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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생 지도” “평생 공부” 20년 이어온 약속

기자명 법보신문

동산반야회 무진장 스님과 김재일 회장

부처님께서는 공양 받고 공양 하는 이, 설법하고 설법 듣는 이, 법을 잇고 법을 외호하는 이로서 출가자와 재가자가 상호보완적인 불가분의 관계임을 보여주셨다. 출가자와 재가자의 관계가 상하-종속적이라는 시각이 지배적인 오늘날,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네 부류의 도반으로서 사부대중의 조화는 이 시대 우리에게 남겨진 또 하나의 과제이다. 본지에서는 오랜 세월을 함께하며 서로를 이끌어 주고 있는 출가자와 재가자의 인연,  그들이 만들어가는 포교와 수행, 그리고 세상의 변화를 위한 노력을 통해 사부대중이 함께 만들어 가는 정토의 모습을 모색하고자 한다. 편집자

유독 붉은 가을노을이 창문 가득 들어서고 있었다. 창밖으로 내려다보이는 조계사 백송은 노을을 받아 점점 더 홍조를 띄어가고, 대웅전에서는 저녁예불을 준비하는 듯 바쁘게 걸음을 옮기는 이들의 모습이 사뭇 부산해 보였다. 조계사 앞마당이 빤히 내려다보이는 정화회관2층, 창가 테이블에 마주앉은 두 사람의 모습은 그대로 한 폭의 그림인 듯 하지만 얼굴에서는 일순 팽팽한 긴장이 떠나질 않았다.
“스님, 불교를 바르게 알려면 공부를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궂으나 좋으나 경전 공부 열심히 하는 모임 하나 만들어야겠습니다.”
“하는 거야 좋지. 허나, 하려면 평생 해야지 하다 말 것이라면 아예 시작도 마시게.”
“좋지요. 그렇다면 스님께서도 평생 저희를 지도해 주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 그러세. 평생 부처님 공부하겠다면야.”

혈기왕성 청년과 빈틈없는 스님

1982년, 30대 초반의 혈기왕성한 청년 김재일과 빈틈없는 법문으로 조계사 대중들의 존경을 받고 있는 무진장 스님의 담판은 그렇게 짧게 끝났다. 그리고 얼마 후인 11월 13일. 국화꽃 향기 한창 그윽하던 날 조계사 대웅전에는 53인의 선남선녀가 모여 ‘평생 경전 공부를 하겠다’고 발원하며 동산반야회를 창립했다. 이날 법주로 법상에 오른 무진장 스님과 동산반야회의 깃발을 올린 김재일 회장은 그 후 20여 년의 시간이 지난 오늘날까지 그 가을날 해질녘의 약속을 지켜가고 있다.
강산이 두 번 지나고도 더했을 시간이 흘렀으니 조계사와 그 주변의 모습도 많이 변했다. 하지만 20여 년 전 그날의 모습과 다르지 않은 것도 있다. 추우나 더우나 얇은 괘색 가사를 고집하고 검은 뿔테 안경을 쓰고 어디론가 걸어가는 무진장 스님의 모습은 마치 20여 년의 세월을 사뿐히 넘어온 듯하다. 비록 스님의 얼굴에도 주름이 가득하고 청년 김재일은 어느새 재가불자 지도자로 손꼽히는 중년의 나이가 돼 있지만 말이다.

“율장에 보면 승가의 옷은 이 괘색 ‘카사야’ 하나 뿐이야. 분명히 가르침이 나와 있는데 왜 회색 옷을 입나? 그리고 출가했다는 표시로 머리를 깎았으면서 모자를 쓰는 것이 말이 돼나.”

무진장 스님의 ‘특별함’은 이미 조계사 일대에 정평이 나 있다. 평생 주지 소임을 맡지 않고 자신의 이름으로 재산을 갖지 않은 스님으로도 유명하다. 이유없는 보시를 결코 받지 않고 평생을 조계사 근처에 머물렀지만 그 흔한 찻집 한번 출입하지 않았다. 어떤 이들은 이런 스님의 고집을 어려워하고 간혹 불만을 털어놓는 이들도 적지 않다. ‘쓸데없는 짓’을 했다가는 호통을 듣기 일쑤기 때문이다. 김 회장이라고 예외는 아니다. 동산반야회를 창립한 4년 뒤인 86년, 김 회장은 압구정동에 ‘반야포교원’을 개원하고 스님을 원장으로 모시려 했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무진장 스님의 불호령이 떨어졌다.

