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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팔 잃었지만[br]더없이 좋은 法 만나[/br]참 행복 찾았죠

기자명 법보신문

염불행자 혜광 황 규 성 씨

전주시 외곽에 자리 잡은 완산구 삼천동. 널찍한 논밭을 지나 산기슭에 자리 잡은 이곳은 시내라는 말이 머쓱할 정도의 전형적인 농촌이다. 현대화가 비껴간 좁고 굽이진 마을길을 따라 터벅터벅 오르다보면 끝자락께 덩그러니 놓인 집이 나온다. 바로 황규성 씨가 사는 곳이다.

황 씨는 불혹을 훌쩍 넘긴 마흔 다섯 노총각으로 어머니와 단 둘이 산다. 가진 거라곤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손바닥만한 밭떼기와 허름한 집, 거기에 한 팔마저 없는 황 씨지만 요즘 그는 누구보다 행복하다. 어머니의 허리가 비록 깊이 굽었음에도 여전히 정정하고 뒤늦게 시집간 유일한 여동생이 잇따라 예쁜 조카 둘을 낳았기 때문이다. 또 누가 있건 없건 늘 오래된 습관처럼 읊조리는 염불이 황 씨를 깊고 그윽한 행복으로 이끌고 있는 까닭이다.

농사꾼인 황 씨의 하루는 해뜨기 훨씬 전에 시작된다. 새벽 3시 30분이면 어김없이 일어나 향 하나 사루어 올린 뒤 2시간가량 정성껏 독경과 염불을 하고 108배까지 마치고서야 들녘으로 향한다. 지게를 걸머지고 밭으로 향할 때도 ‘나무아미타불’, 한 손으로 삽을 쥐고 억척스레 땅을 팔 때도 ‘나무아미타불’, 무럭무럭 잘 크라며 씨 뿌릴 때도 ‘나무아미타불’, 밭 매고 거름 줄 때도 ‘나무아미타불’ 잘 자라줘 고맙다며 거둘 때도 ‘나무아미타불’…. 지구가 태양을 중심으로 움직이듯 황 씨의 하루일과도 염불을 중심으로 공전한다. 특히 지난해 안방을 염불당으로 꾸민 황 씨는 아침 식사 후에도 이곳에서 염불과 경전독송을 하고 잠자리에 들기 전에도 꼭 염불당에 앉아 기도와 발원으로 하루를 마무리한다.


일타 스님 책 읽고 발심

황 씨가 독실한 염불행자가 된 건 힘겨웠던 그의 지난날과 무관하지 않다. 누구의 삶인들 고난이 없을까만 황 씨의 경우 특히 유별났다. 고등학교 졸업을 한 달 여 앞두고 친구들과 냉수마찰을 한 후 급성폐렴으로 죽음 일보직전까지 가기도 하고, 몇 해 뒤 건널목에서 대형트럭 백미러에 치여 이가 부러지고 혀가 찢겨져 나가기도 했다. 그러나 그의 운명을 뒤바꿔놓은 결정적인 사건은 그의 나이 서른 때인 91년 3월 17일이었다.

갑작스레 친척집에 가야 했던 황 씨는 여느 때처럼 오토바이에 올라탔다. 희미한 헤드라이트 불빛마저 삼켜버리는 칠흑 같은 어둠, 거기에 부슬부슬 비까지 흩뿌리는 밤이었다. 한참을 달려 전주대학 입구를 지날 무렵이었다. 멀리 맞은편에서 달려오는 버스를 피해 황 씨는 핸들을 오른쪽으로 급히 틀었다. 그러나 어쩔 수 없는 운명이었을까. 갑자기 어둠 속에서 거대한 괴물이 불쑥 튀어나왔다. 경륜장 공사를 위해 쌓아놓은 흙더미였다. 황 씨의 오토바이는 흙더미에 세게 부딪혔고 그의 몸은 붕 날아올라 건너편 달려오는 버스 밑으로 내동댕이쳐졌다. 순간 폐렴 후유증으로 은행을 그만두어야 했던 기억과 며칠 뒤 친구와 전기관련 사업을 시작하기로 했던 약속이 스쳐갔다. 또 역마살이 낀 아버지 탓에 과부 아닌 과부가 되어 평생 홀로 농사지으며 자식들을 키운 주름진 어머니의 얼굴이 아프게 떠올랐다. ‘이제 끝이구나. 아! 어머니~’

갑작스런 사고는 그의 왼팔을 앗아가고 꿈까지 짓밟아버렸다. 떨어져 나간 팔과 신경마비로 굳어져가는 나머지 한 팔을 지켜보며 그는 깊은 절망에 빠져들었다. ‘이렇게 살아 뭐하나’ 하는 생각이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고, 하루에도 수십 번씩 죽음의 유혹이 밀려들곤 했다. 그러나 실행에 옮길 수는 없었다. 자신 만을 바라보고 있는 늙은 어머니와 아픈 동생이 끝내 눈에 밟혔기 때문이다.

