⑫ 화쟁사상-Ⅵ
⑫ 화쟁사상-Ⅵ
  • 법보신문
  • 승인 2005.11.07 1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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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서문명 융화-공존 위한 수승한 논리
미국 문명 중심론으로 인한 갈등 증폭
문명 충돌을 공존으로 바꾸는 건 ‘관용’


<사진설명>전북 부안 개암사 원효방. 이곳에는 작은 웅덩이가 있는데 전설에 따르면 원효가 여기서 수행하기 시작하면서 샘물이 솟았다고 한다.

21세기는 충돌로 시작되었습니다. 충돌의 원인은 무엇일까요? 그리고 충돌로 치닫는 세계 질서는 어떻게 진단해야 할 것이며, 동서문명의 충돌을 어떻게 공존과 조화로 바꾸어 갈 수 있을까요. 이에 대한 해답을 불교사상에서 구할 필요가 있습니다. 1980년대 말 공산세계가 무너지면서 냉전체제는 끝났습니다. 프란시스 후쿠야마(Francis Fukuyama)는 이를 ‘역사의 종말’로 해석하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는 역사의 종말을 목도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인류의 이념적 진화가 종착점에 이르렀고, 인간이 만든 정치체제의 최종 형태로서 서구의 자유민주주의가 보편화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새뮤얼 헌팅턴(Samuel P. Huntington)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그는 자본주의의 승리, 서구문명의 세계 정복은 피상적인 현상일 뿐, 탈냉전 세계에서 사람과 사람을 가르는 가장 중요한 기준은 이념이나 정치 경제가 아니라 문명이라고 하면서, 21세기 초의 세계평화를 위협하는 것은 문명간의 충돌이라고 설명합니다.

‘문명의 충돌’, 헌팅턴이 제기한 이 명제는 엄청난 반향을 불러 일으켰습니다. 비판과 반론 또한 만만치 않지만, ‘문명의 충돌’은 지금까지도 전 세계의 화두가 되고 있음이 분명합니다. 특히 전 세계인의 이목을 집중시켰던 9.11 테러와 이에 맞선 미국의 테러와의 전쟁으로 인해서 ‘문명의 충돌’은 인구에 회자되기에 이르렀고, 이미 정치 및 시사용어가 되고 있습니다. 따라서 ‘문명의 충돌’이라는 개념이 던지는 파장 또한 적지 않다고 하겠습니다. ‘문명의 충돌’이란 개념의 배후에 있는 이론은 구제불능의 결함을 안고 있다는 독일 프랑크푸르트 대학의 국제관계학 교수인 하랄드 뮐러(Harald Muller)의 강한 비판이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이 개념이 세계의 현실 정치에 미치고 있는 영향이 적지 않기 때문입니다.

헌팅턴은 간결한 이론이나 모델을 명쾌하게 수립하여 정책 입안자들에게 필요한 지침을 제공하고자 했습니다. 그는 탈냉전 세계를 7~8개의 주요 문명으로 구분하면서도, 이를 다시 하나의 서구와 다수의 비서구로 단순화시킵니다. 그리하여 서구와 비서구의 관계에서 가장 핵심이 되는 문제는 서구문명의 보편성을 관철하려는 서구, 그중에서도 미국의 노력과 서구의 현실적 능력 사이에서 생겨나는 부조화라고 말합니다. 유교와 이슬람국가들은 서구에 맞서 서구를 견제하려 하는데, 가치관과 이익을 둘러싼 서구와의 충돌이 심화되고 있다고 설명합니다.

헌팅턴은 또 9·11테러 이후에 가진 한 인터뷰에서, “서구문명은 자기 방어를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을 받고, 다음과 같이 답했습니다. “서구는 다른 문명보다 기술적 군사적 우위를 반드시 유지해야 하며, 이슬람국가들과 중국에 대해서는 재래식 군사력이든 비재래식 군사력이든 개발을 막아야 한다.”

이와 같은 헌팅턴의 주장은 미국 중심의 흑백논리라는 비판을 면하기 어려울 정도로 단순합니다. ‘우리와 그들’이라는 극히 단순화된 도식에 따라 세계를 양분하여 이해하고 서구문명의 방어만을 생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는 서구가 다른 문명의 내부 문제에 대해 개입하지 말 것도 당부했습니다.

