를 초월하는 깊은 전환을 경험하게 됩니다. 이후 그는 불교 논리학의 체계를 세우게 됐고, 인명학의 시초를 열었습니다. 디그나가의 사상을 이어받은 법칭은 7세기경 나란다 대학에서 논리학과 인식론을 정리하고 체계화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합니다. 법칭은 단순한 이론가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수행자였고, 경험과 사유, 경전과 현실을 연결하는 다리 역할을 했습니다. 이러한 인명학은 이후 티베트, 중국, 일본, 한국 불교에 이르기까지 깊은 영향을 끼쳤고, 우리나라에서는 원효와 의상 같은 대덕들이 이를 바탕으로 철학적 불교를 전개했습니다.

인명학의 중심은 삼지작법(三支作法)입니다. 이는 세 가지 논리적 조건을 갖춘 논증 구조입니다. 첫째는 법유(法有)입니다. 주장하는 명제가 그것을 뒷받침하는 논거와 관련돼야 합니다. 예를 들어 “산에 불이 있다”는 주장은 “연기가 보인다”는 사실로 입증됩니다. 이처럼 논거는 반드시 주장과 직접적으로 연결돼야 합니다.

둘째는 동류동유(同類同有)입니다. 같은 종류의 다른 경우에서도 해당 논리가 성립해야 합니다. 예컨대 “연기가 있는 곳에는 항상 불이 있다. 부엌에서 연기가 나면 불이 있다”는 식의 일반성이 요구됩니다. 셋째는 이류이무(異類異無)입니다. 연기가 없는 곳에는 불도 없다는 조건이 성립돼야 합니다. 예를 들어 호수처럼 연기도 없고 불도 없는 곳이 이에 해당합니다.

삼지작법은 단순한 추론이 아니라, 타당한 논증의 틀입니다. 수행자는 이러한 틀을 통해 경전의 문구나 법문을 들으며 사유하고, 깨달음으로 향하는 길을 점검해 나가야 합니다.

나는 이러한 인명학의 정신을 수행 과정에서 절절히 체험했습니다. 30대 초반, 과도한 수행욕으로 인해 심한 기(氣) 편차를 겪으며 온몸이 불에 타는 듯한 고통을 경험했습니다. 정신적으로는 말할 수 없는 공포와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병원을 찾아도 병명은 없었습니다. 의사들은 “이보다 건강할 수 없다”고 했지만, 나는 고통 속에서 삶의 벼랑 끝에 서 있었습니다. 그때 내 마음속에는 오직 하나의 생각, “이 고통에서 벗어나기만 한다면 깨달음이고 뭐고 다 던져버리겠다”는 체념뿐이었습니다.

