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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 해안선사가 딸 일지에게

기자명 법보신문

몸 튼튼히 가지고 노스님 시봉도 잘해라

여름에 몸 튼튼히 지내었느냐. 그리고 부처님 전에 절 많이 하고 공부도 부지런히 하였느냐? 나는 틈틈이 『열반경』을 읽어보는데 다시 또 한 번 거룩하옵신 부처님 전에 머리를 숙여 묵묵히 감격의 눈물이 젖어지는구나! 그처럼 일체중생을 불쌍히 여기시고 건지셨는지 생각사록 부처님의 은혜가 크고 깊구나!

어찌하다 너나 내가 불법을 만나게 되었는지 아슬아슬하게 다행한 일이다. 일지야, 중노릇 잘하여라. 추잡한, 그리고 불쌍한 세속 사람들에게 물들지 말고 내가 처음에 너 갈 때 써주었던 입지여석(立志如石)이란 네 글자를 네 머리에 새겨라.

중은 견성성불하는 것이 목적이니 견성을 해야 부처님의 은혜도 갚고 중생제도도 하게 되는 것이다. 견성을 하지 못하고 불법을 안다고 하는 것이야 장님이 월광(月光)을 안다고 하는 것과 다름이 없다. 부디 내 말을 가볍게 알지 말고 큰 원(願)을 세워라.

조석으로 불전에 예배드릴 때 네 원을 성취하도록 묵도하여라. 몸 튼튼히 가지고 노스님 시봉도 잘하여라.


일지는 한 때 스님의 딸이라는 사실이 너무나 싫었다. 늘 배고픈 생활, 공부를 잘해도 칭찬해주는 이 하나 없고, 대학 진학은 아예 꿈도 꿀 수 없는 상황. 거기에 남들처럼 아버지, 어머니라고 부르지 못할 뿐 아니라 스님의 딸이기에 받아야 하는 묘한 시선은 가난보다 더 그를 몸서리치게 만들었다. 특히 부잣집 외동딸로 아무 것도 모르고 시집 와 갖은 고생을 하는 ‘보살님’을 볼 때면 상대적으로 ‘스님’에 대한 원망은 커져만 갔다. 절 살림에 스님과 신도들 뒷바라지까지 하루 종일 숨 돌릴 틈 없이 살면서도 간혹 일지가 한밤중에 깰 때면 ‘보살님’은 늘 졸린 눈을 비벼가며 삯바느질을 하고 있었다.

‘난 무슨 일이 있어도 저렇게는 안 살 거야.’ 어릴 때부터 늘 독립을 꿈꾸던 일지가 대학의 꿈을 접어야 했을 무렵 ‘아버지 스님’은 “성현의 가르침이 인생대학의 모범답안”이라며 금강경, 전등록, 선문염송 등을 가르쳐주었다. 늘 가까이 뵈면서도 한없이 멀게만 느껴지고, 이리저리 피하는 일지와 간혹 눈이 마주칠 때면 그저 가만히 미소만 짓던 분. 그 낯선 아버지가 자신을 위해 정성껏 법을 설하고 있는 것이다.

‘그동안 나는 아버지가 나를 이해해 주기를 바라기에 앞서 아버지를 얼마나 알고 이해하려 했던가.’ 하루하루 법문을 들으면서 그토록 싫었던 불교가 조금씩 가슴에 와 닿았고 나중에는 참다운 자유란 내면의 등불을 밝히는데 있음을 깨달았다. 그 때부터였다. 아버지 해안(海眼, 1901~1974) 스님이 커 보이기 시작한 것은….

오래지 않아 일지는 아버지처럼 거친 승복 속에 평생 자신을 가두기로 마음먹었다. 그런 딸의 결심 앞에 아버지 해안 스님은 그저 무심한 듯 예산 보덕사를 소개해 주었다. 하지만 며칠 뒤 일지가 떠나던 날 해안 스님은 일지의 손을 꼭 잡으며 금강석처럼 굳건한 서원을 세우라는 뜻의 ‘입지여석(立志如石)’을 써 건네주었다. 그리고 10년이 넘기 전에는 돌아오지 말라는 완곡한 당부의 말도 잊지 않았다.

‘아! 아버지….’ 일지는 해안스님의 손길에서 전해 오는 깊은 정을 느끼며 저 분이 나의 아버지라는 사실이 난생 처음 뿌듯하고 감사했다.

전북 부안이 고향으로 어린 시절 신동으로 불렸다는 아버지 해안 스님은 유명한 한학자를 찾아 내소사 부근에 왔다가 만허 선사를 만나 불연을 맺었다고 했다. 이후 선지식을 찾아 여러 고찰을 찾아다니던 중 백양사의 학명선사 회상에서 은산철벽(銀山鐵壁)을 뚫으라는 화두를 받아 7일 낮밤을 정진하다가 큰 깨침을 얻었다고 했다. 특히 해안 스님은 학명조실에게 매일 점검 받을 때의 두려움과 긴장, 또 제대로 답을 못했을 때의 참담함에 대해 자주 언급하고는 했다.

