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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앙코르와트의 빛과 그림자

기자명 법보신문

인류 최고의 유적
뜨거운 불심의 증거인가
민중탄압의 표상인가

<사진설명>앙코르와트라는 거대한 유적지에 들어서면 인간이 그 위대한 유적을 빚었다는 사실에 어지럼증이 느껴진다.

‘웅장하면 정교할 수 없고 정교하면 웅장할 수 없다.’
이건 건축문화를 다뤄온 전문가들이 흔히 말해왔던 바다.
‘힘을 지닌 놈은 날카로운 발톱이 없다.’
이건 짐승들을 연구해 온 전문가들이 해왔던 말이다.
이를테면 쌍극(雙極)이 한 몸에 어우러지기 힘들다는 뜻이기도 하고, 달리 보면 세상에 그런 완벽함이 없다는 뜻이 아닌가도 싶다.

이런 말들을 들으며 고개를 끄덕여왔던 나는 앙코르와트(Angkor Wat) 앞에서 건축의 논리도 자연의 이치도 모조리 흔들리고 말았다. 하늘을 가리는 거대한 건축물에 칼날로 빗어 놓은 예리함은 사람이 지닌 보편적인 상식과 너무 먼 거리에 있었던 탓이다.
1990년대 초, 민주캄푸치아(크메르루즈)와 캄보디아 정부군이 전쟁을 벌이고 있던 판에 처음 그 앙코르와트로 들어섰던 나는 감히 범접할 수 없는 그 ‘웅장하면서도 정교한’ 예술 앞에서 큰 혼란을 느꼈다. 앙코르와트 3~5km 사방으로 전선이 형성되어 있던 탓에 심심찮게 날아들던 총탄도, 유적지를 뒤덮었던 지뢰밭도 더 이상 나의 취재거리가 아니었다.
나는 지뢰밭을 기어 다니며 그 앙코르와트를 끝없이 의심했다. ‘대체 인간의 한계가 어디일까?’ ‘이런 예술적 계산이 누구로부터 나왔을까?’그러다가 느닷없는 분노가 치밀기도 했다. ‘누구를 위한 짓인가? ’‘이 거대한 물체를 만들고자 얼마나 많은 이들을 희생시켰을까?’
사람 그림자 하나 없던 전쟁터라는 특수한 상황 속에서 본 앙코르와트는 내게 특별한 존재로 다가왔다. 하여, 나는 내 기억을 의심하며 그 뒤 여러 번 앙코르와트를 찾았지만, 때마다 그 앙코르와트는 똑같은 모습으로 다가왔다. 내게 앙코르와트는 변함없는 경악과 혼란이었다.

자, 그렇다면 앙코르와트가 캄보디아 사람들에게는 어떤 의미일까?
시하누크 전 국왕이 “앙코르와트는 캄보디아 전체와도 바꿀 수 없는, 우리들에게는 대물림 해 온 영혼 같은 것이다”고 했던 말을 되새겨 볼 만하다. 그이 말마따나, 캄보디아 사람들에게 앙코르와트는 정신이고 역사며, 또 삶과 죽음을 포함하는 현실로 각인되어 왔다. 배운 자 못 배운 자, 가진 자 그렇지 못한 자 가림 없이 모두에게 공평하게 자리 잡은 민족의식 같은 것이기도 하고.
그런 앙코르와트는 캄보디아 국기에도 고스란히 담겨있다. 사원을 국기에 담은 유일한 나라가 바로 캄보디아다. 따지고 보면 국기 뿐만도 아니다. 민주캄푸치아를 비롯한 캄보디아의 모든 정파들이 이념과 상관없이 자신들을 상징하는 깃발에 어김없이 앙코르와트를 담아왔다.
이건 앙코르와트를 갖지 않고는 캄보디아 정치에서 합법성도 정당성도 얻을 수 없다는 뜻이고 따라서 모든 정파들은 앙코르와트를 확보하고자 사력을 다했다. 그리하여 캄보디아 역사는 늘 앙코르와트를 차지했던 이들의 손을 들어주었다.
말하자면, 9~13세기를 통틀어 오늘날 타이 동북부, 라오스, 베트남 남부를 비롯해 말레이시아 일부까지 거느리며 인도차이나반도의 주인공으로 빛나는 역사를 건설했던 크메르제국(Khmer Empire)의 영광을 물려받은 캄보디아 사람들에게 앙코르와트는 자신들의 정체성을 확인하는 가장 중요한 도구였던 셈이다.

