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말을 들은 중생은 응당 원(願)을 일으켜서 극락에 왕생하기를 바라게 된다. 왜냐하면, 훌륭한 사람들이 모두 한 곳에 모였기 때문이다.”
여기서 ‘이 말’은 극락 중생들이 ‘아비발치’이자 ‘일생보처’라는 사실을 말합니다. 세친의 ‘정토론’에는 극락 보살 대중의 공덕을 네 가지로 서술합니다. 첫째, 보살의 신체가 갖가지 응화신으로 나투어 불사(佛事)를 짓는 것이며 둘째, 그 응화신이 대광명을 놓아 중생을 교화해 모든 고통을 사라지게 하며, 셋째, 그 광명이 부처님과 대중을 남김없이 비추고, 모든 여래께 공양·찬탄하는 것이며, 넷째는 불법승이 없는 곳에 머무르며 그곳 중생들에게 진실한 수행을 이해시키는 것입니다.
‘아비발치’나 ‘일생보처’는 수행의 측면에서 우수한 것이고, 세친이 설명하는 보살공덕은 그 행이 우수함을 말합니다. ‘아미타경’의 맥락에서는 수행적 측면에서 ‘상선인(上善人)’을 말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으나, 세친이 ‘무량수경’에서 읽어낸 극락 대중의 공덕 또한 간과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왕생하여 함께 살게 될 대중들이 훌륭하다는 사실을 듣게 된다면 극락왕생의 원이 생기는 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기 때문입니다.
‘무량수경’에서 법장보살은 51번째 서원으로 ‘아미타불’이라는 이름을 어디서든 들을 수 있도록 하겠다고 했습니다. 정토신자라 할지라도 중생의 힘으로 염불을 한다던가, 나의 인연으로 아미타불의 이름을 들었다고 생각하시는 분이 계실 것입니다. 그러나 51번째 서원에서 우리는 ‘아미타불’의 인연으로 정토 법문을 듣게 되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함께 하는 대중이 훌륭하다는 것을 알고 나면 자신도 모르게 그곳에 가고 싶어져서 왕생원(往生願)을 일으키지 않는 사람은 없게 된다는 말입니다. 세친의 네 번째 해석에서 알 수 있듯이 응화신으로 나타나 중생이 바른 수행을 하도록 한다고 했으므로, 정토문(淨土門)에 든 수행자는 멈추지 않고 아미타불의 세계로 나아가게 됩니다.
예전에 어떤 분이 “극락과 지옥에 있다면, 극락에 태어나고 싶지 않다. 왜냐하면 세상이 평화롭기만 하면 심심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지옥에 태어나 다양한 일을 겪고 싶다”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언뜻 들으면 그럴듯하지만, 불교의 업사상에서 보면 찬성하기 어렵습니다. 사람의 경험은 곧 ‘업’이자 ‘습관’이 되는데, 지옥의 고통은 도저히 제어하기 힘들어서 윤회의 바퀴에서 벗어나기 힘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극락에 삼악도가 없는 이유도 작은 나쁨이라도 인연에 따라 커지면 좋은 것을 모두 굴복시킬 수 있기에 모든 중생을 고통에서 벗어나게 하려는 아미타불의 서원과는 맞지 않습니다. 싯다르타의 경우에도 마라의 유혹이 얼마나 끈질겼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마라는 싯다르타가 성불하고 나면 자신의 성이 무너질까 노심초사하면서 성불 전에는 수행을 말리고, 성불 후에는 전법하지 말고 무여열반에 들라고 유혹합니다. 생각해 보면, 현재의 중생은 삼악도가 존재하는 삼계에 속해 있기에 끊임없이 다른 세력의 유혹도 받고 있는 셈입니다.
아미타불의 극락은 그 어떤 유혹도 없는 삼계를 초월한 곳입니다. 삼계를 초월했기에 욕망과 그에 따른 집착이 없으므로, 극락의 즐거움 또한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뿐 더 큰 즐거움을 위해 욕심을 부리는 법이 없습니다. 극락의 모든 의보가 참지 않고 토해내는 법문을 듣고, 불·보살님의 광명과 서원 그리고 가피 속에서 깨달음의 궤도를 착실히 따라가게 됩니다. 원왕생! 나무아미타불
미탄 스님 mitankha@gmail.com
[1793호 / 2025년 9월 17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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