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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 깨어있고 싶어 참선 시작했죠

기자명 법보신문

참선수행 지도 백련불교문화원 김 창 열 법사

<사진설명>성철 스님 입적을 계기로 본격적인 수행자의 길을 걷고 있는 심전 김창열 법사는 ‘진실한 마음 하나만 있다면 안 될 것은 없다’고 강조한다.

‘1993년 11월 4일 오전 7시 30분, 해인사 퇴설당에서 성철 스님 입적.’

삶의 이정표를 성철 스님 가르침에 두고 살았던 부산의 한 청년 불자에게 이 소식은 청천벽력과도 같았다. 청년은 해인사 백련암을 수없이 오갔지만 정작 성철 스님을 친견하지 못했다는 안타까움과 자책으로 가슴이 터질 듯 고통스러웠다. 해인사로 단숨에 달려간 청년은 일주일간 스님의 가장 가까이서 장례식의 온갖 수발을 자청했다.

성철 스님을 살아생전 눈으로만 뵙는 것이 만남의 전부는 아니다. 바로 지금 내 안에서 바른 공부만 이어진다면 언제 어느 때든 스님을 만날 수 있을 것 아닌가.’ 다비식이 끝나고 그 청년은 성철 스님이 가장 중요한 공부라고 강조했던 화두를 들고 생사를 걸어보기로 결심했다. 스님의 열반이 청년에게 대발심이 된 것이다. 이 청년이 바로 성철 스님의 열반 후 12년이 지난 지금, 부산 백련불교문화원에서 성철 스님의 가르침을 전하는 심전(心傳) 김창열 법사(44)다.

백련암서 수행지도… 문화원 개원

김 법사는 1978년 고등학교 1학년 때 친구의 소개로 대승불교제일분회(현재 부산 정오사) 불교학생회에서 불연을 맺었다. 어려운 가정 형편에 문학도의 꿈을 접고 공업고등학교로 진학한 김 법사에게 사찰은 가장 큰 위안의 장소가 됐다. 처음 108배를 했을 때 휘청대는 다리로 인해 계단에서 넘어지기도 했지만 얼마 후에는 삼천배도 거뜬히 해낼 수 있었고 아비라 기도, 능엄주를 외우며 또래들보다 적극적으로 일손을 거들어 스님과 보살님들의 칭찬을 한 몸에 받기도 했다. 주지 원광 스님은 집전과 스님의 시봉까지 김 법사에게 맡겼고 신도들은 원광 스님을 ‘대사’, 김 법사를 ‘중사’라고 부를 정도였다.

김 법사는 1981년 대학진학 후 절에서 학교를 다니기 시작했다. 그리고 자신이 절에서 해왔던 모든 것이 성철 스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수행이라는 사실도 알게 됐다. 이때부터 그는 성철 스님의 생활 법문을 수행의 지침서로 삼고 공부를 이어갔지만 말처럼 참선에는 쉽게 몰입되지 않았다. 곁에서 지도해줄 선지식도 없었고 선어록을 접하기에는 아직 이해할 수 없는 말이 태반이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김 법사가 절 생활과 직장을 회향하고 해인사 백련암을 찾아간 것은 노사였던 원광 스님이 입적한 지 2년 후인 1991년 4월이었다.

이 무렵 김 법사가 해인사 백련암에서 삼천배 정진에 도전할 때는 심한 관절염을 앓고 있었다. 학창시절 잘도 하던 삼천배지만 이날만큼은 몸의 고통과 함께 자신에게서 나오는 역한 냄새까지 견디기 힘들게 했다. 이를 악물고 삼천배를 끝낸 후, 김 법사는 비로소 몸이 홀가분해짐을 느꼈다. 다음날 다시 절을 할 때 관절염은 사라지고 없었다. 그러나 그것은 또다른 시작이었다.

삼천배를 마치고 몸의 건강은 회복했지만 마음의 경계는 아직 넘어서지 못했다. ‘마삼근’ 화두를 받았지만 여전히 간절함은 올라올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2년 후 김 법사는 성철 스님의 입적을 계기로 다시 한번 흔들림 없이 공부하겠다는 결심에 이른 것이다.

