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회가 끝난 뒤, 숭산 스님의 제자 바바라 선사님과 함께 탄 엘리베이터 안에서 용기 내어 물었다. “무엇이 부처님의 법입니까?” 선사님은 슬며시 웃으며 되물었다. “부처님 법 밖에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순간 큰 충격을 받았다. 금발의 외국인이 주름진 얼굴로 조용히 웃으며, 단번에 한 방 ‘땅!’ 하고 때리는 듯했다. 그런 모습은 처음이었다. 어려운 한자도, 복잡한 교학도 없이 단순하고 명쾌했다. ‘저게 뭐지? 숭산 스님의 제자들은 다들 저런 게 되는 건가? 무섭지만 알아보고 싶다!’는 마음이 강하게 일었다.
그렇게 시작된 공안 인터뷰에서 늘 들었던 말은 “Only don’t know”였다. ‘오직 모를 뿐’의 마음을 잊지 말라는 가르침이었지만, ‘모르는 걸 어떻게 잊고 말고 하나’라는 의문이 들었다. 그때 불현듯, 그간 수행하며 겪은 수많은 시행착오가 떠올랐다.
어릴 적 절에서 ‘애기보살’로 불리며 많은 애정을 받았고, 수행 중 경계체험의 달콤함에 빠져 ‘진리의 그림자를 봤다’고 자만하기도 했다. 그러나 삶에서 역경계를 마주하면 ‘수행이 잘못된 건가’ ‘전생의 악업 때문인가’ ‘결국 세상은 돈이 최고 아닌가’ 하는 생각에 흔들리기 일쑤였다. 결국 ‘초심으로 돌아가자’는 다짐으로 염불하고 절하며, 어린 시절의 수행을 되짚는 일을 반복했다.
그러던 어느 날, 수행이 버겁게 느껴지고 초심으로 돌아가려는 노력조차 지쳐갔다. 마음속에는 답답함과 회의감만 쌓여갔다. ‘아이고 모르겠다! 될 대로 되라지!’ 하고 모든 걸 놓아버리는 순간, 마음 어딘가에서 뭔가가 무너졌다.
자정 무렵, 가로등 하나 없는 어두운 공영주차장. 감정이 폭발해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한참을 헤매던 그때, 갑자기 세상이 ‘툭’ 하고 고요해졌다. 마치 우주의 소리가 꺼진 듯, 나 외엔 아무도 존재하지 않는 정적 속에 혼자 남겨진 듯했다.
그런데 이상했다. 공기는 뜨겁고 바람 한 점 없었지만, 몸은 공기처럼 가볍고, 세상은 맑고 선명했다. 주차장의 콘크리트 바닥, 지나가는 사람들의 발소리, 멀리서 들려오는 오토바이 소음까지 하나하나가 생생하고 또렷했다. 그 안에서 나는 마치 작은 비누방울처럼 떠 있었고, 내 몸에서는 반짝이는 실들이 흘러나와 소중한 인연들과 이어진 듯했다. 그 모든 것이 기쁘고, 낯설도록 평화로웠다.
‘오직 모를 뿐.’ 그 가르침의 등불이 마침내 내게도 밝혀지고 있었다.
그 등불은 내 삶 속에 스며들었다. 마치 빵 사이에 따뜻하게 녹아든 치즈처럼, 그동안 해왔던 수행들 사이의 간격을 하나로 이어줬다. 각각의 수행이 따로 놀던 것이 아니라, 모든 과정이 온전히 한 덩어리로 정리되며 내 안에 안정된 느낌으로 자리 잡았다.
이 변화는 내가 영어 과외를 하던 아이들을 대하는 태도에도 스며들었다. 예전에는 성적 향상이 목표였다면, 이제는 아이들의 마음에 진심으로 다가가게 됐다. 그러다 보니 고민 상담이 많아졌고, 아이들은 학교폭력이나 숨겨둔 상처를 털어놓기 시작했다. 그 마음을 함께하다 보면 자존감을 회복하고 스스로 해낼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지며, 실제로 결과도 좋아졌다. 작은 인연이라도 누군가를 돕는다면 그것이 부처님 은혜에 보답하는 길이라 여기게 됐다.
아직도 내 수행은 여전히 위태롭게 이어지고 있지만, 이제는 넘어졌다고 해서 굳이 처음으로 돌아가려 애쓰지 않는다. 왜냐하면, 넘어진 그 자리에 이미 ‘이곳이 네가 넘어진 곳이다’라는 등불이 켜져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애써 다시 시작점으로 돌아가려 해도, 이제는 그리로 돌아갈 수도 없다. 그럴 필요가 없다는 걸, 그 등불이 조용하고 따뜻하게 일러주고 있다.
[1790호 / 2025년 8월 27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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