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57 동명이 사형 혜산에게

기자명 법보신문

사형의 큰 은혜 어찌 잊으리오

제가 3개월 동안 병원에 입원해 있을 때 하루도 자리를 비우지 않으시고 치료와 간병을 해주셨던 일이며, 어린 나이에 해인사로 공부하러 떠날 때 손수 짐을 꾸려서 차에 태워주셨던 그 은혜들을 어찌 잊을 수 있겠습니까?

일구월심 전등회를 살리려고 내소사에서 하루도 쉬지 않고 불사를 하면서 병을 얻어 쓰려지셨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한 걸음에 달려가 뵙고 싶었으나 그렇게 하지 못하고, 끝내 그 뒤로 깨어나지 못하고 홀연히 입적하셨다고 하니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습니다. 혜산 사형님! 언제 다시 ‘은산철벽’ 회상에서 한 스승을 모시고 같이 살 수 있을지 마냥 그립기만 합니다.


2005년 7월초, 서울 전등선원장 동명(東明, 1950~)은 생살이 찢겨나가는 아픔을 겪어야 했다. 사형 혜산(慧山, 1933~2005)의 갑작스런 죽음, 내소사에서 다비식을 마치고 변산 앞바다에 유골까지 뿌리고 올라왔건만 사형의 죽음을 받아들이기란 여전히 쉽지 않았다. 우리네 인생이 꿈 같고, 환상 같고, 그림자 같고, 이슬 같다던 『금강경』 구절이 이처럼 가슴에 절절히 와 닿은 적이 또 있었을까. 동명은 피를 나눈 친형보다 소중했던 사형을 떠올리며 부칠 수 없고 받아볼 수 없는 마지막 편지를 써내려갔다.

동명이 혜산을 만난 것은 1963년 봄날 늦은 저녁이었다. 스승 해안(海眼, 1901~1974) 스님은 동명을 불러 젊은 거사가 곧 올테니 석포리 정거장에 내려가라고 했다. 순간 동명은 그가 누군지 짐작할 수 있었다. 3년 전부터 숱하게 편지를 보내온다던 사람. 스승도 매번 그의 편지를 받을 때마다 정성껏 답을 했고, 하루 한 번 오는 우체부에 그 답장을 전달하는 일은 늘 동명의 몫이었기 때문이다.

동명은 편지에 적힌 이름을 확인할 때나 혹은 스승이 법회 때 그의 편지내용을 언급하며 법문할 때도 그가 무엇 때문에 저리 열심히 편지를 쓰는지 궁금하기만 했었다. 서울 명문대를 나와 누구나 부러워하는 공직에 근무하고 있다던 사람. 마침내 그를 보게 된 것이다.

동명은 서둘러 정거장에 내려가 기다렸다. 얼마나 지났을까. 붉은 석양이 변산을 붉게 물들일 무렵 뽀얀 먼지를 풀풀 일으키며 달려온 버스는 토해내듯 한 남자를 내려놓았다. ‘저 사람이구나.’ 키가 180센티는 돼보였고 이목구비도 뚜렷했다. 열 네 살의 소년 동명에게 그 사람은 한 없이 커보였다. 통성명 대신 합장으로 간단히 인사를 나눈 뒤 동명은 미리 준비해간 남포등을 켜들고 이미 컴컴해진 전나무 숲길을 앞장서 걸어 올라갔다.

동명이 처음 내소사 지장암을 찾았을 때도 이렇게 어스름한 달밤이었다. 몇 해 전 심한 병으로 동명을 더 이상 돌볼 수 없었던 그의 어머니는 전주의 한 작은 절에 그를 맡겼고, 거기에서 만난 보살님이 여기 있으면 미래가 없다며 남도의 도인이라는 해안 스님을 소개해 줘 혼자 먼 길을 찾아왔던 것이다. 손수 머리를 깎아주신 해안 큰스님은 엄격하면서도 한없이 인자했다. 그리고 어찌 그리 아는 게 많은지 누가 물어도 막히는 게 없었고, 한 결 같은 고요함은 천지가 개벽해도 그대로 일 것 같았다. 동명은 이곳에서 열심히 공부하면 나중에 큰스님처럼 되리라 믿었다.