김 법사는 선어록을 펼치고 성철 스님의 화두에 대한 지침을 상기했다. “화두는 간단없이 간절하게 참구해야 익어진다. 철석같이 바른 신심으로 결코 흔들림 없이 나아가야 한다.”

매일 600배…머리 속에는 늘 화두

‘간절하기에 앞서 간단없이 이어가기라도 해 보자’는 마음에서 김 법사가 고안해 낸 것은 염 화두였다. 이때부터 김 법사는 좌복에 앉아 정진하는 것은 물론, 차를 운전하며 이동할 때는 고성으로 화두를 염하고, 노래 가사 대신 화두를 곡에 붙이기도 했다. 절을 할 때는 방석 위에 화두를 써놓고 눈으로 화두를 들었다. 그렇게 마음공부에 전심전력을 다한 김 법사는 약 3년이 흐르자 하루 15시간 동안 화두가 끊어지지 않고 이어지는 경험을 했다. 이를 통해 간절한 마음을 내는 방법을 스스로 터득한 김 법사는 지금도 눈을 뜸과 동시에 화두를 들고 잠들기까지 화두와 함께하는 생활을 실천에 옮기고 있다.

김 법사가 부산에 백련불교문화원을 개원한 것은 8년 전인 1997년이다. 혹독한 수행프로그램으로 진행되는 해인사 백련암 수련회를 기획, 지도하던 김 법사는 부산에서 백련암을 찾아오는 불자들 간의 연락공간이라도 만들자는 소박한 취지에서 부산시 서구 대신동의 한 건물에 ‘백련불교문화원’을 개원했다. 그리고 초발심자들을 지도하고 다양한 수행을 자유롭게 할 수 있도록 공간을 개방했고 이후 성철 스님의 법어집을 불자들과 함께 공부하고 성지순례, 불우이웃 돕기도 실천하고 있다.

또한 김 법사는 청소년 시절부터 재능을 발휘했던 레크리에이션 분야와 불교 수행을 접목해 부산시 교육인적자원봉사자로 활동하고 있다. 효림초등학교, 재송여자중학교, 동래 부산정보관광고등학교, 부산교도소 경비교도대 등에서 지도하는 인성 교육 및 상담과 함께 명상, 요가 등이 그것이다.

특히 청소년기의 인성 개발에 가치를 둔 김 법사의 수업은 재미있고 진솔한 가르침으로 학교에서도 인기가 높다. 김 법사의 강의를 들어본 교사들과 학부모들은 소문을 듣고 백련불교문화원을 찾아오기도 한다. 학생들을 가르치는 선생님이 불교와 인성교육의 결합을 김 법사로부터 다시 배우는 것이다.

백련암에서 아비라 기도 중 만난 도반과 결혼한 김 법사는 현재 10살과 12살의 두 아들을 두고 있다. 30년간 수행의 길을 걸어오면서 한 가정의 가장, 재가 불자들을 지도하고 이끄는 법사, 인성교육을 실천하는 교사라는 역할이 하나 더 주어졌지만 김 법사는 이를 공부의 과정으로 생각하며 기쁨으로 실천하고 있다.

학교에서나 문화원에서나 항상 김 법사는 “진실한 마음 하나만 있다면 안 될 것은 없다”고 강조한다. 어린이와 청소년들에게 삼천배를 권장하는 이유도 자신을 보고 남을 위하는 시간을 통해 참다운 심성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비록 재가불자들이 외형은 출가자가 아니지만 이미 마음의 출가를 했다면 충분히 깨달아 자유인이 될 수 있다”는 표현이기도 했다.

학생-선생님들한테도 인기 강사

아무리 바쁜 날이라도 매일 600배를 일과로 실천하는 김 법사에게 성철 스님의 가르침은 관세음보살이 머리의 보관에 새긴 아미타불과 같다.

“영가 스님도 ‘증도가’ 에서 ‘근본만 얻을 뿐 끝은 근심치 말라’고 했습니다. 오매일여(寤寐一如)가 되어 확철대오에 이를 때까지 항상 정진하는 삶을 살아갈 겁니다. 제 목표가 지금 이 순간 성철 스님처럼, 또 부처님처럼 깨어있는 삶이기 때문입니다.”

부산지사=주영미 기자 ez001@beop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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