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 부처님과 그 국토 중생의 수명은 헤아릴 수 없는 아승지겁이기에 아미타라고 한다. 사리불이여! 아미타불께서는 성불하신 지가 10겁이 되었다.”
‘아미타(amita)’는 ‘헤아릴 수 없다’는 뜻입니다. 극락 정토의 주(主)가 되는 아미타불은 광명과 수명 모두 한량이 없고, 반(伴)이 되는 극락 대중은 수명의 측면에서 ‘아미타’입니다. ‘무량수경’ 제13원은 아미타불의 수명, 제15원은 극락 대중의 수명에 대한 서원입니다. 모든 서원은 이루어져서 10겁이 넘는 극락이 존재하고 있습니다.
수명에 대한 이야기에 위나라 승려 담란(476~542)이 떠오릅니다. 인간의 한 생에서 병듦과 죽음은 큰 고통인데, 담란은 50세 중반에 이 고통에 대한 두려움이 극심하게 찾아옵니다. ‘속고승전’에는 그는 중관(中觀) 사상의 대가(大家)였지만 ‘대집경(大集經)’을 이해하는 데에 어려움을 느꼈습니다. ‘대집경’을 절반 정도 주해했을 때 그는 병에 걸리고 맙니다. 그는 하던 작업을 그만두고 병 치료에 전념했고, 겨우 병이 나아 다시 ‘대집경’을 들려 할 때, 이런 생각을 했다고 합니다.
“인간의 목숨을 위태로운 것이라 영원하지 않다. 이따금 장수하는 신선이 나타나기도 한다는데, 나도 신선이 되어 불교를 숭상하면 좋지 않겠는가.”
그래서 은거 도홍경(隱居 陶弘景) 을 찾아가 ‘선경(仙經)’을 받아 돌아옵니다. 그러다 황제의 명령으로 영묘(靈廟)를 세우러 위나라 경계로 가게 되었기에 그는 그곳에서 ‘선경’을 의지해 수행하려 했습니다. 낙양(洛陽)에 다다랐을 때, 그는 삼장(三藏) 보리류지(菩提留支, 6C초)를 만나게 되었고 이렇게 묻습니다.
“불교에도 오래 살고 죽지 않는 법이 있습니까?” 이런 질문을 하는 담란이 못마땅했는지 보리류지는 땅에 침을 뱉으며 대답합니다. “어디에 오래 사는 법이 있겠는가? 좀 오래 산다고 해도 잠시 죽음을 미룰 뿐이지 결국에는 삼계 중생으로 윤회한다.” 그러면서 담란에게 ‘관무량수경’을 건넵니다. “이를 의지하여 수행하면 생사를 해탈할 수 있다.” 담란은 ‘선경’을 태워버리고 왕생할 때까지 정토불교에 매진합니다.
담란은 중도와 공(空)의 도리를 잘 알았지만, 병에 걸리자 속수무책이었습니다. 그리하여 장로불사(長老不死)에 관심을 가지고, 불교를 숭상하기 위해 도술(道術)을 연마해야겠다고 스스로를 위로합니다. 그러나 보리류지의 대답에서 우리는 한 생을 마무리하고, 다음 생에 우리는 무엇이 될지 장담할 수도 없고, 오래 살아봐야 결국은 윤회를 거듭할 뿐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게다가 다음 생에 어떤 일을 하고자 이생에서 간절히 바란다고 해도 윤회의 굴레 속에서 인연에 따라 원하는 일을 계속할 수 있을지, 없을지 알 수 없습니다. 그래서 이생에 해탈을 이룰 수 있다면 불교도로서는 가장 좋은 결말을 맞이하는 셈입니다. 하지만 쉬운 일이 아닙니다.
이러한 인간의 고뇌와 고통을 아미타불은 극락 국토에서 완전히 해결합니다. 극락 대중의 수명은 무량하고, 극락에서는 반드시 성불을 이룰 수밖에 없으므로 바로 그 생에 윤회를 끊어냅니다. 또한 아미타불의 수명도 그 한계가 없으므로 구제되어야 할 중생이 존재하는 한 이러한 아미타불의 자비는 계속됩니다. 따라서 ‘무량수’라는 이름은 아미타불의 명호이기도 하면서, 극락 중생을 일컫는 말이기도 한 셈입니다. 이생에 반드시 ‘왕상회향(往相迴向)’ 을 이루어야 하는 이유입니다.
나무아미타불
미탄 스님 mitankha@gmail.com
[1785호 / 2025년 7월 16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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