그러나 일이 너무 고됐다. 자급자족해야 했기에 오전 공부가 끝나면 오후부터 해질 때까지는 누구든 일에 매달려야 했다. 그런 까닭에 간혹 큰스님께 출가하려 마음먹었던 사람도 며칠 생활해보곤 발길을 돌리고는 했다. 하지만 동명은 이 젊은 거사는 다를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동명의 예상처럼 그는 ‘특별정진법회’가 끝났는데도 내려가지 않았다. ‘고(苦)를 떠나서 따로 행(幸)이 없고, 세간을 떠나 출세간이 따로 없다’는 큰스님의 말씀에도 그는 “일대사를 못 마쳤으니 내려가지 않겠다”며 출가의 뜻을 분명히 했다. 며칠 후 큰스님은 결국 동명을 시켜 머리를 깎게 한 뒤 ‘혜산’이라 부르기 시작했다.

열일 곱 살 더 많은 혜산과 어린 동명이 사제의 연을 맺은 것도 이 때부터다. 늘 마음 한 켠에 외로움이 짙은 안개처럼 깔려 있던 동명에게 사형 혜산은 새벽햇살과 같았고 속내를 털어놓을 수 있는 창구가 되어주었다. 혜산은 동명에게 이런 저런 재미있는 얘기들을 해주었고, 때로는 출가자의 길이 얼마나 소중한지도 들려주곤 했다.

동명이 큰스님을 시봉할 때면 혜산은 힘든 밭일이나 땔감을 도맡아했다. 또 혜산이 밥을 하면 동명은 반찬을 하고, 동명이 밥을 하면 혜산은 반찬을 해 스승께 공양을 올렸다. 새벽에 혜산이 종을 치면 동명이 도량석을 했고, 또 동명이 종송을 하면 혜산이 도량석을 돌았다. 추운 겨울날 물을 데워 목욕을 할 때면 맨 먼저 스승이 목욕을 하고, 그 다음에 혜산이 하고, 마지막에 동명이 했다.

가난했기에 손이 터져 피가 나도록 일해야 했던 나날들. 그러나 동명은 힘든 줄 몰랐다. 큰스님의 법문을 듣는 게 즐거웠고, 참선 시간이면 졸음에 겨워 뒤로 넘어질 때도 여러 번이었지만 ‘은산철벽(銀山鐵壁)’을 뚫기 위해 앉아 있는 시간도 마냥 좋았다. 무엇보다 일 년에 한두 번 두부를 사다가 함께 공양을 올리고 죽을 쑤어 나눠 먹을 때면 이보다 더 행복할 수 있을까 싶었다.

부산의 한 신도로부터 사과상자만큼이나 큰 녹음기가 선물로 들어온 것도 그 무렵이었다. 혜산은 녹음기를 보자마자 이걸로 큰스님의 법문을 녹음하면 되겠다며 기뻐했다. 그 때부터 스님의 법문을 녹음했고, 또 전국 각지로 외부 법문을 다닐 때면 두 사람은 큼지막한 녹음기와 자동차용 배터리를 들고 따라다녔다. 그럼에도 무거운 것은 늘 혜산이 들고 사제에게는 큰스님의 가사를 들도록 하는 사형의 배려를 어린 동명이라고 어찌 모를까. 특히 버스를 탈 때마다 무릎에 녹음기를 올려놓았던 탓에 사형의 가사 무릎 부분이 너덜너덜 해어진 모습을 볼 때면 동명의 마음 깊은 곳에서 미안함과 고마움이 슬며시 고개를 들고는 했다.