그래서일까. 일지는 아버지 해안 스님이 어느 면에서는 학명선사를 쏙 빼닮은 것 같았다. 해안스님 자신도 출·재가를 떠나 제대로 답을 못하면 누구든 사정없이 면박을 주기 일쑤였고, 그 때문에 스님을 뵙고 나온 수행자들은 눈물을 뚝뚝 흘리거나 밥도 굶어가며 밤새 정진하는 모습을 숱하게 지켜봤기 때문이다.

일지는 그런 해안 스님의 일거수일투족이 모두 제자들에 대한 지극한 자비의 발로였음을 출가자의 길을 걷고 나서야 깨달았다. 또 여러 사람들이 일컫듯 해안 스님이 선과 교를 두루 갖춘 극히 드문 선지식임도 알게 되었다.

그렇게 하루하루 ‘중물’이 들어가던 일지가 해안 스님으로부터 편지를 받은 것은 개심사 강원에서 공부할 무렵이었다. 평소 따뜻한 말 한마디 건넬 줄 모르던 ‘아버지’의 글에는 자신에 대한 애정과 염려가 행간마다 촘촘히 배어있었다. 당신과 자신의 인연에 깊이 감사한다며 공부 열심히 하라는 당부의 글이었다.

능엄경을 공부하던 일지는 ‘아버지 스님’의 곁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그 어디에서보다 경전에 대해 더 깊이 공부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참선수행의 진전도 훨씬 빠를 거라는 기대감 때문이었다.

애초 해안 스님과 약속했던 10년의 절반 밖에 채우지 못한 채 일지는 내소사 지장암으로 향했다. 하늘로 곧게 뻗은 전나무 숲을 지나 무거운 발걸음으로 들어선 도량. 늘 그렇듯 그곳에는 사부대중 30여 명이 열심히 정진하고 있었고 자신을 발견한 스님은 그저 무심히 한 번 쳐다보고 지나쳤다. 하지만 며칠 뒤 해안 스님은 일지를 불러 짧은 게송을 건네주며 자신의 속내를 전했다. 그리고 그 짧은 게송은 일지로 하여금 평생 수행자의 길을 걷도록 했다.

‘부싯돌 번갯빛 속에(石火電光裡)
인생이 한바탕 꿈이로구나(人生夢一場)
만겁에 만나기 어려운데(萬劫難遇法)
다행히 만났으니 불은이 깊도다(幸得佛恩多)’

지장암에 사는 대중들이라면 누구나 그렇듯 일지도 이곳 생활을 위해서는 먼저 금강경과 원각경 보안보살장, 그리고 관음예문을 반드시 외워야 했다. 이제는 수행자 일지였기 때문이었다. 공부한 것을 점검 받을 때의 팽팽한 긴장감과 불꽃 튀는 하얀 정진의 밤이 계속됐고, 죽으로 연명하는 것도 예년과 다름없었다. 하지만 일지는 변해 있었다. 여러 도반들과 함께 맘껏 정진할 수 있는 것도 좋았고 해안 스님의 아름답고도 가슴을 울리는 법문을 듣는 일도 즐거웠다. 특히 해질녘 전나무 숲 아래 둘러 앉아 저녁 예불을 드리고 금강경을 독송할 때면 마냥 행복하기까지 했다.

일지는 해안스님이 외부법문을 갈 때면 꼭 따라갔다. 또 스님의 금강경 해설서가 널리 알려지면서 ‘보살님’을 도와 지장암으로 공부하러 오는 사람들의 뒷바라지를 하기도 했다. 그러던 어느날 해안 스님은 환갑날 장례식을 치른다며 준비하라고 했다. 모두들 납득할 수 없었지만 큰스님의 뜻을 어길 수는 없는 일이었다. 살아 장례식을 치른다는 듣도 보도 못한 일이 세간에까지 알려지면서 스님의 환갑날에는 지장암은 물론 내소사 입구까지 ‘산 사람의 장례식’을 보려는 구경꾼들로 장사진을 이루었다. 그 때 스님의 고무신을 들고 상여를 뒤따르던 일지는 해안 스님이 상여에 올라앉아 구성지게 노래 부르던 모습을 아직도 잊을 수 없다.

