⑮ 인간관-Ⅲ
⑮ 인간관-Ⅲ
  • 법보신문
  • 승인 2005.11.29 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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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 밖에 법 없으니 어찌 따로 법을 구하리”
오랜 악업으로 인한 근본무명이 윤회 원인
인간은 매일 천상-지옥 오가는 윤회의 존재


<사진설명>원효는 위대한 사상가이자 종교인이었으며 동시에 수 많은 책을 남긴 저술가이기도 하다. 그림은 「화엄연기」 중 원효가 저술작업에 몰두하고 있는 모습.

지난 시간에는 인간을 해탈로 이끄는 진여훈습에 대해 말씀드렸습니다. 그러면 오늘은 우리가 윤회에서 벗어나지 못하도록 하는 염법훈습(染法薰習)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이것은 말 그대로 더러움에 물들어가는 훈습입니다. 오늘 누구를 만났는데 만약 그 사람이 내 곁에서 담배를 계속 피워댔다면 내 옷에도 그 냄새가 배이고 집에 돌아가서까지 담배냄새를 가족들에게 풍길 것입니다. 어떤 행위든 그 순간에서 끝나는 게 아닙니다. 어떤 형태로든 반드시 이어지죠. 그래서 염법훈습을 중생의 유전(流轉)이라고도 합니다. 유전이라는 말은 발 한 번 삐끗 잘못 내디디면 멈추지 않고 굴러 떨어지는 그런 걸 의미합니다.

무명이 있어서 진여를 훈습한다는 것은 근본무명의 훈습을 뜻합니다. 하수구에서 더러운 물이 콸콸 쏟아져 나와 한강에 흘러드는 것을 연상해 보십시오. 그 폐수가 깨끗한 한강물에 섞이면 탁하게 되고 깨끗한 물과 더러운 물을 더 이상 구별을 할 수 없게 됩니다. 이런 점에서 근본무명은 기독교의 원초적인 죄악과 비슷할 수도 있습니다. 오랫동안 고약한 짓을 해왔기 때문에 그 속에 지독한 습기로 남아있는, 그래서 근본적으로 다 밝지 못한 게 분명 있다는 겁니다. 그런 근본무명이 있어서 훈습한다는 거죠.

깨닫지 못했으니까 지혜롭지 못하고 지혜롭지 못하니까 연기법을 알지 못해 망심이 일어납니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있는 것을 있는 그대로 보라고 말합니다. 왜곡시키지 말라는 겁니다. 원효는 『금강삼매경론』에서 ‘일체 유정은 시작도 모르는 그 옛날부터 무명의 기나긴 밤에 들어가 망상의 큰 꿈을 꾸고 있다’고 말합니다. 우리네 인생 자체가 망상의 큰 꿈이라는 거죠. 그러면 어떻게 해야 그 꿈을 깰 수 있을까요? 원효는 ‘모든 망상이 무시(無始)로 유전하는 것은 오직 상(相)을 취해 분별하는 병 때문이다. 이제 그 흐름을 돌려 근원으로 돌아가게 하려면, 먼저 반드시 모든 상을 부수어 버려야 한다.’고 처방하고 있습니다.

원효는 또 이렇게 말합니다. ‘중생이 오래 생사의 바다에 빠져 열반의 언덕에 나아가지 못하는 까닭은 다만 의혹과 삿된 집착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제 하화중생의 요체는 의혹을 제거하고 삿된 집착을 버리게 하는 것이다.’라고 말입니다.
그런데 왜 마음의 바다에는 물결이 일고 사람들은 그 물결 따라 표류하는 걸까요? 원효의 말을 음미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대승의 법은 오직 일심(一心)이 있을 뿐 일심 이 외에 다시 어떠한 법도 없다. 다만 무명이 자신의 마음을 미혹시켜 모든 물결을 일으켜 육도에 유전케 되는 것이다. 그러나 비록 육도의 물결이 일어나도 일심의 바다를 벗어나지 못한다. 진실로 일심의 움직임으로 말미암아 육도가 전개되는 것이다.(대승기신론소별기)