그의 이러한 입장에는 다른 문명을 존중하고 이해하려는 노력이나 문명의 공존이나 교류에 대한 관심이 전혀 보이지 않습니다. 만약 헌팅턴의 견해를 따르게 되면, 문명다원주의는 끝나야 하고, 단일 문명국가를 세워야 합니다. 또 국경을 넘어선 선교 활동은 중지되어야 합니다. 문명 사이에 경계를 명확히 그어 다른 문명과 만나 갈등을 일으킬 수 있는 면적을 최소화 하는 정치만이 숙명적인 전 세계적 대결을 막을 수 있습니다. 그러지 못할 경우, 서구를 공동의 적으로 삼아 유교문명권과 이슬람문명권이 동맹을 맺는 악몽이 다가오게 됩니다. 헌팅턴의 이러한 진단은 서구문명의 방어에 집착한 결과로 도출된 오류일 뿐입니다.

카프라(F. Capra)에 의하면, 정신과 물질의 데카르트적 분리는 서구사상에 심대한 영향을 주었다고 합니다. 마음과 물질의 이분법에서 세계를 개별적인 부분들로 분리해서 보는 기계론적 세계관이 생겨나게 되었고, 이는 현대 서구문명의 기저를 이루어 왔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세계관은 근본적으로 분석적, 합리적, 이원론적, 경쟁적 특성을 가지게 된다고 합니다. 사실 서구문명에는 이분법적 단순 논리가 강조될 때가 많습니다. 중요한 단계마다 ‘우리와 그들’의 도식이 그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민주주의와 인권, 그리고 선을 악으로부터 보호하는 것이 자신의 역사적 과제라고 믿게 되었습니다.

이들의 ‘우리와 그들’, 혹은 선과 악의 이분법적 사고는 최고의 정치 위기에도 영향력을 발휘해 왔습니다. 1946년 윈스턴 처칠(Churchill) 전 영국 총리는 ‘철의 장막’이라는 용어로 자유세계와 억압적 공산세계 사이에 명확한 선을 그었습니다.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은 1983년에 소련을 ‘악의 제국’이라고 불렀습니다. 이처럼 오만하고 단순화된 미국의 정책은 얼마 전 부시 대통령의 ‘악의 축’ 발언으로 나타나기도 했습니다.

이처럼 ‘우리와 그들’, 선과 악이라는 도식에 기초하고 있는 이들의 주장은 헌팅턴의 견해와 다르지 않습니다. 헌팅턴이 제시한 이론은 이미 미국의 정책 입안자들에게 영향을 주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이 세계를 선과 악의 두 편으로 나누고 대결을 부추기는 부시의 연설은 극히 단순한 발상이며 독단적 독선주의로 기울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자신만이 선하고 자기와 입장이 다른 모든 국가와 민족은 악하다는 극단적인 독선주의는 갈등을 더욱 부추길 뿐입니다.

단순한 도식으로 세계사 전체를 설명하는 것은 위험하기 짝이 없습니다. 세계 정치 현실의 복합성이나 도덕적 판단의 애매성 등을 생각할 때 더욱 그렇습니다. 모든 것은 중생들의 공업(共業)에 의존하여 형성됩니다. 업(業)은 역사와 세계의 창조자이고 유지자이며 또한 파괴자입니다. 세계의 모든 일은 중생의 온갖 행위가 얼키고 설키면서 서로 작용하여 일어납니다. 문명도 결국 중생들의 집단적 행위에 의해 형성된 것입니다. 그리고 어떤 문명도 명확한 형이나 틀을 갖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특정한 문명 안에 있는 중생들의 집단적 행위의 성질에 따라 구분될 뿐입니다.

헌팅턴이 문명권을 구분하는 일차적 기준은 종교입니다. 그에 의하면, 종교는 문명을 규정하는 핵심적 특성입니다. 따라서 그는 세계의 문명을 종교를 중심으로 구분했고, 이에 의해서 크리스트교권, 정교권, 이슬람권, 유교권, 불교권, 힌두권 등을 설정했습니다. 물론 종교가 유일한 기준은 아닙니다. 그래서 라틴아메리카권, 아프리카권, 일본권 등도 선정했던 것입니다. 비록 그가 여러 문명권을 설정했지만, 결국은 크리스트교권 대 여타 문명권의 대립양상으로 설명했습니다. 종교학자들은 흔히 종교는 절대 신념체계이며 궁극적 가치체계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절대신념체계가 여럿이 공존하는 다종교 상황은 기본적으로 가치관의 혼돈과 종교간의 갈등과 마찰을 일으키는 위험을 내포하게 됩니다.