‘나는 가네 나는 가, 이 세상을 이별하고 나는 가네 나는 가, 어어노 어어노 나무아미타불/ 백년 삼만육천일을, 우리 인생이 산다 해도, 허망하기 짝이 없네, 어어노 어어노 나무아미타불/ 살아있는 사람들아, 죽어지면 그만이라고 그런 말은 하지 마소, 어어노 어어노 나무아미타불/ 인과가 분명하여, 악한 사람은 지옥으로 가고, 선한 사람은 천당으로 가네, 어어노 어어노 나무아미타불.…’

처음 장례식 의도를 모르던 일지는 스님의 열반가에 여기저기서 눈물을 훔치는 사람들을 보며 비로소 그 깊은 뜻을 이해할 수 있었다. 언제 죽을지 모를 인생사이건만 늘 다투고 움켜지려는 욕망의 노예가 되어 사는 중생들을 일깨우기 위함이었던 것이다.

이후 나머지 인생은 덤이라며 어느 한 곳 걸림 없이 살던 해안 스님. 일지에게 그 분은 오르고 올라도 오를 수 없을 것 같은 거대한 산이었고 잡힐 듯 잡히지 않는 허공과 같았다. 그렇게 시간은 흘러 내소사의 봄이 무르익던 어느 날 스님은 이제 세연을 마치려 한다며 한 사람 한 사람 불러 유언을 남겼고, 마지막으로 일지를 불렀다.

“너무 바른 말을 잘하면 덕을 잃는 법이다. 말을 삼가라. 또 너는 여기 문중이 아니니까 비구니 대중이 있는 곳으로 가서 정진 열심히 해라. 그리고 혹 사리가 나오더라도 물에 띄워 없애버리고 비(碑) 같은 것은 세울 생각 말아라.”
“그래도 비는 세워야지요, 스님. 제자들의 도리도 있고요.”
“…굳이 세우려거든 앞에는 ‘범부 해안지비(凡夫海眼之碑)’라고 쓰고, 뒷면에는 ‘생사가 이곳에서 나왔으나, 이곳에는 생사가 없다(生死於是 是無生死)’라고만 써라.”
일지의 눈에서는 눈물이 멈추지 않았고 나중에는 복받치는 설움을 참지 못해 울음을 터뜨렸다. 가야 할 공부의 길은 아직도 멀기만 한데 눈앞에서 태산이 무너지려 하고 있는 것이다.
“울지 마라. 모두가 이렇게 가고 이렇게 오는 것이다.”

1974년 3월 9일 6시 30분, 해안 스님은 동녘하늘에 붉게 물드는 아침 햇살과 함께 고요한 열반의 세계에 들었다. 일지는 그 후 3년간 지장암에서 해안 스님의 기일을 모신 뒤 ‘전등회의 문을 내리지 말라’는 유훈을 받들어 서울 전등사에서 새벽부터 밤까지 대중들을 지도하고 이끌었다. 그렇게 5년을 기도하듯 생활하며 전등회의 기틀을 다진 일지는 해안 스님의 마지막 당부대로 내원사, 동학사 등에서 십수년 간 참선과 경전공부를 한 후 내소사 지장암으로 돌아와 도량을 정비하는데 온 힘을 기울였다.

이제 해안 스님이 입적한지 30여년. 일지는 ‘아버지 스님’을 떠올릴 때면 ‘내 전생에 어떤 좋은 일을 많이 했기에 큰스님의 혈육으로 태어날 수 있었을까.’하는 깊은 감사의 마음과 마지막 날까지 부끄럽지 않는 수행자의 길을 가겠다고 새삼 다짐하고는 한다.
이재형 기자 mitra@beop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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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안스님이 일지스님에게 보낸 편지는 전등사·전등선림에서 펴낸 『해안집』(2001) 제1권에 실려 있습니다. 스님은 잘 알려졌다시피 漢詩는 물론 아름다운 한글 시도 많이 남겼는데 다음의 ‘멋진 사람’이 대표적이라 할 수 있습니다.



멋진 사람

고요한 달밤에 거문고를 안고 오는 벗이나
단소를 손에 쥐고 오는 친구가 있다면
구태여 줄을 골라 곡조를 아니 들어도 좋다.

맑은 새벽에 외로이 앉아 향을 사르고
산창으로 스며드는 솔바람을 듣는 사람이라면
구태여 불경을 아니 외워도 좋다.

봄 다 가는 날 떨어지는 꽃을 조문하고
귀촉도 울음을 귀에 담는 사람이라면
구태여 시를 쓰는 시인이 아니라도 좋다.

아침 일찍 세수한 물로 화분을 적시며
난초 잎에 손질을 할 줄 아는 사람이라면
구태여 그림을 그리는 화가가 아니라도 좋다.

구름을 찾아가다가 바랑을 베개하고
바위에서 한가히 잠든 스님을 보거든
아예 도(道)라는 속된 말을 묻지 않아도 좋다.

야점사양(野店斜陽)에 길 가다 술을 사는 사람을 만나거든
어디로 가는 나그네인가 다정히 인사하고
아예 가고 오는 세상 시름일랑 묻지 않아도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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