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학교 2학년 때 처음으로 종교를 접했다. 동네 교회에서는 목사님 부부가 아이들을 불러 실내 놀이기구에서 놀게 해주고, 떡볶이도 나눠주며 “언제든지 오라”고 말했다. 친구들과 함께 우리는 자연스레 교회를 자주 드나들었다.
그러던 어느 날, 목사님이 진지한 얼굴로 우리를 지하실로 데려갔다. 복도에 그려진 지옥도를 가리키며 “지금 너희 할머니, 할아버지들은 저기서 불타고 있다”고 말했다. 단지 교회를 다니지 않았다는 이유로 돌아가신 양가 할아버지들이 지옥에 있다는 말에 심사가 몹시 뒤틀렸다. 결국 손에 들고 있던 떡볶이를 내려놓고, 다시는 교회에 가지 않았다.
그러다 먼 곳으로 이사하게 됐다. 그곳에서 우리 가족은 약수터 물을 길어다 마셨는데, 약수터는 한 포교당 안에 있었다. 포교당은 생소했고, 낮은 건물 안에 불상이 보이긴 했지만 절인지 무속인의 공간인지 알 수 없었다. “그냥 떠도 되는 걸까? 허락은 받아야 하나?” 가족끼리 속삭이다가 조용히 물만 받고 빠져나오기로 했다.
은밀히 물을 담아 나오던 중 “저기요~”라는 소리에 놀라 돌아보니, 한 스님이 “들어와서 차 한잔 드시고 가세요”라고 부르셨다. 혼나는 줄 알고 따라갔더니, 스님은 떡과 차를 내주셨다. 그때 마신 차는 내 생애 첫 잎차였고, 그 향은 오래도록 기억에 남았다.
이 인연으로 암도 스님이 계시던 광도사에 자주 드나들게 됐다. 어느 날 법당 책장에서 어린이 불교성전과 만화 경전을 읽다가 문득 바다가 펼쳐지는 듯한 생생한 감각이 느껴졌다. 머릿속에 시원한 바람이 불어왔고, ‘아, 이거구나! 여기가 내 길이구나!’라는 확신이 들었다. 이후 고등학교 시절에는 청견 스님과의 인연으로 절 수행을 꾸준히 이어갔다.
대학원서 접수를 마친 어느 날, 어머니 권유로 불교방송 ‘신행상담’을 진행하던 혜거 스님을 뵙기 위해 아무 약속 없이 금강선원을 찾았다. 종무원들은 놀랐고, 오래 기다려야 한다는 말에 선방 한쪽에 묵묵히 앉아 기다렸다. 마침내 만난 스님은 “참선 공부를 해볼 생각이 있으면 다시 오라”는 말씀만 남긴 채 들어가셨고, 왕복 7시간 여정 끝에 남은 건 그 짧은 말 한마디뿐이었다. 허탈함과 부아가 동시에 치밀었다.
겨울방학이 되자 다시 선원을 찾았다. 그동안의 공부를 말씀드리자 스님은 “참 잘했다. 하지만 진짜 공부는 아직 시작하지 않았다”며 숙제를 내주셨고, 숙제를 풀 때마다 다시 오라고 하셨다. 그렇게 자상한 가르침 속에서 수행을 이어가며 참선의 기틀을 다져갔다.
이후 스님이 인제에 선원을 개원하시면서 나는 대학 졸업 후 1년간 그곳에 머물며 상좌 청운 스님과 함께 수행했다. 하루 6~12시간 좌선을 이어갔지만, 몸을 조복받는 일은 쉽지 않았다. ‘나는 안 되는구나’라며 좌절하던 중, 청운 스님께서 “팔다리가 없어도 참선할 수 있다”고 독려해주셨다. 그 시기 ‘마음자리에 깃발을 꽂았다’는 확신을 얻기도 했다.
하지만 사회생활을 시작하면서 선원과는 점점 멀어졌다. 그러던 중 인제에서 지낼 당시 읽었던 ‘이산 혜연선사 발원문’이 문득 떠올랐고, 그 인연으로 다시 선사들의 글을 찾아 읽기 시작했다. 그러나 한자에 약하고 교학적 배경 지식이 부족해 글을 읽는 데 어려움을 느껴, 조계사 기초교리 야간반을 수료한 뒤 부족함을 채우고자 화계사 불교대학에 등록해 공부를 이어갔다.
화계사에 다니던 중 조계사 근처에 숭산 스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관음선종 서울선원이 있다는 말을 들었다. 어느 추운 겨울날, 무작정 찾아간 선원에선 마침 미국에서 온 숭산 스님의 제자 바바라 선사님이 법문을 하고 있었다.
[1788호 / 2025년 8월 13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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