온갖 방법을 시도했습니다. 삼천배, 화두, 단전호흡 등 수행의 이름을 가진 모든 시도를 해봤지만 증상은 더욱 악화됐습니다. 고통의 시간은 길고 암담했습니다. 그러던 중 문득 떠오른 장면이 있었습니다. 부처님께서 어린 시절 춘경제에서 작은 생명을 보고 측은히 여긴 그 마음. 그 순간 부처님께서 삼매에 드셨다는 일화가 내 안에서 번개처럼 번쩍였습니다. 목적 없이, 어떤 결과도 바라지 않고 그저 그렇게 해보자고 마음먹었습니다. 그리고 그 길을 걸었더니, 놀랍게도 두려움과 공포가 서서히 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육체적 고통은 여전히 남아 있었지만, 감정의 소용돌이는 진정되기 시작했습니다. 그때 나는 질문했습니다. 왜 두려움, 공포, 불안은 그렇게도 깊고 강력했는가. 사유의 끝에서 발견한 답은 ‘감정’이었습니다. 모든 괴로움의 근원은 욕심도, 시비분별도 아닌 감정이었습니다. 트라우마, 공황장애, 우울, 강박 등은 모두 감정이 만들어낸 또 다른 이름이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감정의 생성과 작용에 대해 집중적으로 사유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과정은 논리적이었습니다. 감정이 어떻게 생성되는가. 어떤 조건에서 강화되고 약화되는가. 스스로 논증하고 추론하며 감정의 메커니즘을 탐구했습니다. 그 흐름이 인명학의 사유 방식과 정확히 일치했습니다. 우리는 흔히 명상을 통해 뇌의 구조가 바뀌고 습관이 변한다고 말합니다. 이는 시냅스의 가소성 때문인데, 이 과정에서도 감정은 핵심적인 역할을 합니다. 기억조차 감정에 의해 강도와 지속성이 달라집니다. 상처받은 기억은 오래가고, 행복한 기억은 희미해집니다. 그것이 생존에 유리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감정에 관한 통찰을 하나의 수행법으로 정리했습니다. 그것이 제가 발견한 ‘감정와해기법’입니다. 감정이 일어날 때 억누르거나 따라가지 않고, 조용히 내면을 멈추고(止), 그 감정을 일으킨 근원을 반조(反照)하여 관(觀)하면 자각(自覺)이 일어나 감정은 자연히 와해됩니다. 이때 마음은 방하착(放下着)돼, 인지의 전환이 일어나고 장애는 해소됩니다. 이 기법을 신도들에게 지도했더니, 공황장애, 불안, 불면 등의 증상이 해소됐습니다. 2015년 세종시 장군면에서 총기사건으로 유가족들이 겪은 트라우마도 이 방식으로 15주 만에 안정됐습니다. 감정은 이성으로는 통제되지 않지만, 관찰과 반조를 통해 본질로 향할 수 있습니다. 마음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그 작용은 느낄 수 있습니다. 오온(五蘊)과 12처(十二處)의 인연 따라 끊임없이 변화하지만, 우리의 모든 고통은 이 마음에서 비롯됩니다. 마음을 이해하려면, 단순한 지식이 아니라 체험이 필요합니다. “마음은 원래 그런 것이다”라는 수용보다는 “정말 그런가?”라는 의문으로 출발해야 합니다.

깨달음은 전해줄 수 없습니다. 스스로 증득해야 합니다. 그 과정에서 인명학의 논리, 감정와해기법 같은 수행도구는 진리를 향한 등불이 돼 줍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법을 등불 삼고, 자신을 등불 삼으라”는 가르침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가 듣는 법문조차 ‘여시아문(如是我聞)’, 즉 “이와 같이 들었다”가 아니라 “내게 이와 같이 들렸다”는 입장에서 접근해야 합니다. 불교의 팔만사천 법문, 인명학, 사마타, 위빠사나, 선, 염불, 간화선 등 모든 수행은 지혜를 얻기 위한 방편입니다. 그러나 그 방편마저도 집착하지 않고 내려놓을 수 있을 때, 진정한 수행자가 됩니다. 오늘 인명학과 감정와해기법을 나눈 이 시간이, 고통의 근원을 마주하고 지혜로 전환하는 실마리가 되기를 바랍니다.

정리=강태희 충청지사장

위 법문은 3월 9일 옥천 봉은사 주지 현진 스님이 봉은사 정기법회에서 강의한 내용을 요약한 것입니다.

[1773호 / 2025년 4월 16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 이 기사를 응원해주세요 : 후원 ARS 060-707-1080, 한 통에 5000원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

하단영역

매체정보

  •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 19 르메이에르 종로타운 A동 1501호
  • 대표전화 : 02-725-7010
  • 팩스 : 02-725-7017
  • 법인명 : ㈜법보신문사
  • 제호 : 법보신문
  • 등록번호 : 서울 다 07229
  • 등록일 : 2005-11-29
  • 발행일 : 2005-11-29
  • 발행인 : 이재형
  • 편집인 : 남수연
  • 청소년보호책임자 : 이재형
법보신문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는 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