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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 숭산행원이 미국 재소자에게

기자명 법보신문

禪은 현재를 가장 잘 사는 방법

편지에 당신의 주변이 시끄러워서 명상을 하는데 지장이 있다고 했습니다. 당신의 마음이 산란하면 산꼭대기에 가더라도 시끄러울 것입니다. 반대로 마음이 산란하지 않다면 시끄러운 공장 한가운데 있더라도 매우 고요할 것입니다. 의문과 분별하는 마음을 내려놓으세요. 그러면 온 우주가 아주 조용해집니다.
교도소에 있는 것은 때로는 매우 힘이 듭니다. 하지만 당신의 견해, 당신의 상태 그리고 당신의 상황을 사라지게 하면, 어떠한 어려운 여건이라도 OK입니다. 물론 시끄러움도 더 이상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당신의 마음이 움직이지 않기 때문이지요.
그렇기에 당신은 무엇을 하든 ‘그것’만을 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선(禪)입니다. 오직 모를 뿐인 마음으로 곧바로 나아가 허공처럼 맑은 마음을 지키고 ‘나-나의-나를’이라는 마음을 없애고 깨달음을 얻어, 일체중생을 고통에서 제도해 주시길 빌어 마지않습니다.


1978년 6월 8일 미국 조지아주 애틀랜타에서 수감생활을 하던 로버트는 숭산행원(崇山行願, 1927~2004)에게 편지를 쓰기로 마음을 먹었다. 국가권력, 인종주의, 전쟁, 반물질문명이나 국가제도에 저항하던 로버트. 전통 종교보다 동양사상에 더 깊은 관심이 있었고 오랫동안 명상 수행을 해오던 그가 숭산의 제자라는 이가 참선을 권유할 때조차 동양의 한 키 작은 노인이 자신의 삶을 송두리째 바꾸어줄 스승이 되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이름도 전혀 들어본 적이 없는 생소한 나라 한국, 그리고 그곳에서 수행했다는 동양인 선사. 그러나 로버트는 세계 4대 생불(生佛)의 한 분이라는 숭산에 대해 관심을 가지면 가질수록 놀라웠다. 자손이 귀한 가문의 4대 독자로 스물한 살에 출가해 불과 2년 만에 스승 고봉을 비롯해 그 나라의 기라성 같은 선지식으로부터 인가를 받았다는 얘기도 들었다. 그러나 로버트는 숭산의 깨달음 자체보다 그의 초인적인 정진에 흥미가 있었다. 이성이나 출세에 관심을 가질 젊은 나이에 잠도 거의 안자가며 솔가루로 연명하고 겨울이면 얼음물에 몸을 담그며 정진했다는 숭산. 그리하여 스물 둘의 나이에 주력과 참선으로 최고의 경지에 올랐다고 했다. 무엇이 그로 하여금 목숨을 건 수행에 매진토록 했으며 그렇게 얻은 결과는 무엇일까?

로버트는 하버드나 예일대학의 젊은이들, 변호사, 증권회사 중역 등 소위 지식인 계층이 그의 제자가 되는 것을 보면 숭산이 보통 사람이 아닌 것만은 확실하다고 여겼다. 특히 최근 출간돼 미국 내 베스트셀러가 되고 있는 숭산의 『부처님께 재를 털면』을 꼼꼼히 읽으며 선(禪)은 인간에게 궁극적인 자유를 줄 수 있을 거란 확신이 들었다.

저항과 그에 따른 수감생활의 반복. 로버트는 이게 최선은 아닐 듯싶었다. 스승이 필요했다. 삶을 이끌어줄 참다운 스승이…. 로버트는 스즈키 다이세츠의 글을 읽으면서도 풀리지 않았던 궁금증들을 숭산에게 직접 물어보기로 결심한 것이다.

