⑬ 인간관-Ⅰ
⑬ 인간관-Ⅰ
  • 법보신문
  • 승인 2005.11.15 1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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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법은 인연따라
화합한 것이기에
별다른 성품이 없다
불성의 실체는 일심…일심의 성품은 중도
주체-환경이 교차하는 그 전체가 바로 ‘나’


<사진설명>원효대사가 주석하면서 정진했던 부안 개암사.

불교는 부처님의 가르침이고, 그 핵심은 연기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연기를 보는 자 그는 법을 본다. 법을 보는 자 그는 연기를 본다.’고 말했습니다.

부처님과 그 제자들은 연기의 공식에 의해서 모든 문제를 생각했습니다. 원효도 역시 그랬습니다. 인간은 오온가화합(五蘊假和合)입니다. 온(蘊)이란 요소라는 뜻입니다. 색(色), 수(受), 상(相), 행(行), 식(識) 중 색은 물질적 요소인 육체, 수는 느끼는 작용, 상은 표상작용, 행은 의지적 작용, 식은 의식작용입니다.

삶이란 오온의 조합이며, 정신적 물질적 에너지의 조합입니다. 이것들은 끊임없이 변화합니다. 마음도 변하고, 사랑도 변하고 다 변합니다. 그것은 매순간 태어나고 또 죽습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오 비구여, 오온이 생겨나고 부패하고 사라지는 매순간, 너희들은 태어나고 부패하고 사라지는 것이니라.’

인간은 오온가화합이되, 오척의 신체와 거기에 깃든 마음만이 아니고, 세계 전체가 자기가 됩니다. 주체와 환경이 교차하는 그 전체가 진실한 자기인 것입니다. 정신의학계의 설명에 의하면, 환경세계란 자연환경, 대인관계 환경, 신체환경 등입니다. 따라서 자기가 사는 물리적 환경이나, 자기가 맺고 있는 대인관계나, 자신의 신체가 모두 자기입니다. 자기 주체인 마음과 자기 환경인 이 세계가 분별되어서는 안 되는 무분별지인 것입니다.

어떻게 자기는 일체의 환경과 교차하고 교감하는 걸까요? 상응부경전에서는 일체에 대해 이렇게 설하고 있습니다.

비구들이여, 무엇을 일체라고 하는가? 눈과 물체(의 현상)이니라. 귀와 소리이니라. 코와 향기이니라. 혀와 맛이니라. 몸과 촉감이니라. 마음과 그 대상(法)이니라. 만일 어떤 사람이 있어, 이 일체 이외에 다른 일체가 있다고 말한다면, 연설일 뿐이며, 물음에 대해서 대답을 할 수가 없으리라.

우리는 이렇게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환경세계와 만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모든 존재는 중중무진(重重無盡)의 인연으로 연기하고, 이를 화엄(華嚴)에서는 ‘하나 안에 일체가 있고 일체 안에 하나가 있으며, 하나가 일체이며 일체가 곧 하나(一中一切多中一 一卽一切多卽一)’라로 설명합니다. 우리 이 작은 몸도 분해해보면 수억만 개 은하계만큼이나 많은 세포로 둘러싸여 있습니다. 이 몸뚱이 속에 우주가 포함돼 있는 것입니다. 피 한 방울도 뽑아서 몸 속에 녹아있는 모든 것을 분석해낼 수 있는 것이 그 속에 모든 게 녹아있기 때문입니다. 우주가 우리를 받아줄 때 우리 또한 우주를 바라보고 있습니다. 이렇게 합일되는 것입니다. 물론 공간적으로도 시간적으로도 무진연기(無盡緣起)합니다. 모든 존재는 다양한 조건에 상호의존하기에 조건의 변화에 따라 각기 변화하고, 스스로 독립하여 존재할 수 있는 성품, 곧 자성(自性)이 없습니다. 그렇다고 어떤 존재도 도무지 없다는 것이 아니라, 그 존재의 자성이 없다는 것입니다.

예술을 하시는 분들이 화엄철학을 공부하면 참 좋겠다는 생각을 간혹 하고는 합니다. 비디오아트 하시는 백남준 선생 있지 않습니까? 그 분의 작품을 보면 참 재미있습니다. 작품을 통해 시간과 공간이라는 것들을 한꺼번에 움직일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니까요. 그런데 안타깝게도 제목이 영 엉망입니다. ‘다다익선(多多益善)’이 뭡니까. ‘일중일체다중일’ ‘중중무진’ 뭐 이런 식으로 이름붙이면 얼마나 멋지겠습니까?

화엄은 어마어마하게 큰 것을 이야기하면서도 반대로 극도로 세밀한 것에 대해서도 동시에 말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크고 작은 것이 동시에 있다는 점은 원효도 많이 닮아있습니다. 원효에는 공자의 모습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공자는 지나치게 현실적입니다. 그러다보니까 장자의 멋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장자는 현실에서 늘 한 발자국 떨어져 있습니다. 그러나 원효는 다릅니다. 현장 속으로 뛰어들면서도 얽매이지 않고 무애로 뛰쳐나가잖습니까? 공자와 장자의 장점을 동시에 갖고 있는 걸출한 인물인 것입니다.