그런 새털 같은 날들이 흘러 동명이 열여덟이 됐을 때였다. 앳된 소년의 티를 벗어버린 동명의 당시 고민은 성(性)이었다. 자신의 의지와는 달리 욕망은 주머니 속에서 송곳 삐져나오듯 불쑥불쑥 치솟았고 이럴 때면 동명은 한없는 자괴감과 혐오감에 빠져들고는 했다. ‘어떻게 해야 이 성욕에서 자유로울 수 있을까?’ ‘이런 욕망이 없어진다면 더 열심히 수행할 수 있을텐데….’ 이런 저런 고민 끝에 동명은 극단의 방법을 선택했다. 아궁이 문으로 사용하는 두툼한 나무판 위에 성기를 올려놓고 시퍼런 삭두(머리 깎는 칼)로 힘껏 내리친 것이다. 순간 동명의 몸에서 붉은 피가 분수처럼 뿜어져 나왔다. 잠시 후 이를 발견한 혜산은 깜짝 놀라 손수레에 동명을 옮겨 싣고 마을 의원을 향해 힘껏 내달렸다. 땀일까? 눈물일까? 희미해져가는 의식의 동명에게 사형 혜산의 축축한 얼굴이 들어왔다. ‘내가 무슨 짓을 한 걸까. 앞으로 큰스님과 사형 얼굴을 어떻게 보나.’ 동네 의원이 절레절레 고개를 흔드는 것을 보며 동명은 의식을 잃었다.

동명이 깨어났을 때는 전주의 한 병원이었다. 사형 혜산은 줄포 읍내병원에도 갔었지만 고칠 수 없다하여 버스를 타고 전주까지 왔다고 했다. 사형은 타박하지도 않았고 왜 어리석은 짓을 했느냐고 나무라지도 않았다. 그저 한없이 따뜻한 미소로 동명을 바라볼 뿐이었다. 동명은 눈시울이 시큰거리며 가슴이 아려왔다. 그 때부터 혜산은 꼼짝달싹 못하는 사제의 곁에 머무르며 대소변을 받아주고 죽과 밥을 지어 떠먹였다. 또 동명이 몇 시에 잠들고 몇 시에 일어났는지 몸 상태는 어떤지를 꼼꼼히 기록했다. 동명이 석 달 만에 퇴원할 수 있었던 것도 밤을 세워가며 보살폈던 혜산의 지극한 정성이 있었기에 가능했는지도 몰랐다.

절 생활 10여 년 만에 동명이 지장암을 떠나 해인사 강원으로 공부하러 떠났던 것도 사형 때문이었다. ‘여기서 공부하면 되지 어딜 보내느냐?’는 스승에게 ‘젊을 때 견문을 넓히고 여러 좋은 도반을 사귀면 공부하는데도 좋지 않겠습니까?’라며 혜산은 스승을 설득했다. 그렇게 해서 어렵게 승낙을 받아낸 혜산은 친동생 같은 사제 동명의 짐을 꼼꼼히 챙겨주고 전나무 숲길을 지나 석포리 버스정류장까지 배웅해주었다. 또 어떻게 구했는지 동명의 손에 용돈을 쥐어준 뒤 동명이 탄 차가 사라질 때까지 손을 흔들어주었다.

사랑과 명예를 훌훌 벗어던지고 서른이 넘어 출가한 혜산은 그만큼 공부에 대한 열정과 각오도 남달랐다. ‘견성하지 못하면 온전한 불제자가 아니다’라는 스승의 말씀대로 그는 깨닫기 위해 온갖 고통을 감내해 가며 무섭도록 정진했다. 또 스승의 허락을 얻어 그 자신도 통도사 극락선원, 해인사선원, 대흥사선원, 봉래선원 등 전국 각지의 선지식을 찾아다니며 정진했다. 사미계를 받은 지 불과 10년 만에 천하의 해인총림 선원장을 맡을 수 있었던 것도 혜산의 불꽃 일렁이는 수행이력과 무관하지 않았다.

