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⑨ 타이 에라완사원

기자명 법보신문

타이불교의 기복신앙과 정부 관광정책의 野合

<사진설명>에라완사원에서 '람께본'을 추고있는 무용수들. 신을 기쁘게 한다는 춤으로 알려진 람께본도 에라완사원의 명물 가운데 하나다.

‘세계 최고’ ‘세계 최초’ ‘세계 최대’ ‘세계 최장’….
아마도, 이런 세계적인 기록들에 목매달기로는 한국과 타이가 세계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워하지 않을까 싶다. 뭐든 세계에서 1등을 하겠다는 데 굳이 나무랄 것도 없지만, 그 내용들을 살펴보면 그다지 찬양·고무할 만한 일이 아니라는 게 문제다.

예컨대, 자유나 인권 같은 기본적인 의식이라든지 문학이니 예술 같은 문화적인 것이라든지, 이도 저도 아니면 적어도 경제투명성 같은 것에서 1등을 다툰다면 얼마나 좋으리오만, 실상은 늘 ‘세계최대 에어로빅’ ‘세계최장 국수’ ‘세계최초 VIP카드’ 같이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이상한 쪽이었으니 말이다.

아무튼, 방콕을 말하려다 보니 서론이 너무 길어졌는데, 연간 1천만명 외국인들이 찾아드는 우리들의 방콕은 굳이 내세우지 않더라도 ‘세계적인’ 것들이 즐비하다. ‘부패’ ‘교통체증’ ‘환경오염’ 같은 것들은 감추고 싶어도 이미 ‘세계 최고’로 정평이 나 있다.

그 방콕에서도 또 차가 막히고 숨이 막히기로 유명한 에라완호텔 쪽을 오늘 이야기꺼리로 삼아보자. 사실은 호텔이 아니라, 그 호텔 앞에 서 있는 에라완사원(Erawan Shrine)을.

7천만 인구 가운데 95%가 불교도로 알려져 온 ‘세계최대 불교국가’인 타이를 찾는 외국인들은 내남없이 그 에라완사원 앞에서 고개를 갸우뚱거리곤 한다. 속살을 들여다보지 못한 이방인들은 그럴 법도 한 게, 그 불교도 시민들이 힌두교 최고 신인 브라마(Brahma)를 모셔 놓은 에라완사원을 지나면서 저마다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기도를 올리니 말이다.

차안에 앉은 이들도 또 길을 걷는 이들도 저마다 합장한 채 지긋이 눈을 감고 마음을 모아 기도를 올리는 풍경을 보고 있노라면 “비록 불교와 힌두교가 가깝다고는 하지만 세월이 흐르는 동안 그 ‘형식’에서 큰 차이가 나버렸는데…?”같은 의문이 절로 든다.

어쨋든, 좋다. 서로 다른 종교(형식)를 존중하고, 내 몸에 흐르는 신과는 또 다른 신을 상대로 기도를 올린다는 건 나무랄 바 없이 좋다. 비록 이걸 놓고 무슨 ‘종교적 관용’이라거나 ‘종교적 통합’ 같은 거창한 의미를 갖다 붙이기에는 무리가 따르지만.

<사진설명>에라완사원에서 기도를 올리는 타이 불자들. 신을 위한 기도인가 아니면 사람을 위한 기도인가?

그렇다면, 왜 타이 불교시민들은 이 에라완사원에 기도를 올릴까?
그 대답을 위해서는 에라완사원이 태어난 배경을 살펴볼 필요가 있겠다.

이 에라완사원은 60년 전쯤인 1956년 태어났다. 그 무렵, 짓고 있던 에라완호텔에 마가 끼었는지, 건축용 대리석을 싣고 오던 배가 가라앉아 사람도 죽고…. 뭐, 그런 식으로 공사가 순조롭지 않았다고 한다. 흉흉한 소문이 돌자 인부들도 모두 빠져나가 버렸고.

그러자, 한 힌두교 점성술사가 “‘브라마’를 호텔 앞에 앉히면 모든 재앙이 사라질 것이다”는 해결책을 내놓았고, 사정이 급해진 호텔측은 앞뒤 가릴 것도 없이 그 말에 따라 에라완사원을 지었다고 한다. 점괘가 맞았는지 어땠는지, 아무튼 그로부터 짧은 기간에 탈없이 공사가 끝났고 에라완호텔은 잘 나가가기 시작했다. 경찰청과 마주보고 있는 이 에라완호텔은 애초 국제경찰(Interpol) 관계자들을 주고객으로 삼았으나, 에라완사원이 용하다는 소문이 돌자 총리였던 사릿 장군(Marshal Sarit)이 ‘관광용’ 도구로 내걸었다. 그 뒤 타이관광청과 재무부가 출자해 이 에라완호텔을 사들이면서부터 관광명소로 자리잡게 되었다.