『본업경(本業經)』에는 일체법(一切法)을 명료하게 알지 못하는 것을 무명(無明)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원효는 『삼매론』에서 ‘한 법계라는 것은 이른바 일심’이라고 했습니다. 또 『열반종요』에서 ‘일심을 불성이라 이름 한다’라거나 ‘불성의 실체는 바로 일심이며, 일심의 성품은 모든 극단에서 벗어나 있다.’ ‘십이인연을 불성이라 이름하고, 불성은 곧 제일의공(第一義空)이며, 제일의공을 중도라 이름하고, 중도는 곧 불(佛)이라 이름하고, 불을 열반이라 이름 한다.’고 했습니다. 얼핏 어려운 것 같지만 결론은 불성이라는 게 곧 연기라는 겁니다. 깨달음의 핵심은 연기이지만 연기이기 때문에 거꾸로 어떤 핵심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핵심이 없는, 알맹이가 없는 것을 말로 표현해 전달하기 어려우니까 억지로 이름 붙여 일심이라고 이름 붙였을 뿐이라는 겁니다.

그렇기에 불교에서는 신이라든지 궁극적인 실체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궁극적인 고정불변의 진리도 아닙니다. 물론 불교에서도 실제(實際)라는 용어를 쓴다. 그러나 그것은 중도입니다. 일심에 진여와 생멸의 두 문이 있다는 것도 일심이 어떤 실체가 아님을 알게 합니다. 그런데 일심이 왜 일법계(一法界)일까요? 원효는 깊은 산속의 샘물이 큰 바다와 같고 하나의 티끌이 시방세계와 같다고 말했습니다. 의상도 ‘한 티끌 속에 우주가 들어앉아 있다(一微塵中含十方)’고 노래했지 않습니까? 이로 보면, 일심과 법계는 같습니다. 그리고 일심의 원천은 이미 바다와도 같은 것입니다. 원효가 ‘마음의 바다(心海)’라고 한 것은 이 때문입니다. 이 또한 중중무진(重重無盡)의 바다인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자아나 영혼은 어디에서도 발견되지 않으며, 그러한 실체가 있다고 믿는 것은 어리석다고 명백하게 밝히셨습니다. 연기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영혼이 없다고 하면 허전해하고 불안해합니다. 이게 곧 무명입니다. 고정관념을 깨고 나면 참으로 자유롭습니다. 아무 것도 없는 영혼을 붙잡고 헤매면 이 얼마나 고달프겠습니까? 탁 놔버리십시오. 그러면 편해진다고 부처님께서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원효도 『이장의』에서 분명한 어조로 ‘오온법(五蘊法)을 떠난 외에 신(神)이나 나(我)는 없다(離蘊法外 無神我故).’고 말했던 것도 이렇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리고 원효는 또 말했습니다.

모든 법은 인연을 따라 화합한 것이기 때문에 별다른 성품이 없다. 마치 수레는 멍에채와 바퀴살과 덧바퀴 등이 화합하여 된 것이기 때문에 수레라는 것이 다로 없는 것처럼 사람도 그와 같아서 오중(五衆, 오온)이 화합한 것이기 때문에 사람이라는 것이 따로 없다.(『대혜도경종요』)

이렇다고 허무한 것도 아니고 사람이 없다는 것도 아닙니다. 그저 가합해서 이렇게 70~80년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원효의 이 말을 잘 새겨야 합니다. 이걸 정말 알게 되면 매사에 우리 행위가 얼마나 어리석게 살아가고 있는지 알 수 있을 겁니다. 부모님을 땅에다 묻고 그 땅 밑에 우리 부모님이 계시다고 생각합니다. 따지고 보면 헛된 집착이고 무지일 뿐입니다. 그러나 집착할 것도 없이 훌훌 태워버리면 얼마나 자유롭겠습니까? 이런 문제는 인생관이나 종교관, 또 오랜 관습과 직결돼 있기 때문에 간단치 않습니다. 저도 이렇게 말은 하고 있지만 집에 가서 형님들한테는 절대 이런 말 안합니다. 제가 막내인데 이런 말 하면 뭔 쓸데없는 소리하느냐고 괜히 욕만 먹고 말겠지요. 그래도 진실은 이겁니다. ‘나’도 없고 ‘신’도 없다는 것.

마음은 얻을 수 없다. 그러니 어찌 마음이 만들어 낸 색신(色身)이 있다고 하겠는가. 몸과 마음이 없으니, 어찌 내가 있다고 하겠는가. 또한 마음이 있지 않으니, 인과도 또한 없는 것이요(因果亦空), 인과가 없으니 십이지(十二支)도 없는 것이며, 그렇다면 더욱 만드는 자(作者)나 받는 자(受者) 등이 있을 수 있겠는가.(『금강삼매경론』)

인간은 범부도 성인도 될 수 있습니다. 누구에게나 불성이 있기에 성불할 수도 있고, 중생으로 악순환할 수도 있습니다. 물론 대승불교에서는 보살이라는 이상적 인간상을 설정하기도 합니다.

『기신론』에서는 일심을 진여문과 생멸문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원효는 이를 이렇게 이해합니다. 즉 일심법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는데 첫째는 물들지 않으면서 물드는 것이고, 둘째는 오염되었으면서 오염되지 않는 것입니다. 오염되었으면서 오염되지 않는 것이란 일미의 적정을 뜻하고, 오염되지 않으면서 오염되는 것이란 육도에서 표류하며 떠도는 것입니다.

원효가 『기신론별기』에서 ‘생멸하지 않는 마음이 무명의 바람으로 인하여 움직여서 생멸이 있게 되므로, 따라서 생멸하는 마음을 생멸하지 않는 마음에 의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생멸하지 않는 마음과 생멸하는 마음의 심체(心體)에 둘이 있는 것은 아니다.’라고 했던 것도 이렇기 때문입니다.

정리=이재형 기자 mitra@beop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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