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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3 김부전 보살(1920∼1973)

기자명 법보신문

자비희사 실천한 보살

1973년 11월 18일 입적
효봉 스님과의 인연으로
무소유 실천 원력 세워
사재로 법련사 건립


“아끼고 탐냄은 삼독의 하나이니 업으로 인해서 괴로운 과보를 받게 되고, 보시는 육바라밀 중에 으뜸이니 선업의 근본으로 복락을 누리게 된다.(중략) 여기 남달리 신심이 견고하고 희사를 좋아하는 장한 청신녀(淸信女)가 있으니 그가 곧 법련화 김부전 여사이다.” (송광사 김법련화 공덕비 중에서)

법련화 김부전 보살은 그의 공덕을 기리는 탑에 언급돼 있는 것처럼 희사를 좋아하는 인물이었다. 50∼60년대 복지시설이 미약한 시절, 불교계 최초로 불교양로원과 보육원을 설립해 갈곳 없는 노인들과 부모 잃은 아이들의 보금자리를 마련해주었는가 하면 자신이 평생 모은 사재를 털어 송광사 서울 분원인 법련사가 건립될 수 있게 한 장본인이었다.

1920년 11월 17일 황해도에서 태어난 김부전 보살은 1940년 금강산 정양사에서 열린 한 법회에 참석하면서 일생의 대변환을 맞이하게 된다. 그가 평생을 의지 처로 삼았던 불법(佛法)을 처음 접하게 된 것이다.

출가보다는 재물을 모아 불교 발전을 위한 밑거름이 되겠다는 서원을 세운 김부전 보살은 1951년 서울 도봉산에 불교양로원 설립을 시작으로 53년 의정부에 광명보육원을 건립했으며 양주 흥국사 중창불사에 대시주자로 나서는 등 일제시대 이후 황폐화된 불교를 재건하는 데 몸을 아끼지 않았다. 57년 여성의 몸으로 서울 국제극장을 운영하는 사장의 자리에 오르는 등 사업에 있어서도 남다른 성공을 이룬 보였던 김 보살은 이 무렵 그의 인생에 있어 또 한번의 일대 전환기가 될만한 사건을 맞이하게 된다. 그녀가 평생 마음의 스승으로 섬겼던 효봉 스님을 친견한 일이었다.

50년대 후반 친일불교의 잔재를 청산하겠다는 명목으로 시작된 비구·대처승간의 분쟁을 수습하기 위해 서울을 찾은 효봉 스님을 만난 김 보살은 혼란 속에서도 구도정신을 놓치지 않았던 스님에게 크게 감복했다. 특히 ‘수행자는 될 수 있는 한 가난해야 하며, 물건을 적게 가져야 조촐한 기쁨을 누릴 수 있다’는 스님의 무소유 가르침을 받은 김부전 보살은 이후 자신이 모은 재산을 불교와 사회를 위해 나누겠다는 원력을 세우고 적극적인 신행활동을 전개했다. 이후 조계종 전국신도회 부회장, 서울 선학원에 마야부인회 회장 등 각종 신행 단체의 대표직을 맡으면서 각종 불사에 자신이 모은 재산을 보시하는 일에 앞장섰다.

김 보살의 보시행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김 보살은 구산 스님을 도와 송광사 중창 불사에 앞장섰으며 국제극장 등 자신의 모든 재산을 털어 법련사 부지를 무상 기증하고 ‘불일장학회’의 전신인 ‘부전장학회’를 설립하는 등 한국불교의 크고 작은 불사에 관여했다.

평생을 독신으로 한국불교를 재건하는 데 누구보다 앞장섰던 김부전 보살은 1973년 11월 18일 향년 54세로 입적했다.

권오영 기자 oyemc@beop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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