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 자살사례 유형별 분석 : 소녀가장의 자살
80 자살사례 유형별 분석 : 소녀가장의 자살
  • 법보신문
  • 승인 2005.12.13 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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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평등 사회가 소녀가장 죽음 불러
“나는 우습게도 소녀가장이었고, 아버지도 안 계시는 불쌍한 아이였다. 고등학교 입학금조차 없는 가난한 집의 둘째였다. 이런 나에게… 미래가 있을까?” 경기도 평택시 통복동에 사는 정양(중학교 3학년)이 생활고를 비관하는 유서를 남긴 채 자신의 방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은 지난 22일. 어머니 정(45)씨는 “빚을 얻기 위해 밖으로 나갔다가 오후 9시경 돌아와 딸을 불러도 대답은 없고 방문이 잠겨 있었다”며 “잠긴 문을 열고 들어가 보니 딸이 목을 매 숨져 있었다”고 설명했다. 주변 사람들에 따르면, 정양은 이날 학교 선생이 준 음료수를 가지고 와 막내 여동생 희아에게 주면서 “엄마 말 잘 들어, 나 잘 테니까 소리가 나더라도 깨우지 마라”고 부탁한 뒤 방문을 걸어 잠그고 스스로 목을 맸다.

정양은 죽기 직전에 쓴 것으로 보이는 A4용지 다섯 장 분량의 유서를 남겼다. 글쓰기를 좋아했던 이 학생은 유서에 가족과의 갈등, 가난에 대한 절망, 친구에 대한 고민, 꿈에 대한 애착 그리고 어머니와 자매에 대한 사랑을 썼다. 정양은 유서에서 “차라리 고아로 태어났으면 좋았을 걸… 차라리 거리의 풀 한 포기로 태어났으면 좋으련만… 차라리 바람에 휘날리는 모래 한 줌으로 태어났으면 좋으련만… 내게 미래란 보이지 않는다. 태어날 땐 내 의지로 태어나지 못했으니까, 죽을 때라도 내 의지로 할 수 있다면…”

정양은 보증금 200만원에 월세 20만원의 어려운 생활을 해 왔다. 정양은 초등학교 3학년 무렵 소녀가장이 됐다. 정양의 어머니는 그 후로 정부에서 나오는 생계비 60만원으로는 자신의 치료비로도 부족해 4천만원 가량의 카드빚을 지고 있었다. 정양의 아버지는 노숙자 생활을 전전하다 지난 2002년 7월 심장병으로 숨졌다. 정양은 집안의 기대주였다. 그런 만큼 정양은 평소 부채문제와 가족부양 등으로 혼자 감당하기 어려운 중압감을 느끼고 있었다. 이런 가운데 고등학교 진학을 앞두고 입학금 마련 등의 고민을 홀로 감당하면서 심적인 고통이 컸던 것으로 유서에 나타났다.

담임교사 류호석씨는 수경 양이 “학생부장을 하겠다고 손을 들 정도로 적극적인 성격이었으며 친구들과도 밝고 명랑하게 지낸 아이였다. 죽고 난 뒤 수경이의 일기를 읽었다. 절망과 희망으로 갈등하던 수경이가 끝내 어떤 것을 극복하지 못한 것 같다. 수경이가 지난 2월부터 친구들에게 ‘나 죽으면 울어줄래’라고 말했지만 이를 장난으로 받아들였다는 말을 아이들에게 뒤늦게 들었다”고 괴로워했다. 평택경찰서 이칠로 형사는 30일 “한창 꿈을 꾸어야 할 어린 소녀가 돈 걱정에 시달리다 자살한 것도 마음이 아팠지만 유서 내용이 너무 애절해 형사들이 눈물을 흘렸다”며 “소녀의 죽음에 대해 이 사회는 아무런 책임이 없는지 묻고 싶다”고 답답해했다. 열린교실 김정민(35) 관장은 정양의 죽음은 자살이 아닌 사회적 타살이라고 지적했다.

네 달치 전기료 88만원을 내지 못해 단전된 가정집에서, 촛불을 켜고 잠을 자다가 불이나 여중생이 숨졌다. 2005년 7월10일 오전 3시 40분 경기도 광주시 일용직 노동자 남씨 집에서 불이 나 슬레이트 주택 30여 평을 태우고 바에서 잠자던 둘째 딸 여중생이 죽었다. 화재 당시 남씨와 딸이 한방에 자고 있었으나, 딸이 외출했다고 생각한 남씨는 혼자 빠져나와 딸만 참변을 당한 것이다. 5월24일부터 전기는 끊어졌고, 남씨 가족은 촛불을 켜놓고 생활해왔다. 경기 침체가 계속되면서 이처럼 전기, 수도, 가스 요금을 내지 못해 고통을 받고 있는 가정이 늘고 있다. 전기료 체납 가구 숫자는 79만 여 가구이고 그 중 기초생활 보호대상자는 36만 가구나 되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처럼 저소득층, 빈곤층들이 전기, 수도, 가스가 끊겨 ‘최소한의 생존권’을 위협받는 일이 없도록 제도적 장치를 강구해야 한다는 지적이 제기되고 있다. 대한 변호사협회는 ‘2003년 인권보고서’에서 외환위기 이후 형성된 빈곤층이 경기침체의 장기화로 인해 사회안전망의 사각지대에서 자살 등 극단적인 상황으로 몰리고 있고, 생계형 자살은 사회적 타살이나 다름없다고 지적했다.

한림대 철학과 오진탁 교수
jtoh@hallym.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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