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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원찰 영수암 복원한 날[br]눈물 걷고 맘껏 웃어 보리라

기자명 법보신문

군 포교 선도 혜광 이 재 성 거사

보살은 비심(非心)으로 보시에 전념해 재물이 없을 경우라도 남이 구걸하는 것을 보면, 차마 말하지 못하고 눈물을 떨군다. 괴로워하는 사람을 보고도 눈물을 흘리지 않고서야, 어찌 수행하는 사람이라 할 수 있겠는가?
보살의 눈물에는 세 경우가 있다. 첫째는 공덕을 닦는 사람을 보면 사랑하고 존경하는 까닭에 눈물을 흘린다. 둘째는 괴로움 받는 중생의 공덕 없는 자를 보면 가엾이 여기는 까닭에 눈물을 흘린다. 셋째는 큰 보시를 행할 때에 비희용약(悲喜踊躍)하여 또한 눈물을 흘린다. 보살이 떨구는 눈물을 헤아릴 양이면 사방의 바닷물보다도 많을 것이다. (大丈夫論)


11월 20일 논산 육군 훈련소. 일요법회를 맞아 훈련병 3천여명이 법당 앞에 집결했다. 순수 자비로 마련한 던킨 제품의 빵 6천여개와 3천여병의 음료수를 갖고 훈련소를 찾은 이재성씨(71세)는 훈련병들을 보자마자 금방 울먹이는 목소리로 말했다.

“곧 겨울이 닥칠 텐데 얼마나 추울까! 벌써 집이 그리울 텐데.....”

한국전쟁 겪고 ‘통일발원’

군 관계에 몸담고 있는 사람이라면 한번쯤 이재성 거사를 만났을 만큼 그는 군 포교에 열정적인 활동을 지난 10여 년간 펼쳐왔다. 인천에 거주하고 있는 관계로 경기도와 강원도에 집중적인 군 포교를 지원해왔으나 실상 그의 포교와 봉사, 보시 실천은 이미 20대 젊었을 때부터 시작됐다. 아니 어쩌면 10대라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서울의 한 불교집안에서 태어난 그는 부모님 덕(?)에 큰 스님을 일찌감치 친견하며 자연스럽게 불심을 키워갈 수 있었다. 당시 전국의 유수 사찰을 순례했지만 그는 지금도 일곱살의 유년기 때 탄허 스님과 청담 스님 무릎 위에 앉아 재롱을 떨었던 기억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어린 불심은 초등학교에 입학해 여러 친구들과 어울리며 피어나기 시작했다. 점심을 준비하지 못한 친구들에게 자신의 도시락을 나누고, 부모님으로부터 받은 장난감이나 연필 몇 자루도 친구들 손에 들려주었다. 심지어 그는 쌀과 그릇, 농기구를 놓아두는 광에 몰래 들어가는 일이 다반사였다고 한다. 쌀 도가니에서 고사리 손이지만 한웅큼씩 쌀을 퍼내 다음날 친구들에게 주었던 것이다.

“보릿고개 시대였지만 그래도 저는 친구들보다 나은 가정형편 속에 살았어요. 굶고 있는 친구를 보면서 도저히 제 도시락을 먹을 수 없었고… 부모님한테는 기회만 되면 연필이며 공책 사달라고 생떼를 부려 기어코 얻어 내 친구들과 나눠썼지요.”

그러나 그도 한국전쟁이라는 역사의 질곡 앞에서 분단의 비탄을 가슴에 안아야만 했다. 총칼에 쓰러져 가는 사람들을 보며 그는 한없는 눈물을 흘려야 했다. 북에 있는 사촌형을 생각하면 어린 나이에도 잠을 이룰 수 없었다고 한다. 유난히도 눈물을 많이 흘리기 시작한 때는 그 때부터였을 것이다. 유년기부터 조계사 부처님 앞에 앉아 있는 것을 좋아했던 그는 한국전쟁 이후 기도를 하기 시작했다.
그의 원력은 ‘남북통일’.

연희전문(연세대학교)을 다닐 무렵인 스물세살 때 그는 탄허 스님과 청담 스님으로부터 각각 법명을 받았다. 월정사와 도선사에서 각각 받았지만 우연하게도 두 스님이 내려준 법명은 한자까지도 똑같은 혜광(慧光). 그 때부터 그는 혜광 거사라는 법명을 가슴에 새긴 채 자신의 기도 원력을 더욱 키워갔다.

대학 졸업 후 미국 유학 비자가 나왔지만 그는 취소했다. 당시 연희전문(연세대학교)에서 경영학을 전공했던 그는 돌연 옷 디자이너로 발길을 돌렸기 때문이다.

“왠지 모르게 옷을 만들고 싶었어요. 바느질 한 번 제대로 해 보지 않았지만 그저 옷을 만들고 싶었고, 돈을 벌어야 한다는 생각뿐이었지요. 내가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어야 더 많은 사람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에서였습니다.”

