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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인도 모헨조다로

기자명 법보신문

여전히 베일에 싸인 인더스 문명의 발상지

4000년전 유목 생활방식 지금까지 그대로 유지
불교 영향 받은 것은 분명… 불교유적 단정 위험


“무엇을 볼 것인가?”
이 단순한 의문은 해묵은 역사 앞에 서면 가소로운 짓이 되고 만다.

바로, 모헨조다로(Mohenjo-Daro) 같은 곳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닌가 싶다. 1980년대 말부터 몇 번 모헨조다로를 찾았던 나는, 때마다 그 황량한 모래밭에 앉아 알 수 없는 ‘아득함’을 느끼곤 했다. 그건 현대인과 단절된 세월만 소복이 쌓여있는, 하여 교통할 수 없는 답답함 같은 것이었다.

그로부터 한 번 두 번 모헨조다로를 찾으면서 나는 서서히 ‘무엇을 볼 것인가?’라는 화두로부터 해방되었다. 그냥 앉아서 또는 우두커니 서서 그 모헨조다로를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그렇게 내가 흘러가는 역사 속에 한 점으로 담겨있다는 사실을 느끼는 것만으로도 행복했기 때문이다.

고백컨대, 나는 처음 모헨조다로를 찾던 날 제법 우쭐대며 그 사막공항에 내렸다. 몇 달에 걸쳐 모헨조다로 관련 역사 자료를 뒤적여 보았던 나는 이미 돌팔이 고고학자가 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 돌팔이의 꿈은 모헨조다로 공항에 내린 뒤 30분이 지나지 않아 접을 수밖에 없었다. 그 모헨조다로가 내 어설픈 지식이나 상상 같은 것들로부터 너무 멀리 떨어져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던 탓이다.

내가 그 모헨조다로를 앞에 두고 부끄러워하면서 감히 범접할 수 없는 영역이라고 여겼던 건 무슨 엄청난 역사성이나 정신적 차원의 문제가 아니었다.

그건 매우 단순한 ‘온도’의 차이에서 비롯되었다. 섭씨 54도, 그 불같은 사막 활주로에 내린 뒤 동네 경운기를 얻어 타고 모헨조다로박물관호텔에 이르기까지 걸린 시간이 어림잡아 20여 분쯤, 그리고 거의 까무러친 상태로 숙박부에 사인하고 호텔 방에 짐을 내린 시간이 한 10여 분쯤, 그렇게 합쳐 30여 분 만에 역사를 향한 내 건방진 태도는 끝장나고 말았다.

그 사연도 간단하다. 에어컨디션 같은 현대적 장치라곤 전혀 없는 그 호텔 방에 들어서는 순간, 온 몸을 휘감아 도는 냉기를 느낀 나는 어디로부터 그 냉한 바람이 들고 나는 지를 찾아 구석구석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이내, 곳곳이 트인 벽돌사이로 사통팔달 바람이 일고, 그 바람이 서로 부딪치면서 공기를 냉각시킨다는 사실을 깨닫자마자 나는 지체 없이 역사 앞에 무릎을 꿇었다.

그랬다. 사람이 살아가기 위한 가장 기본적인 조건인 ‘온도’ 같은 건 상상도 해본 적 없었던 내게 그 방은 살아있는 역사 교육장이었다. 내가 읽고 온 그 수많은 모헨조다로 역사 자료 같은 것들은 한낱 사치거리에 지나지 않았던 셈이다.
그 날, 나는 박물관호텔 코앞에 펼쳐진 웅장한 모헨조다로 유적지를 제쳐놓고 대신 현대인들이 살고 있는 마을부터 찾아갔다. 사막이 뿜어내는 열기와 달리 사람들이 살고 있는 집들은 박물관호텔 방처럼 저마다 냉기가 돌았다. 모두 똑같은 벽돌을 사용한 똑같은 가옥구조를 지녔음을 보았고, 그 밑감들과 구조는 다음 날 아침 4,000년 묵은 모헨조다로 유적지에서 다시 볼 수 있었다.

그렇게 4,000년을 지나는 동안 모헨조다로 사람들은 똑같은 재료와 똑같은 방식으로 집을 짓고 똑같은 삶의 모습을 대물림 해 왔음이 드러났다.

많은 이들이 ‘역사발전’의 가치를 말해왔고, 또 더 많은 이들이 ‘현대화’를 떠들어왔지만 모헨조다로는 그 모든 것들을 비웃었다. 적어도 내게 모헨조다로는, 또 모헨조다로 사람들은 ‘전통’의 승리를 선언했다. 유적과 유물을 통해 보면 4,000년 전 인더스강 한 기슭에 세운 모헨조다로와 오늘날 그 둘레에 살아가는 모헨조다로 사람들 사이에는 아무런 변화도 차이도 없다.