지혜롭지 못한 망령된 바람이 마음의 바다를 요동치게 합니다. 이 중에 가장 무서운 바람이 욕심, 성냄, 어리석음 삼독의 바람입니다. 육도란 지옥, 아귀, 축생, 수라, 인(人), 천(天) 등 여럿 갈래 나쁜 길(六惡趣)을 말합니다. 흔히 많은 스님들이 육도윤회를 영혼의 윤회로 이해하고 설명합니다. 당신은 전생에 개였고, 당신이 죽으면 어떻게 되고 그러지 않습니까. 하지만 원효는 그렇게 설명하지 않습니다. 원효는 이를 육도의 물결이 일심의 바다를 벗어나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참 대단하지 않습니까.

한번 화엄적으로 생각해봅시다. 어머니 배속에서 나온 것만 태어난 게 아니고 땅 속에 묻히는 것만 죽는 게 아닙니다. 우리는 찰나찰나 태어나고 죽는 것을 끊임없이 반복하고 있습니다. 가만히 생각해보세요? 잘못한 게 있으면 순간순간 내 마음이 지옥이 되기도 하고, 많이 가지고도 배고파서 온갖 것을 투기하고 남의 것까지 빼앗으려는 사람들, 이게 아귀지 뭡니까? 내 마음이 싸움터가 될 때는 아수라가 따로 없고, 때때로 욕망만 좇다보면 짐승보다 못한 존재가 되기도 합니다. 반대로 좋은 일이 있으면 천상에 있는 것처럼 즐겁기도 합니다. 이것이 하루하루 순간순간 진행되고 있는 육도윤회입니다.

인간이라는 게 엄청 잘난 것 같지만은 엄청 구린 겁니다. 삼일만 굶어도 얼굴이 시뻘개져서 남의 담 넘는 게 사람입니다. 실존적으로 봐야지 관념적으로만 말하면 안 됩니다.

그러면 인간은 왜 이렇게 여러 나쁜 상황을 떠돌아야 할까요? 악순환하며 고통 받아야 할까요? 결론은 무시(無始) 이래로 무명의 습기 때문입니다. 원효는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들은 한결같고 실다운 삼보의 허물없는 장소에 같이 있으면서 보지도 듣지도 못하여 귀머거리 같고 장님 같으니, 불성이 없는 것인가. 어째서 이와 같은 것인가. 무명이 뒤바뀜으로 망령되게 밖의 경계를 일으키고 나와 나의 것이라 집착하여 갖가지 업을 지어 스스로가 덮고 가리어 보지도 듣지도 못함이 마치 아귀가 물을 불이라고 보는 것과 같다.… 중생의 육근(六根)이 일심을 따라 일어난다. 그것은 스스로의 근원을 배반하고 뿔뿔이 흩어져 육진(六塵)을 일으키게 된다. 육정(六情)을 통섭(統攝)하여 일심이라는 본심으로 되돌아가야 한다.

일심은 무명훈습으로 물든 모습을 나타내며, 주관과 객관의 분열이 생기고, 자아의식으로 인해 주위의 사물들을 내 소유로 만들려는 욕심을 냅니다. 그러다가 이루어지지 않으면, 시기하고 질투하며 화내는 등의 죄를 짓고 악순환한다고 이기영 선생께서도 말씀하신 바 있습니다.