오직 하나의 길만을 가야한다고 고집하는 종교가 적지 않습니다. 보수주의 신학자들에 의하면, ‘오직 예수 이름으로만’ 구원이 가능하기 때문에 타종교인들은 구원받을 수 없다고 합니다. 그러나 행복의 피안으로 가는 길은 오직 한길만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여러 갈래의 길이 있습니다. 불교라는 길도, 기독교라는 길도 이슬람이라는 길도 있습니다.

불교는 진리에 대한 독단과 종교 자체의 절대화를 용납하지 않습니다. 이 때문에 부처님께서는 집착을 버리게 하기 위해서 뗏목의 비유를 들었던 것입니다. 불교에서는 교법에 집착하는 것까지도 미련 없이 떠나라고 가르칩니다. 이 교훈에 의하면 종교는 결국은 뗏목이자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일 뿐입니다. 아놀드 토인비는 “세계종교들의 대화에 인류의 운명이 걸려 있다”고 했습니다. 나아가 그는 “불교와 기독교의 만남이야말로 20세기의 가장 중요한 사건으로 기억될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만남도 중요하지만, 만나서 서로 대화할 수 있어야 합니다.
세상의 모든 것은 언제나 변하고 있습니다. 또한 변화를 기본 전제로 하고 있습니다. 제행무상(諸行無常), 그러기에 문명도 변하고 변화를 통해서 문명은 서로 교류합니다. 문명은 역동적이고 변화무쌍합니다. 고정불변의 문명이란 없습니다. 따라서 한 순간에 지나지 않는 문명간의 관계를 경직되고 불변하는 모습으로 파악하여 문명 전쟁을 논한다는 것은 근본적인 오류라는 지적은 옳습니다. 어떤 문명도 외부와 격리된 채 홀로 존재하는 경우는 없습니다. 하나의 문명이란 언제나 다른 여러 문명과 제휴한 상태로 존재합니다. 또한 문명은 공간과 시간, 그리고 인종의 차이 등을 뛰어 넘어 서로 교류하고 영향을 미칩니다. 문명간의 교류는 지금도 활발히 진행되고 있습니다. 특히 운송과 통신 수단의 발달로 이 세계는 지구촌으로까지 불리게 되었습니다.

종래에 국가 단위나 지역 단위의 경계를 가지고 전개되었던 인간의 여러 활동이 세계화되는 것은 피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서로 다른 문명의 접촉은 빈번해졌고, 타 문명의 유입과 전파 또한 자유로워졌습니다.

서구는 다른 문명에 대해 더 많은 것을 배워야 합니다. “만약 서양이 동양의 윤리와 신비, 그리고 대승불교의 발전을 받아들여 융화한다면, 세계는 인류가 바라는 곳에 한 걸음 더 다가설 수 있을 것이다.” 알버트 슈바이처의 이 말을 새겨들을 필요가 있습니다. 서구의 기독교는 불교의 관용의 정신을 배울 필요가 있습니다. 관용이야말로 문명의 충돌을 문명의 공존으로 바꾸는 가장 훌륭한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화엄적인 연기관에 의하면, 존재들의 평화로운 공존과 화해, 포용과 상호 존중의 통합이 가능합니다. 이것은 상즉(相卽)과 상입(相入)으로 설명됩니다. 상즉은 근원적인 동질성을, 그리고 상입은 상호 의존 및 침투의 관계를 말합니다. 이 세계는 무수히 분리된 객체로 조립된 거대한 기계가 아니라, 조화를 이루는 분할할 수 없는 전체로서 역동적인 관계의 그물입니다. 서로 다른 두 가지의 융합은 일치나 동질성을, 그리고 획일화를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융이이불일(融二而不一), 이것은 원효가 즐겨 사용하는 논리입니다. 하나가 아니라고 하는 것은 보편성이나 다양성을 전제로 합니다. 다양성을 인정하되 통합이나 통일이 필요합니다. 그러기에 서로 다른 두 가지를 융합하는 것입니다. 곧 융이(融二)입니다. 원효의 화쟁논리인 융이이불일, 이는 동서문명의 융화나 공존을 위해서도 유효한 논리입니다.

정리=이재형 기자 mitra@beop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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