말하자면, 에라완사원은 타이불교가 신명을 바쳐 온 ‘기복신앙’과 타이정부가 정력을 바쳐 온 ‘관광정책’이 한데 어울려 오늘날 명소가 된 셈이다. 그러다 보니, 타이 시민들뿐만 아니라 타이완이나 한국에서 온 불교도 관광객들에게도 빼 놓을 수 없는 곳이 되었다.

<사진설명>에라완사원에 모셔진 힌두신 '브라마'. 오늘날 에라완사원과 같은 형식은 아니지만 브라마에 대한 경배가 타이에 전래된 건 이미 2세기 경부터라고 알려져 있다.

그리하여, 용하다고 소문난 브라마를 모신 사원은 넘치고 넘쳐 이제 에라완뿐만 아니라, 방콕의 백화점 같은 대형빌딩들 앞이라면 어렵잖게 볼 수 있게 되었다. 이렇게, 전통적으로 힌두교를 모셔온 인디아와 네팔에서만 볼 수 있던 브라마를 타이에서 만나게 되는 과정은 ‘복’을 비는 이들의 마음을 꿰뚫고 들어간 ‘용하다는’ 소문과 ‘돈만 된다면’을 내세운 관광정책이 크게 작용한 셈이다. 과연, 타이불교가 ‘세계최대 기복신앙’이며 타이정부가 ‘세계최대 관광국’임을 에라완사원은 가뿐하게 증명했다.

그 ‘세계적’이라는 말에 질려 타이불교를 조금 비아냥거린 기분이 드는데, 사실은 그런 게 아니고 이쯤에서 ‘기복신앙’에 대한 의문들이 생겨난다는 뜻이다. 불교뿐만 아니라 모든 기성종교들이 ‘기복신앙’을 놓고 가타부타 논란을 겪고 있지만, 실제로 절에 가서 부처님을 향해 복을 비는 행위는 타이나 한국이나 별로 다를 바가 없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타이불교 일반은 기복신앙을 삿된 일로 여기지 않는다. 타이 사찰들은 ‘복채’를 받아 운영한다는 말이 나돌 만큼 ‘복’과 인연이 깊다. 그 ‘복’을 팔려다 보니 승려들이 하늘을 나는 ‘요술’을 부리기도 하고 또 총 맞아도 죽지 않는 ‘기적’을 일으키는 팔자가 되면서 여러 가지 부작용이 있는 것도 사실이지만.

그럼에도, 제 몸을 향해 ‘보다 나은 무엇인가를 희구한다’는 사람의 본능을 제쳐 두고는 종교 자체가 근본적으로 성립될 수 없다고 본다면, ‘복’을 빌어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복을 중간에서 가로챈 ‘종교’가 문제였는지도 모르겠다. 아니면, 많이 깨친 이들이 그 본능적인 행위를 ‘기복신앙’이라 이름 붙여 마구 때리며 일반인들에게 종교를 범접할 수 없는 영역으로 만들어 지배도구로 사용해 왔는지도 모르겠고.

모두 아니라고? 그러면, 종교는 너무 어렵다! 동네사람들에게는, 된장과 김치가 함께 가야 제 맛이 나듯, 신과 사람도 함께 가야 살맛이 나지 않을까 싶다.
복을 빌던 어찌 되었건, 그로부터 에라완사원은 발디딜 틈도 없이 붐비게 되었고, 기도자들이 향을 사고 나무코끼를 사고 해서 바친 돈은 다시 의료재단이나 자선단체로 되돌아가 비교적 질좋은 자본순환에 기여해 왔다.

하니, 에라완사원 쪽으로 행여 갈 길이 있는 독자들이라면, 내 신 남의 신 가릴
것 없이 기도해서 좋고 복 받아서 좋고 또 한 푼 보태서 좋은 일이라 여기고 잠깐 들러보기를 권한다. 그래도 만약 종교적인 거부감이 있는 독자라면 참고로 몇마디 덧붙이니 마음 편히 가지시길.

“에라완은 단순히 복을 빌면서 생겨난 ‘유행’에 가깝다. 기복이니 어쩌니 종교적 의미로 따질 것도 없다.”

암폰 스님 말마따나, 대다수 전문가들은 타이 사람들이 무엇엔가 대고 복을 비는 행위가 종교와 무관한 일상적인 ‘습성’ 같은 것이라 풀이하고들 있다.

실제로, 에라완사원에서 브라마를 향한 타이 사람들 기도가 결코 신을 향한 ‘종교의식’으로까지 발전했다고 말하기는 힘들다. 예컨대, 타이 사람들이 에라완사원에 재물로 바치는 나무코끼리는 인디아 남부 케랄라(Kerala) 전통일 뿐, 타이불교에서는 그 전형을 찾아볼 수 없는 그저 새로운 현상인 것처럼.

참, 에라완사원에는 볼거리가 하나 더 있다. 아리따운 아가씨들이 신을 즐겁게 해 신통력을 높여준다며 ‘람께본’이라는 춤판을 벌이고 있으니 함께 어울려 봄직도.

한겨레21 아시아네트워크 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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