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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스님들의 편지52 춘성이 경봉에게

기자명 법보신문

돌멩이만 좇는 개가 되지 않기를

만해의 유일한 상좌 춘성이
경봉의 만해 행장 부탁에
‘한로축괴’ 경계 지적


애국자의 역사와 비석은 나라를 위하고 우리들을 위하여 서대문 감옥에서 삼년간을 계실 때에 귀가 얼어 빠지고 발가락이 얼어 빠진 것, 이것이 한용운 선생의 비석이요 역사입니다.

삼월 일일을 당하면 독립기념식을 행할 때에 한용운, 백용성 그 두 분의 이름을 낭독할 때에 그 두 분 참석한 것이 불교의 광명이요, 불교의 서광이라고 생각하는 바입니다. 이것이 천지에 찬 비석이요, 천지를 울리는 땡땡 소리가 나는 비석이요 역사입니다.

비석을 하시고 역사를 모집한다는 것이 한용운선생을 위해서 좋은 예찬이오나 ‘한로축괴(韓獹逐塊)’라고 생각하는 바입니다. 그러하오나 선생을 위해서 기금을 그와 같이 모집하셨다고 하오니 너무나 감축하고 감사하옵니다.
춘성은 소위 상좌라고 하면서 이러하오니 그 부끄러움을 어찌 하오리까.


해방이 된지 몇 해 뒤 춘성(春城, 1891~1977)은 통도사 경봉(鏡峰, 1892~1982)에게 답장을 쓰기 위해 붓을 들었다. 만해 한용운(萬海龍雲, 1879~1944)의 기념비건립추진위원으로 있던 통도사 경봉이 만해의 행장을 물어왔기 때문이다. 경봉이 만해의 열반을 안타까워한다는 것을 춘성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경봉은 1910년대 통도사 강원에서 만해로부터 『화엄경』을 배웠고 그 후에도 만해와 곧잘 편지를 주고받으며 법거량을 펼쳤다. 또 그 인연으로 법랍과 연배가 비슷한 춘성 자신과도 법거량을 나누기도 했는데, 한 번은 춘성이 경봉에게 ‘어떤 것이 부처님의 사리인가’를 물었을 때 경봉은 ‘한양에는 곡식이 귀하다’는 답장을 보내왔던 일을 잊을 수 없었다. 가뭄과 수탈로 굶주려 있는 사람들에게는 곡식이 사리처럼 귀중하다는 게 경봉의 말이었다.

춘성은 만해를 떠올렸다. 그토록 소망하던 해방을 겨우 한 해 남겨놓고 홀연히 떠나간 스승. ‘돌장승이 아이를 낳는다’는 격외의 도리를 깨치고 무애자재의 삶을 살아가는 춘성이었건만 스승 만해를 떠올릴 때면 가슴 한켠이 아려왔다. 온몸으로 시대를 끌어안고 고뇌하며, 끝이 보이지 않는 역사의 내리막길에서 홀로 매운 향내 뿜어내던 고고한 풍란과도 같았던 사람. 과로와 영양실조로 죽어갔음에도 단 한 순간도 불의와 타협하지 않았던 지사. 어쩌면 스승 만해는 중생에게 새벽을 알리는 보살로서, 고통 받는 이 땅의 민중들을 피안으로 실어 나르고자 했던 나룻배였는지 모른다고 춘성은 생각했다.

춘성이 만해를 처음 만난 것은 1904년 늦가을이었다. 강원도 설악산 설악동에서 태어나 11살에 스스로 출가의 뜻을 세운 춘성이 입산한 지 두해 째 되던 해였다. 설악의 푸른 산빛이 짙게 물들어갈 무렵 만해는 걸망 하나 짊어진 채 백담사에 처음 모습을 드러냈다. 춘성은 만해를 유심히 바라보았다. 자그마한 키에 차돌처럼 다부진 몸매, 특히 두 눈에서 뿜어져 나오는 강한 기운은 어린 춘성의 눈에도 보통 사람이 아님을 직감토록 했다.

당시 도인으로 소문이 자자하던 연곡 큰스님은 춘성으로 하여금 만해의 상좌가 되도록 했다. 만해가 한 때 월정사를 비롯해 절에 머문 적이 있었다고 하더라도 갓 계를 받은 만해의 상좌가 되라고 한 것은 파격이었다.

춘성의 눈에 비쳐진 만해는 다른 스님들과는 확연히 달랐다. 불교를 비롯해 온갖 사상에 두루 깊은 조예가 있었을 뿐 아니라 사람의 마음을 뒤흔드는 언변술, 한 번 결심하면 반드시 해내고야 마는 용광로 같은 열정의 화신이었다. 춘성은 그의 상좌로 있으면 공부를 실컷 할 수 있을 거라는 은근한 기대가 있었다. 때마침 백담사를 찾은 궁녀가 주고 간 조선어독본을 열심히 공부하고 있던 춘성이었기에 더욱 그러했다.

그러나 며칠 뒤 글공부를 하고 있던 춘성을 본 만해는 “글공부할 필요 없다”며 춘성의 책을 빼앗아버렸다. “어설프게 알면 왜놈의 앞잡이 밖에 될 게 없다. 차라리 무식한 편이 왜놈의 앞잡이도 피하고 그 편이 낫다”게 만해의 입장이었다. 그러나 어린 춘성 또한 뜻을 굽히지 않았다. 홀로 한글 공부를 마친 춘성은 천자문, 자경문 등을 다른 이에게 물어물어 하나씩 터득해 나갔고 나중에는 그런 그의 공부를 만해는 적극 도왔다. 뒷날 춘성이 그 방대한 『화엄경』을 거꾸로도 외울 정도로 유명한 화엄법사가 될 수 있었던 것도 만해의 지도와 무관하지 않다.

