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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오카야마 고라쿠엔(後樂園) 上

기자명 법보신문

‘劍禪一如’ 이상세계 그린 정원의 백미

<사진설명>1700년에 완성된 오카야마 고라쿠엔. 멀리 오카야마성을 품에 안은 고라쿠엔은 일본인들의 정신세계를 표현한 소우주로 불린다.

학이 뜨고 난 자리에 잔잔한 파문이 일어난다. 물결의 흐름은 넓게 퍼지면서 서서히 약해지고 연 이파리 속살로 스며들어 마침표를 찍는다. 사와노이케 연못과 부드럽고 느슨한 구릉은 하나의 물결을 이루는 듯 하다.

이제 부드러운 모래톱 위 초승달처럼 다듬어진 이랑을 지나, 대나무 숲으로 향하는 작은 다리를 건너리라. 저 돌다리를 건너면 중세 일본인들이 갈망했던 바로 그곳, 선림(禪林)에 도착할 수 있을까. 이 내 근심을 모두 내려놓을 수 있을까.

정신세계 표현한 작은 우주

일본에서 가장 아름다운 정원의 하나로 알려진 오카야마(岡山) 고라쿠엔(後樂園)에 도착했다. 이 정원 이름에는 근심을 먼저 하고 나중에 즐거움을 누린다(先憂後樂)는 의미가 담겨있다.

고라쿠엔은 오카야마번(岡山藩) 영주 이케다 쓰나마사(池田綱政)가 가신인 쓰다 나가타다(津田永忠)에게 명하여 1687년에 착공, 1700년에 완성된 정원이다. 오카야마 성주 이케다 쓰나마사는 자신의 몸과 마음을 가다듬고 손님을 접대하는 장소로 사용하기 위해 오카야마성 바로 뒤편의 작은 섬을 하나의 정원으로 만들었다.
고라쿠엔은 일본인들의 정신세계를 표현한 소우주이다. 섬 한가운데 커다란 호수를 파고 그 안에 중국 태산을 본뜬 작은 섬을 만들었다. 작은 초막은 도연명이 노닐었다는 무릉도원이다. 그리고 넓은 들에는 9개의 정(井)자식 밭을 만들어 연꽃과 꽃창포, 차나무, 벼와 꽃창포를 심었다. 이는 맹자의 정전제를 본떠 만든 유교적 이상세계의 표현이다.

<사진설명>일본인들은 검의 날카로움을 선정으로 다스리겠다는 마음에서 정원에 아미타불을 모신 불당을 세운다. 고라쿠엔에 세운 지겐도 불당.

주변 둘레에는 도랑을 판 다음 그 너머로 숲을 조성했다. 정원 내부를 회전하는 시내는 우주의 원형을, 그 너머 매화와 대나무 숲은 순수와 절개가 살아있는 피안의 세계를 담았다. 숲 곳곳에는 여우가 모셔진 신사, 아미타불을 모신 불당을 짓고 이케다 집안의 조상신(호토케)을 모신 사당도 마련돼 있다.

고라쿠엔은 전형적인 일본의 카이유(回遊)식 정원인데, 이는 연못의 주위를 따라 돌면서 회유하듯이 감상할 수 있는 구도로 조성된 형태를 의미한다. 카이유식 정원은 연못 중심의 주유식 정원, 다실과 정원을 갖춘 로지식, 초가지붕으로 만든 암자 분위기의 초암식 정원 등 일본의 다양한 정원 문화가 이곳에 총망라돼 있는 것이다.

일본 중세의 다이묘가 자신의 성 부근에 이처럼 정원을 조성하는 일은 흔한 일이었다. 정원을 조성하는 1차적인 목적이 명상을 통한 고요함에 있었기 때문에 모든 조경은 선의 원리에 따라 설계되었다. 그래서 서양인들은 일본의 정원을 ‘Zen Garden’이라고 부른다. 바위나 돌, 나무와 작은 언덕, 웅덩이에는 모두 선의 정신을 담았다. 정교함 대신 자연스러움을 택했기 때문에 모든 풍경은 하나의 부드러운 선으로 연결된 듯한 느낌이 들 정도로 단조롭다.