메소포타미아, 이집트, 중국과 함께 이른바 세계 4대 문명권으로 불리는 인더스문명의 중심지였던 모헨조다로는 그 옛날의 얼굴을 오늘날까지 고스란히 이어오고 있다. 비록 형태로 따진다면 그 옛날 모헨조다로는 허물어져버렸지만, 그 삶의 방식은 지금도 여전히 유효한 가치로 전해오고 있다.

오늘날 집들은 4,000년 전의 그 집들이고, 오늘날 물 항아리와 장식용 귀걸이는 4,000년 전의 그것들과 같다. 오늘날 물소는 4,000년 전 유물 속에 등장하는 그 물소들과 빼닮았고, 오늘날 사람들은 4,000년 전 그 유물 속의 사람들과 똑같은 얼굴을 하고 있다.

이미 4,000년 전 그 사람들은 지금과 같은 환경에서 살아남기 위한 최적의 조건을 깨닫고 있었던 모양이다. 이미 모헨조다로는 주어진 환경과 조건 속에서 예나 지금이나 최고로 발전한 단계라는 뜻이다.

따라서 현대식 사고를 동원한다면 모헨조다로를 결코 이해할 수 없다. 현대식 에어컨디션으로는 섭씨 60도를 오르내리는 모헨조다로에서 생존이 불가능하고, 현대식 플라스틱 물통으로는 마실 물을 보관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게 오늘날 모헨조다로 사람들은 자신들이 살아가는 모습으로 4,000년 묵은 역사를 증언해 주면서 동시에, 고고학적 발굴이나 유적조사만으로는 모헨조다로를 온전히 복원할 수 없다는 사실을 가르쳐 주고 있다.

실제로 1920년대 서양 고고학자들이 발굴을 시작한 뒤, 1986년부터 파키스탄과 미국학자들이 대규모 학술조사사업을 벌여왔고, 또 유엔이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해 보호해왔지만 여전히 모헨조다로는 수수께끼로 남아있다.

모헨조다로 고대어는 해석 단서마저 찾지 못한 상태고, 최소 7번이 넘는 홍수로 파괴와 복구를 거듭해 온 모헨조다로의 그 주인공들이 누구인지조차 밝혀내지 못했고, 심지어 거대한 대중탕의 용도가 시민을 위한 목욕탕이었는지 아니면 종교·정치적 장치였는지 조차 알아내지 못한 상태다.

그런가 하면, 눈을 반쯤 게슴츠레하게 뜨고 두 손을 모우고 있는 토우가 불교식 참선을 하는 모습이라며 모헨조다로를 모조리 불교로 해석해버리는 ‘용맹성’도 없지 않다. 요새 형태를 띠고 있는 모헨조다로 유적지의 정상부를 불탑이라 여기는 것도, 또 대형 강당을 참선도량이라 여기는 것도 논란 가운데 하나다.

모헨조다로가 4,000년 역사를 지녔고 그 과정에 수많은 이들이 시대별로 주인 노릇을 해왔다고 본다면, 오늘날 인디아, 파키스탄, 아프가니스탄을 비롯한 남아시아-중앙아시아 일대를 관통하는 모든 지역들과 마찬가지로 모헨조다로 역사에도 불교가 깊이 스며든 건 자연스러운 현상임에 틀림이 없다.

게다가 모헨조다로에서 불교를 증언하는 다양한 유물과 유적들이 출토된 것도 사실이다. 그렇다고 해서 불교보다 더 긴 역사를 지닌 모헨조다로 머리와 꼬리를 잘라버리고 오직 불교시대만을 강조해서 마치 모헨조다로가 불교유적인 양 단정해버리는 극단적인 방식까지 인정할 수 있다는 뜻은 아니다.

‘누구의 것’도 ‘어느 종교’의 것도 아닌 모헨조다로는 결코 파멸된 문명도 끝장나버린 문화도 아니다. 4,000년 전이나 지금이나 여전히 살아 숨쉬고 있다. 다만 “무엇을 볼 것인가?”라는 현대인들의 계산법 속에서 정체되어 왔을 뿐이다. 이제, “어떻게 볼 것인가?”라는 새로운 화두를 뽑아 들 시대가 아닌가 싶다.

한겨레21 아시아네트워크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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