황 씨는 마침내 죽을 각오로 살기로 결심했다. 아침이면 삽과 호미를 들고 밭으로 향했다. 생핏줄을 잡아당기는 듯한 고통을 참아가며 그는 애써 오른팔을 움직였고, 밤이면 집으로 돌아와 이런 저런 책을 닥치는 대로 읽었다.

‘삶이란 무엇이고 죽음이란 또 무엇인가.’ ‘나는 왜 이런 고통을 겪어야만 하는가.’ 이웃의 끈질긴 권유에 교회에 나가보기도 했지만 궁금증은 커지기만 했다. 단전호흡, 기수련을 오랫동안 했지만 뱃속 밑바닥에서부터 뿜어져 오르는 목마름은 여전히 해소되지 않았다. 황 씨가 불교서적을 읽기 시작한 것은 오랜 방황에 지칠대로 지친 지난 2000년 초였다.


행주좌와에 “나무아미타불”

일타 스님을 비롯해 여러 고승들의 책을 읽으며 그는 참선이야말로 자신에게 참다운 진리를 일깨워줄 것으로 확신했다. 이후 황 씨는 참선수행을 결심하고 이를 배울 수 있는 곳을 수소문했다. 때마침 한 절에서 곡성 성륜사를 추천해주었고 그곳에 연락해보니 안거에 재가자도 참여할 수 있다고 했다. 일찌감치 동안거에 참가신청서를 낸 황 씨는 입방 3개월 전부터 가부좌를 트는 연습과 108배를 시작했다. 행여 선방에 들어가 다른 사람들을 좇아가지 못할까 하는 노파심에서였다. 또 염불과 참선을 병행하면 좋다는 말에 이왕 하기로 한 것 제대로 하자는 각오로 염불도 시작했다.

2001년 음력 10월 15일 성륜사에서 동안거를 맞은 황 씨는 참선과 염불에 자신의 전부를 쏟아 부었다. 특히 그곳에서 만난 선용 스님은 황 씨로 하여금 극락정토는 정말 있으며 간절한 믿음을 갖고 염불하면 나와 주변이 행복해질 수 있다는 확신을 갖도록 했다. 그는 점심, 저녁 시간이면 일찍 공양을 마치고 뒷산에 올랐다. 그곳에서 그는 목이 터져라 ‘나무아미타불’을 불렀다. 부르면 부를수록 가슴 속이 뻥 뚫리는 기분과 함께 내면이 환히 밝아져 옴을 느꼈다. 살아오면서 이런 행복감은 처음이었다. 황 씨가 평생 염불행자의 길을 걷기로 발원한 것도 이때부터다. 더욱이 염불은 어머니와 동생도 쉽게 할 수 있는 수행법이라는 점도 황 씨를 더욱 기쁘게 했다.

안거를 마치고 돌아온 그는 행주좌와 어묵동정 염불이 끊이지 않도록 노력했고 그런 황 씨를 보며 어머니와 동생도 자연스럽게 염불행자가 되어갔다. 황 씨는 또 이듬해 겨울에는 양평 법왕정사를 찾아 한 달 동안 그곳에서 절과 염불수행을 하기도 했다. 특히 불편한 몸으로 3일 동안 1만배를 마친 그는 주지 청견 스님으로부터 혜광(慧光)이라는 법명을 받았다. 법을 위해 과감히 팔을 잘랐던 달마의 제자 혜가 스님처럼 용기가 지혜를 갖춘 수행자가 되라는 격려가 담겨 있었다.


오신채 금하고 안방을 염불당으로

“고난이라는 것에 대해 생각해보곤 합니다. 제가 사고를 당하지 않았다면 이 좋은 불법을 어찌 만날 수 있었겠습니까? 제가 어찌 헛된 탐욕의 굴레에서 벗어나 정토를 꿈꿀 수 있었겠습니까? 저는 한 팔을 잃은 대신 그와 비교도 할 수 없는 참 행복을 찾은 거죠.”

얼마 전 운전면허를 취득한 황 씨는 어머니를 모시고 이곳저곳 절을 참배하고 매월 한 차례 있는 경주 미타사 염불정진법회에도 빠지지 않는다. 육식과 오신채를 하지 않는 것은 물론 만나는 사람들에게 ‘안녕하세요?’라는 말 대신 ‘나무아미타불’이나 ‘극락왕생하세요!’라고 인사를 나누는 황 씨. 그는 진흙탕 속에서 하얗고 해맑게 피어오른 한 송이 연꽃이었다.

전주=이재형 기자 mitra@beop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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