일본의 정원을 이해하는데 결코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선불교의 영향이다. 선불교는 이미 7세기경 일본에 유입되었지만 크게 융성한 것은 무로마치 막부 이후부터이다.

13∼14세기 란케이 도류(蘭溪道隆), 곳탄 후네이(兀菴普寧), 잇산 이치네이(一山一寧) 등 송·원의 고승들이 일본으로 건너가 조정과 막부의 두터운 신임을 받았다. 이들에 의해 남송의 선이 일본에 크게 유행하게 되었는데, 선종의 유행과 함께 형성된 당시의 일본 문화를 고잔(五山) 문화라고 일컫는다.

<사진설명>순수와 절개가 살아있는 피안의 세계를 염원하며 조성한 대나무 숲.

선(禪)과 칼. 도저히 어울릴 수 없을 것 같은 이질적인 두 요소가 합쳐져 독특한 중세 일본 문화를 형성했다.

무로마치 시대 사무라이들에게는 무인으로서 생사결단의 각오가 필요했고, 또 한편으로는 새로운 지배계급으로서의 주체성이 필요했다. 이들의 필요에 가장 맞아떨어진 사상이 바로 불교의 선이었던 것이다. 금강석도 단번에 자를 수 있는 절대적인 진리의 세계는 이렇게 사무라이들의 칼과 가탁해 검선일여(劍禪一如)라는 언어를 만들어냈다. 검을 다룰 때 검과 자신이 하나가 돼야 하는 정신집중의 상태를 선으로 표현한 것이다.

그리고 사무라이들은 연못과 구릉으로 이루어진 정원 속에 자신들의 관념 속에 담긴 선의 세계를 표현하고자 했다. 고요함과 단순함, 자연스러움이 어우러진 풍경 속에 차와 불교, 신도가 살아있는 일본인들의 이상세계는 선 정원으로 승화됐다.
이처럼 일본의 선 정원은 단순히 선불교의 세계도 아니며, 신도나 유교만의 세계도 아니다. 일본인들의 이상 세계가 함축된 미니어처인 것이다.

일본인들은 새로운 무언가를 수용할 때 그것을 끊임없이 이전의 것과 동화시키고 현재화하는 경향이 강하다. 그런데 이 때 과거의 것이 부정되는 것이 아니라 계속 첨가되고 축적한다. 그리고 그것을 부정하는 논리 대신 공존과 화해의 정신이 발달했다. 일본에 신도와 불교가 뒤죽박죽 섞인 것, 그리고 사무라이 문화와 선불교가 동시에 공존할 수 있었던 것은 일본인 특유의 정신세계와 밀접하게 연결돼 있다.

공존·화해의 정신 담아

호흡을 가다듬은 다음 발끝을 살피며 고라쿠엔을 천천히 걸어가기 시작했다. 물 위에 드리워진 그림자는 우주의 만물을 있는 그대로 투영시키고 있었다.

플라톤의 비유처럼 우리 눈에 비친 사물은 모두 동굴 벽에 비친 그림자에 불과할 지도 모른다. 진실은 우리가 끝없이 찾아 헤매는 이데아일 뿐, 누가 이 생에서 완전히 소유하고 완전히 사랑하였다고 말할 수 있으랴. 물 위로 흘러가는 구름을 잡을 수 없듯이, 시간도 공간도 사람도 잡을 수 없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으리.

선의 세계는 노자 『도덕경』의 첫구절처럼 말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명명할 수 있는 것도 아닐 것이다. 항상 무욕(無欲)으로써 무(無)의 오묘함을 보고, 항상 유욕(有欲)으로써 유(有)의 왕래를 볼 뿐.

나 또한 중세 일본인들이 만들어낸 선의 세계에 대해 부연 설명하고 싶지는 않다. 아니 할 수 없다는 것이 더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그런데 문득 가지런하게 빗질한 듯한 모래밭에 들어가 맨발로 휘저어버리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선의 본질은 기존 질서를 넘어선 파격, 그 이면의 고요한 본래 자리일 터. 그렇다면 수백년간 내려온 고라쿠엔의 정형성 또한 파괴된 후에야 그 본질을 볼 수 있지 않을까. 무모한 충동인지선기(禪氣)인지 모를 무언가가 번득 지나가는걸 참을 수 없으니 이를 어찌하나.

takhj@beop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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