‘원장’ 직함에 법문 거부 소동도

“회원들하고 김 회장이 회비 모아서 포교원을 열었는데 왜 내가 원장이 돼야 합니까. 당장 취소하지 않으면 난 법문 안합니다.”

3일을 쫓아다니며 부탁을 했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그렇다고 당장 내일이 개원식인데 원장을 ‘바꿔 버릴’ 수도 없는 일이었다. 속이 바짝 타들어간 김 회장이었지만 물러설 일도 아니었다. 조계종 포교원 포교부장이던 암도 스님을 모시고 개원법회를 강행했다. 당시 동산반야회 회원들 간에도 스님의 이런 행동을 이해 못하는 이들이 많았다. 법주인 무진장 스님과 김 회장의 불화설이 나돌기도 했다. 하지만 개원식이 끝난 얼마 후 김 회장은 천연덕스럽게 스님을 찾아가 유마경 강의를 부탁했고 스님도 별 말씀 없이 강의를 수락해 꼬박 1년을 이어갔다.
“그 후에도 별 말씀은 없으셨습니다. 스님이 왜 그러셨는지 저도 잘 알고 있죠. 혹시라도 스님이 뒤로 돈을 모아 포교당을 열었다는 말이 나올까봐 애초부터 싹을 잘라 버리신 것입니다.”

혹자들은 김 회장에게 “대단하다”고 말한다. 주지는 고사하고 암자 하나 포교당 하나도 마다하신 스님을 20년간 법주로 모시더니 동산회관을 마련한 후엔 아예 스님을 회주로 모셨으니 말이다.
“내가 무슨 소릴 하던 김 회장은 잘 들어 넘기니까 그렇지요.”

스님은 눈길 한번 주지 않고 아무렇지 않은 듯 김 회장을 슬쩍 부추긴다. 법상이 아니고서야 길게 말하기를 즐겨하지 않는 무진장 스님이지만 불자들을 경책하는 말씀엔 언제나 목소리를 높인다.

“불자들이 공부를 해야 합니다. 부처님한테 복달라고 빌어도 부처님이 절대 복 안주십니다. 부처님 가르침대로 살겠다고 다짐하고 부처님의 가르침이 무엇인가를 알기 위해 공부하면서 실천하는 것이 불자들의 진짜 기복입니다. 부처님 가르침대로 살면 반드시 행복해질 수 있다는 믿음, 그 믿음이 진정한 복 아닙니까.”

“무슨 소릴하던 잘 들어 넘기니”

동산반야회는 그런 스님의 바람이 고스란히 담겨있는 곳이다. ‘호통’ 잘 치는 스님으로 유명하지만 동산반야회 회원들을 대하는 스님에게서는 이런 모습을 찾아보기 힘들다. 공부하겠다고 찾아온 이들이니 그야말로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어여쁜 불제자들 아니겠는가.

김 회장과 무진장 스님이 처음 만난 것은 김 회장이 강원도 원주에서 군복무를 하던 1973년이다. 변변한 군법당도 없어 법회를 보러 차를 타고 이웃의 큰 부대로 가야하던 시절, 어느 스님이 이곳까지 와 법문을 하신다는 말씀에 의아한 마음으로 법회에서 만난 분이 무진장 스님이었다. 스님의 간결하고 힘찬 법문에 매료된 청년은 제대 이후 조계사에서 스님과 재회하고 그 만남을 오늘날까지 이어오고 있다.

‘나타난 그 형상을 봄으로써 그 사람의 선악을 알지 말라. 또 잠깐 동안 서로 보고서 마음과 뜻을 같이 하지 말라. (『잡아함경』 가운데 1148 「형상경」 중에서)’는 부처님의 가르침처럼 무진장 스님과 김재일 회장은 오랜 시간 서로를 지켜보고 있다. “평생 경전 공부를 하겠다”는 청년 불자와 “평생 지도해 주겠다”고 약속한 ‘고집스런’ 스님은 2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 날의 약속을 지키며 한 길을 가고 있다. 서로의 손을 부둥켜 잡는 대신 부처님의 가르침을 배우고자 첫 발을 내딛는 이웃들의 손을 이끌어주며.

남수연 기자 namsy@beopbo.com

<사진 설명>
“김 회장은 무슨 소리던 잘 들어넘겨”하며 미소짓는 무진장 스님.

“말씀이 법도에 맞으니까 그렇죠”라며 맞장구 치는 김재일 회장.

동산불교회관 개관식에 맞춰 김재일 회장은 무진장 스님을 회주로 모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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