춘성은 스승 만해가 바람을 닮았다고 생각하곤 했다. 한 번 산문을 나가면 몇 달에서 몇 년씩 헤매다가 돌아오곤 했다. 간혹 해외에서 있었던 얘기를 들려줄 때면 ‘스승은 타고난 모험가구나’ 하는 생각이 절로 들고는 했다. 1906년 봄, 견문을 넓히기 위해 갔던 블라디보스톡에서 친일파 일진회 회원으로 오인 받아 항구에서 수장될 뻔하다가 격투 끝에 기적적으로 살아난 이야기, 1908년 일본에 건너가서 본 여러 문물들과 훗날 3·1운동의 주역이었던 최린에 대한 얘기, 또 얼마 후 만주에 갔다가 조선인 청년에게 머리에 총을 맞아 죽어가던 중 관세음보살의 가피로 살아난 얘기 등등. 그러나 만해는 누구와 어울리거나 잡담을 하는 일이란 거의 없었고 그저 백담사와 오세암을 오가며 책에 묻혀 지낼 뿐이었다.

한 번은 시베리아와 일본을 돌아보고 왔다는 만해는 백담사 골방 안에 틀어박혀 매일 무언가 열심히 써내려가고 있었다. 긴 가뭄 끝에 굵은 빗줄기가 대지를 적시던 날도 마찬가지였다. 춘성은 장난기가 발동했다. 그는 옷을 다 벗어던지고 마당으로 뛰어나가 너울너울 춤을 추었다.

“요망스런 감로수야. 왜 중생의 가슴을 태우고 이제야 퍼부어대느냐. 스님, 이 좋은 날 방안에 쳐 박혀 무엇 하십니까?”
“허허허, 그 놈 제법이다. 좋아, 좋아!”

얼마 뒤 원고를 모두 마친 만해는 원고뭉치를 춘성의 두 손에 급히 쥐어주고는 지금 일본이 원종이라는 이름으로 한국불교를 망치려 하고 있다며 또다시 바람처럼 사라져갔다. 춘성은 만해가 건네 준 책을 보았다. 『조선불교유신론』이었다. 한 장 한 장 읽어 내려가던 춘성은 교육에서 포교, 제도까지 불교계의 근본 문제점을 낱낱이 지적하고 대안을 제시하는 스승의 탁월한 안목에 연신 감탄을 자아내는 동시에 염불당을 폐지하고 승려의 혼인을 자율화해야 한다는 등 그 급진적인 사상에는 은근히 걱정이 되기도 했다.

젊은 날 춘성은 어떻게 스승을 돕고 어떻게 스승을 닮아갈 것인가가 그의 최대 과제였다. 만해가 일본불교 침투에 맞서 임제종 운동을 벌일 때에 적극 참여했으며 삼일운동의 주역으로 만해가 수감생활을 할 때 뒷바라지 하는 것도 춘성의 몫이었다. 특히 만해가 대다수 민족대표들이 옥중에서 눈물을 흘리며 목숨을 애걸하는 것과는 달리 통상적인 변호사와 보석(保釋), 심지어 사식조차 거부하며 고통을 감내하는 스승의 모습을 지켜보던 춘성의 근심도 하루하루 깊어져만 갔다. 당시 설악산 신흥사 주지를 맡고 있던 춘성은 강원도와 서대문 형무소를 끊임없이 오갔다. 그러던 중 만해로부터 독립의 당위성을 당당히 밝힌 「조선독립에 대한 감상」을 몰래 전해 받아 그것을 상해 임시정부에 전달되도록 했다.

‘돌을 던지면 똥개는 돌을 따라가고 사자는 던진 사람을 물어버린다(韓擄逐塊 獅子咬人)’는 옛 선가의 말처럼 춘성은 개가 아니라 사자였다. 춘성은 스승 만해의 그늘 아래 머무르기보다 그를 뛰어넘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 화엄법사로 명성을 날리던 그가 서른아홉 뒤늦은 나이에 만공회상을 찾아간 것도 그 때문이었다. ‘우리나라에는 사람이 귀한데 그 한개 중 반은 만해’라고 공공연히 만해를 극찬했던 만공은 그의 상좌 또한 비범함을 한 눈에 알아보고 기꺼이 거두었다.

만공으로부터 ‘무(無)’자 화두를 받은 춘성은 이때부터 생사를 건 치열한 정진을 시작했다. 한 겨울에도 불 한번 지피지 않고 장좌불와로 일관했으며, 살을 에이는 추위에도 항아리에 찬물을 담아 그곳에 들어가기를 꺼려하지 않았다. 그렇게 3년의 결제를 마친 춘성은 마침내 활연대오 할 수 있었고 이후 육두문자를 거침없이 쓰는 욕쟁이 스님으로, 또 평생 옷 한 벌 바리때 하나만으로 지냈던 청빈한 수행자의 삶을 끝까지 살았다.

온 몸을 불살라 시대의 등불이 되고자 했던 만해, 그 등불을 우상시하고 무작정 좇기보다 스스로의 등을 밝히고자 했던 춘성. 스승 만해가 용이었다면 제자 춘성은 호랑이였던 것이다. 역시 그 스승에 그 제자다.

이재형 기자 mitra@beop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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