디자이너 길의 최대 벽은 부모님이었다. 애지중지 하며 대학 보냈는데 이제와 유학길 마저 버리고 옷을 만들겠다 하니 부모에게는 청천벽력이 아닐 수 없었던 것이다. 반대가 거세자 그는 집을 나와 홍천 수타사에서 3개월간 머물며 마음을 다잡았다. 결국 그는 자신의 뜻을 펼치기 위해 인연 있는 사람을 찾아 도움을 청했고, 급기야 명동에 양장점을 냈다. 처음엔 재단사를 두고 시작했지만 그는 독학으로 공부를 해 훗날 손꼽히는 일류 디자이너가 되었다.

인분도 꿀로 알아야 봉사

양장점이 흔하지 않았던 시기인 관계로 그는 많은 돈을 벌었다고 한다. 단 몇 자루의 연필도 친구들에게 주었던 그 심성은 일류 디자이너가 되었음에도 변함이 없었다. 전국의 고아원과 양로원을 찾아가 재정 지원은 물론 봉사활동까지 해냈다. 지금도 그는 치매노인양로원에서 일하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당부한다.

“내 부모 모시듯 모셔야만 합니다. 그 분들이 몸 밖으로 내놓은 인분은 꿀이요, 인분 냄새는 향수라고 느껴야 합니다.”

서울 연희동이 재개발 되기 전인 60년대 그곳은 흔한 말로 ‘달동네’였다. 그는 틈만 나면 그 동네로 달려가 음식을 해 주고 아이들과 노인들을 보살폈다.

“요즘 사람들은 영화나 다큐멘터리를 보고 당시 현실을 안다 하지만 실상은 말할 수 없이 더했지요.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몸에서는 이가 무수히 나오고, 굶주린 아이들의 귀와 입, 무릎에는 이름 모를 종기가 터져나오고.....집에 돌아와도 그 아이들 생각에 잠도 잘 수 없었지....”

수십여년 동안 봉사활동과 보시를 해온 그가 군 포교에 매진하기 시작한 것은 10여년 전이었다. 주거지를 인천 만수동으로 옮기면서 지역 군 포교에 눈길을 돌렸다. 독신으로 살고 있는 그는 지금도 아들이 없다. 그러나 집 떠나 전방에서 고생하는 어린 장병들에게 부모가 되어주고 싶었다고 한다. 그는 빵이나 음료수는 물론 손수 카레며, 짜장이며, 김치, 국 등을 손수 준비해 군부대로 날랐다. 때로는 300명, 때로는 500명, 심지어 설을 맞아서는 1천여명이 먹을 떡국도 끓여 보았다고 한다.

“칠순에 이르니 허리가 자꾸 아파와요. 그래도 전에처럼 5백명 1천명 음식은 못하지만 1,2백명이 먹을 음식 만드는 것은 아직 자신 있지!”

군 포교에 쏟아 부은 돈만으로라도 법당 두 채를 지었을 것이라는 게 그를 잘 아는 도반들의 전언이다. 올해 칠순을 맞으며 그는 손수 미역국을 준비해 연꽃마을을 찾아 노인들과 함께 공양했다. 칠순이 별거냐고 한다. 내 생일날 내가 손수 만든 미역국을 노인들과 함께 공양할 수 있으면 그 자체가 행복이 아니냐고 한다.

욕심이라고는 전혀 없는 칠순의 혜광 이재성 거사에게도 작은 소망 하나가 있다. 지난 2004년 12월 판문점 공동경비구역(JSA) 안에 군법당 영수사를 개원했던 그는 도라산 영수암을 복원 또는 중창하는 것이다. (본지 785호 참조)

영수암은 879년 신라가 패망한 후 고려 태조에게 항복해 개성에 머물고 있던 경순왕을 위해 그의 부인 낙랑공주가 창건한 암자였다. 경순왕은 ‘이곳을 영원히 지키겠다’며 이름을 ‘영수암’(永守庵)이라 하고 매일 산에 올라 신라의 도읍을 바라보며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따라서 산의 이름도 도라산(都羅山)이라고 부르게 됐다.

“영수암에서 통일발원의 목탁소리를 듣고 싶습니다. 그 목탁 소리가 분명 분단 역사의 아픔을 아우를 것입니다. 통일 전에는 통일을, 통일 후에는 우리 국가와 인류의 행복을 기원하고, 타국에까지 와 피 흘렸던 원혼을 천도해야지요.”

장병들의 아버지·어머니

생전에 영수암에서 단 한 번만의 기도라도 올리고 싶다는 그의 눈가에 또다시 눈물이 글썽인다. 왠지 혜광 거사의 어깨가 무거워 보인다. 불교계와 군이 합심하면 금방이라도 풀릴 것만 같은 그의 소망은 언제쯤 이뤄질 수 있을까! 평생 그가 흘린 눈물은 바닷물보다 많지만 그의 소망에 귀 기울이며 눈물 흘려주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아 안타깝기만 하다.

그래도 혜광 거사는 오늘도 석가모니 정근을 하며 자신의 원력을 포기하지 않고 있다.

“부처님 법을 펴는 일이니 언젠가는 될 게 확실합니다. 아직 인연이 익지 않아서이겠지... 한 번쯤 맘껏, 크게 한 번 웃어볼 날이 있을 겁니다.”

인천= 채한기 기자 penshoot@beop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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