74년 스승이 입적한 후 혜산은 일제시대와 50~60년대 분규를 거치며 피폐해질 대로 피폐해진 종단을 일으키기 위해 총력을 기울였다. 조계사 주지, 조계종 규정위원, 총무원 사회국장, 한일 불교교류협의회 이사, 한국대학생불교연합회 지도법사 단장 등 수행자의 길과는 자못 멀어 보이는 사판 일을 마다하지 않은 것도 이 때문이었다.

그렇게 숨 돌릴 틈 없이 바쁜 혜산이었건만 동명에 대한 각별함은 늘 한결 같았다. 간혹 강원을 찾아와 공부 열심히 하라고 격려를 하기도 하고, 특히 동명이 장티푸스에 걸려 끙끙 앓으며 생사의 기로를 외로히 오갈 때는 어떻게 알았는지 손수 지은 약과 함께 힘내라는 따뜻한 위로의 편지도 보내왔다.

그런 혜산이 83년 내소사 주지를 맡은 뒤 동명에게 “자신은 스승의 향훈이 스며있는 이곳을 중창할테니 사제는 스승이 법을 펼치셨던 서울 전등사에서 불자들을 지도해 스승의 은혜에 갚자”고 제안했다. 이후 혜산은 자신의 말처럼 하루도 쉬지 않고 불사를 진행해 내소사를 대가람으로 중창했지만 결국 큰 병을 얻어 쓰러진 것이다.

스승이 입적한 후 늘 스승처럼 여기며 따르고자 했던 사형 혜산. 그 한없이 듬직했던 사형이 이제 만남을 기약할 수 없는 적멸의 세계로 떠난 것이다. 그 오랜 세월 베푼 은혜를 어이 갚을 수 있을까. 동명은 스승이 갈 때 마지막 남겼던 말처럼 사형 혜산을 보내며 하고 싶은 말은 ‘생사가 이곳에서 나왔지만 이곳에는 생사가 없다(生死於是 是無生死)’는 이 한 마디뿐이다.
이재형 기자 mitra@beopbo.com

--------------------------------

※동명 스님이 입적한 혜산 스님께 보내는 편지는 본지 811호(2005년 7월 13일자)에 실려 있습니다. 그리고 아래의 글은 해안 스님이 혜산 스님에게 준 전법게송입니다.

모든 법은 가명이라 실체가 없으니(一切諸法假名無實)
산은 산이 아니요(山是非山)
모든 법은 다 불법이라(一切諸法皆是佛法)
산 아닌 것 또한 산이다.(非山亦山)

어찌하여 한 법 가운데(何一法中)
하나는 그르고 하나는 옳은가(一非一是)
만약 산이 옳다고 하면(山若可也)
비산은 옳지 않을 것이요(非山不可)
비산이 옳다 하면(非山若可)
산은 옳지 않을 것이니(山是不可)
어찌해야 옳겠는가.(如何則是)

산을 산이라 해도 산은 산이 아니요(山山山非山)
산을 산 아니라 해도 산은 산이네(山非山山山)
산이라는 산이나 산 아니라는 산도(山山非山山)
산에 들어가면 한 산도 없네.(入山無一山)
저작권자 © 불교언론 법보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광고문의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

하단영역

매체정보

  •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 19 르메이에르 종로타운 A동 1501호
  • 대표전화 : 02-725-7010
  • 팩스 : 02-725-7017
  • 법인명 : ㈜법보신문사
  • 제호 : 불교언론 법보신문
  • 등록번호 : 서울 다 07229
  • 등록일 : 2005-11-29
  • 발행일 : 2005-11-29
  • 발행인 : 이재형
  • 편집인 : 남수연
  • 청소년보호책임자 : 이재형
불교언론 법보신문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는 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