그럼 원효는 도대체 무엇을 깨달았을까요? 원효와 의상이 공부하러 중국으로 가잖아요. 그런데 깜깜한 밤에 비는 쏟아지고 오갈 데는 없는데 허우적거리며 비를 피하러 컴컴한 굴로 들어갑니다. 자다보니 목이 너무 말라서 더듬거리며 물을 마셨는데 물맛이 너무 좋았어요. 그런데 아침에 깨어나서 보니 자신들이 잔 곳이 무덤이었고 맛있게 마신 물은 해골에 고인 물이었습니다. 그 순간 원효는 웩하고 구토가 일어났습니다. 원효는 그런 자신의 모습을 보며 번뜩 이런 생각이 스쳐갔습니다. ‘같은 물인데 어제 마실 때는 그렇게 맛있었는데 나는 지금 왜 구토를 하고 있는가? 아하, 이게 모두 마음의 작용이구나.’ 원효는 깨닫게 된 것이죠. 그래서 당나라로 가지 않고 신라로 돌아오게 됩니다. 『송고승전』에서는 원효가 깨치던 순간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마음이 일어나니까 가지가지 것들이 다 생겨나고 마음이 소멸하니까 집과 무덤이 둘이 아니구나. 삼계(三界)가 오직 마음이요, 만법이 오직 인식인 것을 마음 밖에 법이 없으니, 어찌 따로 법을 구하겠는가?(心生故種種法生 心滅故龕墳不二 三界唯心 萬法唯識 心外無法 胡用別求)

원효는 또 사복의 어머니를 장사지내면서 “태어나지 말지어다, 죽는 것이 괴롭구나! 죽지 말지어다, 태어나는 것이 고통스럽다!”(莫生兮 其死也苦! 莫死兮 其生也苦!)라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여기서는 생사라는 단어가 아주 중요합니다. 끝없이 죽고 사는 것, 그것이 윤회이기 때문입니다. 원효의 저서인 『기신론소기회본』에도 깨달음과 연결 지어 볼 수 있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습니다.

삼계는 거짓된 것이요, 오직 마음이 지은 것이니, 마음을 여의면, 육진의 경계가 없어지는 것이다. 이 뜻은 무엇인가? 일체법이 모두 마음으로부터 일어나 잘못 생각하여 생긴 것이어서 일체의 분별은 곧 자심(自心)을 분별하는 것이니, 마음은 마음을 보지 못하여 상(相)을 얻을 만한 것이 없기 때문이다. 세간의 모든 경계는 다 중생의 무명망심에 의하여 머물러 있게 되니, 이러므로 일체 법은 거울 중의 형상과 같아서 실체를 얻을 만한 것이 없고, 오직 마음일 뿐, 허망한 것임을 알아야 한다. 왜냐하면, 마음이 생기면, 갖가지 법이 생기고, 마음이 없어지면 온갖 법이 없어지기 때문이다.

원효가 말하는 이때의 마음은 무명의 힘에 의하여 움직이는 깨닫지 못한 망령된 마음(不覺心)을 말합니다. 동요하는 마음이며, 분별하는 마음이며, 흔들리는 마음입니다. 마음의 동요는 자신이 일으킨 것입니다. 이를 원효는 일체의 분별은 곧 자심(自心)을 분별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자신의 생각을 대상에 투사한 것입니다. 투사란 무의식적으로 자신의 정신적 내용을 대상에 전이(轉移)하여 그 자신의 정신적 내용이 마치 그 대상에 속하는 것처럼 생각하는 착각현상인데, 이로 인해 애증의 감정 관계가 일어나고 여러 갈등의 원인이 된다고 합니다.

원효가 해골 물을 보고 구토했던 것도 해골 물은 더럽다고 생각하던 자신의 선입관을 투사했을 뿐이지 그 물은 어제 저녁에도 오늘 아침에도 같은 것이었습니다. 동요하는 마음, 지혜롭지 못한 무명의 힘에 이끌려 자기중심으로 생각하고 이를 대상에 투사해서 자신의 마음대로 속단한 뒤에 잠 못 드는 밤을 불러오는 어리석음을 그쳐야 합니다.

얼마 전 끝난 ‘불멸의 이순신’을 보면 거센 파도가 이는 바다에서 전투를 하는 장면이 많이 나옵니다. 그런데 정말 파도가 움직이는 게 아니라 배를 묶어 놓고 카메라를 상하로 움직이며 촬영하면, 마치 배가 파도에 흔들리는 것처럼 보이는 효과가 있다고 합니다. 내 마음이 흔들리면 대상이 흔들려 보입니다. 투사를 거두어 드리는 노력, 이것을 불교에서는 지(止)라고 합니다.

정리=이재형 기자 mitra@beop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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