이렇듯 캄보디아 민족주의를 대변해 온 앙코르와트의 정체는 과연 무엇이었을까?
9세기 무렵 모습을 드러낸 크메르제국의 왕들은 자신과 힌두신을 일치시켜 현세에서 ‘신왕(神王)’을 꿈꾸며 인도차이나반도 최대 도시였던 앙코르에 대형사원들을 건설하기 시작했다. 그런 가운데 수랴와르만 2세는 힌두 신들의 고향이자 우주의 중심이라는 메루산(Mt. Meru)의 다섯 봉우리를 본 떠 만든 앙코르와트을 비슈누(Vishnu)신에게 봉헌한 것으로 알려져 왔다. 그렇게 크메르제국의 왕들이 자신을 위한 대형 사원을 축조하는 과정에서 민중들은 과중한 세금에다 강제노동에 시달렸다.
그러다가 12세기 들어 크메르제국은 상좌부불교가 세력을 넓혀가면서 자야와르만 7세(King Jayavarman VII)를 비롯한 이 전 왕들이 믿었던 힌두나 대승불교와 서서히 결별하기 시작했다. 당시 대승불교가 대형 사원에서 살아가는 왕과 귀족 그리고 성직자들만을 위한 종교로 민중들에게 고통을 강요했다면, 상좌부불교는 성직자들이 농가에 조촐한 집을 짓고 민중들과 함께 살면서 단순한 생활방식을 외쳐 큰 호응을 얻었다고 전해진다. 그렇게 검약과 명상을 가르치는 상좌부불교에 영향을 입은 민중들이 세금과 강제노동을 거부하기 시작했고, 동시에 민중들은 쇠잔해가는 지배자와 귀족들에게 불만을 품고 반발하기에 이르렀다. 그로부터 결국 앙코르의 대형건설사업도, 크메르제국도 빛을 잃어갔다.

이처럼 한 민족의 빛나는 상징성과 가혹한 민중탄압사를 함께 지닌 앙코르와트는 끝나지 않은 인도차이나 반도 충돌사에 여전히 폭발성을 지닌 ‘위험한’ 물체로 다루어지고 있다. 그 좋은 본보기가 바로 2003년1월29일 캄보디아 수도 프놈펜 주재 타이대사관 방화. 폭동사건이 아니었던가 싶다.
사연은 이렇다. 캄보디아에 수많은 팬을 거느린 한 타이 여배우가 “앙코르와트를 타이에 넘겨줄 때까지는 절대로 캄보디아 땅에 발을 들여놓지 않겠다고 떠벌였다”는 소문이 나자 분노한 캄보디아 젊은이들이 타이대사관을 불질렀고, 맞선 타이 정부가 군사를 동원한 보복을 다짐하면서 일촉즉발 위기로 치달았다. 〈사진 하단〉
그러자 놀란 그 배우가 “절대로 그런 말을 한 적이 없다”고 잡아뗐으나, 사실은 그 폭동이 일어나기 2년 전쯤 한 방송 드라마에서 그이가 그런 대사를 읊었던 것으로 확인되었다.
2년이 지난 방송 대사 한마디를 놓고 벌어진 그 사건이 비록 정치적 배경을 지녔다고 치더라도, 캄보디아와 타이 시민들 사이에 패인 골 깊은 적개심이 표출되었다는 점에서 심각한 사태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그 무렵, 타이 역사학자 찬윗 카셋시리교수는 “타이정부가 지나친 민족주의를 강요했고 동시에 비교적 우월한 경제력을 지닌 타이 시민들이 이웃 캄보디아를 무시하면서 벌어진 일이다”고 진단했다.
반대쪽에선 크메르제국의 영광을 먹고 살아 온 캄보디아 시민들이 자신들의 유일한 자존심인 앙코르와트를 건드린 타이에 대해 전통적인 증오심을 폭발시킨 사건이었다. 캄보디아 정부는 ‘앙코르와트 민족주의’를 내건 그 방화사건을 오히려 사회통합을 이룬 값진 쾌거라 여기기까지 했다.

유네스코(Unesco)가 세계 7대 불가사의 가운데 하나로 꼽는 이 문화유산 앙코르와트, 이 찬란한 예술품은 그렇게 양면성을 지닌 물체로 우뚝 서있다.
‘앙코르와트 어떻게 볼 것인가?’
이제 이 화두는 세계시민사회로 넘어왔다.

한겨레21 아시아네트워크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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