‘지금까지 선이나 명상에 대한 책을 많이 읽어보았습니다. 어떤 때에는 깨달음을 이룬 것 같은 생각이 들기도 하고 어떤 때에는 그것을 잃어버리고 옛날의 나로 추락하여 되돌아 가버린 것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왜 저는 제가 선을 수행하면서 얻었던 것을 지켜나갈 수 없을까요?’

며칠 뒤 숭산으로부터 답변이 왔다. 전치사는 다 빼고 단어만 나열한 듯한 어색한 영어. 로버트는 그런 영어를 어디에서도 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그의 답변은 놀라웠다. 자신도 일제에 맞서 독립운동을 하다가 붙잡혀 옥중생활을 했고 그 경험이 지금의 선사로 만들었는지 모른다는 말로 서두를 꺼낸 그는 ‘선의 방향이 올바르지 않다면 어떤 책도 도움이 될 수 없으니 당장 덮으라’고 잘라 말했다. 그러면서 숭산이 오히려 자신에게 묻고 있었다. 그대가 누군지? 어디서 왔는지? 죽어서 어디로 가는지? 로버트라는 이름, 서른다섯 살이라는 사회적인 약속과 통념을 넘어선 그 무엇에 대해 물어오고 있었다. 누구보다 자신에 대해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해왔건만 로버트는 숭산의 질문에 자아에 대한 관념들이 한꺼번에 무너지는 듯 했다. 정말 나는 누굴까? 로버트는 깊이 생각하면 할수록 전혀 알 수 없는 미궁으로 빠져들었다.

로버트는 당혹스러웠다. 그러면서 신기하게도 가슴 깊이 맺어있던 그 무언가가 풀리는 듯했다. 로버트는 다시 편지를 썼다. 어떻게 해야 궁극적인 경지에 이를 수 있는지, 또 참선에만 집중하고 싶은데 교도소가 굉장히 시끄러워 집중이 쉽지 않다는 현실적인 어려움도 토로했다. 며칠 뒤 숭산으로부터 또 한 장의 답장이 왔다. 그는 참선이란 특별한 것이 아니라 바로 지금 이 순간에 나 자신을 완벽하게 이해하는 일이라고 했다. 생각할 때는 생각할 뿐, 들을 때는 들을 뿐, 볼 때는 볼 뿐 그게 전부라고 했다. 또 이 공간, 이 시간에서 벗어나 다른 곳에서 뭔가를 찾으려 한다면 그것은 영원히 불가능할 거라고 했다.

로버트는 비로소 이해할 수 있었다. 선은 현재를 가장 잘 사는 방법이었던 것이다. 로버트는 ‘오직 모를 뿐’으로 마음으로 현재를 살고자 했다. 숭산이 얘기했던 것처럼 선이 깊어감에 따라 번뇌도 망상도 잦아들고 고요만이 그를 휩싸고 있었고, 세상의 어떤 감옥도 더 이상 그의 자유로움을 구속할 수는 없었다.

시간이 흘러 선을 배우는 입장에서 지도하는 입장에 서게 된 로버트. 그는 선의 입문하는 초심자들에게 자주 던지는 질문이 있다. 그 옛날 스승이 편지에서 물어왔던 것처럼….

“이빨로 나뭇가지를 물고 매달려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손으로 나뭇가지를 잡을 수도 없고 발이 나무에 닿지도 않습니다. 그는 꽁꽁 묶여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때 나무 밑에 있는 사람이 물었습니다. ‘달마가 서쪽에서 온 뜻이 무엇인가?’ 라고. 만약 대답하지 않으면 회피하는 게 돼 죽임을 당할 것이고, 대답한다면 나무에서 떨어져 목숨을 잃게 될 것이다. 자 이와 같을 때 당신은 어떻게 살아날 것인가?”

이재형 기자 mitra@beopbo.com


*이 편지는 현각 스님과 무산본각 스님이 번역한 『오직 모를 뿐-숭산대선사의 서한 가르침』(2000, 물병자리)에 실려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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