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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오카야마 고라쿠엔(後樂園) 下

기자명 법보신문

소욕지족의 道 가르친 초막
무사의 殺氣마저 녹이다

<사진설명>야쓰하시(八橋) 다리와 류텐(流店) 정자. 정자 한 가운데를 물길이 지나며 내부에는 아름다운 돌들이 배치돼 있다.

‘분명 지겐도 불당 앞에 다실이 있다는데….’
한 손에는 카메라를, 다른 한 손에는 안내문을 들고 이곳저곳 뛰어다녀도 다실을 찾을 수가 없다. 지겐도 불당 앞을 서너 차례 돌다가 문득 허름한 초막 하나가 눈에 들어온다. 순간 ‘다도의 진미는 초암에 있다’고 역설한 센 리큐(千利休, 1522~1591)의 말이 떠올랐다.

‘설마 저 원두막이 다실일까.’ 건물 앞으로 다가서자 ‘고주산쓰기 불당 다실(五十三次腰掛茶室)’이라는 팻말이 선명하게 보인다.

며칠전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황금 다실을 비롯해 중세 귀족들의 화려한 다실에 눈이 높아질 대로 높아진 여행자에게 이 건물은 평범하다 못해 실망스럽기까지 했다. 한숨을 접고 허름한 다실에 앉아 자판기 녹차 한 잔을 즐기기로 했다. 그런데 이 때 의외의 풍경이 눈길을 사로잡는 것이 아닌가. 오카야마성과 사와노이케 연못 그리고 연못 위에 떠있는 인공섬 나가노시마섬과 일직선상으로 연결돼 있는 이 다실은 고라쿠엔 내에서도 명당 중의 명당에 자리잡고 있었던 것이다. 일본 수묵화를 연상시키는 전경을 바라보며 차 맛을 음미하노라니 내가 아주 오래전부터 이곳에 있었던 듯한 묘한 느낌이 스쳐간다.

“아, 이것이 리큐가 말한 다도의 기본정신이구나!”

차가운 녹차를 혀끝으로 느끼며 리큐가 차의 미덕으로 꼽은 ‘화경청적(和敬淸寂)’을 가만히 읊조려 보았다. 화경청적이란, 차는 서로 다른 개성을 가진 이들을 하나로 잘 어우러지게 하고(和), 상대를 존엄한 인격체로 인정하여 공경하는 마음을 갖게 하며(敬), 마음에 욕심을 버림으로써 깨끗한 정신상태를 유지하니 주변의 어지러움에도 더러워지지 아니하고(淸), 고요한 상태로 이끌어 어디에도 걸림이 없게 만든다(寂)는 일본 다도의 기본정신이다.

피비린내나는 사무라이들의 대결장 한복판에서 차의 향기로 이들을 다스리려했던 ‘천하 제일 차노유(茶の湯)의 명인’ 리큐. 비록 권력의 희생양으로 비극적인 삶을 마감할 수밖에 없었지만 후대인들은 그를 일본 다도를 완성시킨 성인(茶聖)으로 추앙해오고 있다.

일본에 처음으로 유입된 차는 9세기 초 견당사(遣唐使)들이 당에서 가져온 덩어리차(團茶)였다고 한다. 이후 송으로 유학을 떠난 에이사이(榮西) 스님이 1191년 차 종자를 가져오면서 본격적인 차 문화가 시작된다. 에이사이 스님은 후쿠오카에 일본 최초의 선종 사찰 쇼후쿠지(聖福寺)를 세우고, 일본 땅에 선(禪)과 차를 함께 심었다. 애초부터 일본의 차와 선은 한 뿌리에서 태어난 다른 모양의 꽃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선방의 차 문화는 와비차(侘び茶)라는 이름으로 전승된다.

리큐는 에이세이 스님으로부터 쥬코우(珠光) 스님, 조오 스님으로 이어지는 와비차를 완성시킨 차의 명인이다. 와비차는 교토 귀족들의 차문화인 동산류 차문화에 대비되는 개념으로, 선종 사찰로 맥이 이어진 차 문화를 의미한다. 와비라는 말을 굳이 풀이한다면 ‘초막’ 혹은 ‘한적함이 있다(有閑)’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겠다. 즉 초막에 앉아 한적함을 즐기는 선사들의 차 문화가 바로 와비차라 이름 붙여진 것이다.

선사들의 승방에서 형성된 차 문화는 점차 중세 무사층에게도 흡수되었다.

일본의 전국시대는 세계 역사상 유례가 없을 정도로 많은 전란이 치러지면서 음모와 배신, 살육이 난무하는 혼란의 시대였다. 당시 무사들은 잠을 자는 순간까지 머리맡에 검을 지니고 있을 정도였다고 한다. 전국시대를 제패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자는 동안에는 눈을 부릅뜬 채 잠들었다고 하니, 그들의 삶을 쇠사슬처럼 칭칭 감고 있던 극도의 공포와 긴장 상태를 가히 짐작할 수 있다.

이같은 전란의 시대에 선과 차가 발달할 수 있었다는 것, 게다가 오다 노부나가·도요토미 히데요시 등 전국시대의 패자들에 의해 차 문화가 선도되었다는 사실이 언듯 모순으로 비춰질 수도 있다. 하지만 히데요시가 당대 최고의 차 명인 리큐를 불러 말한 내용을 보면 그 시대에 있어 ‘차’가 어떤 대상물이었는지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다.

히데요시는 리큐에게 “불안해하는 서민들의 마음을 가라앉히고, 거칠기만 할 뿐 우아함을 모르는 무사들의 마음을 순화시켜, 두 계층의 화합을 만들어내라”고 요구했다. 전란에 지친 일반인들의 불안감과 무식한 사무라이의 살기를 동시에 다스리는 방법이 바로 다도였던 것이다.

2평 혹은 4평 남짓한 다실에 앉아 무릎을 꿇고 가장 공손한 자세로 차를 내리고, 최대한 공손한 몸짓으로 차를 마시는 일본의 다도는 보는 이로 하여금 숨을 턱 막히게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적어도 그 좁은 다실에 들어서는 순간 중세 무사들은 칼과 함께 살기(殺氣)를 풀어놓을 수 있었다. 그들에게 있어서 차는 잠시나마 숨통을 틀 수 있는 해방구였던 것이다.

<사진설명>고주산쓰기 불당 다실(五十三次腰掛茶室). 리큐의 와비차 정신이 그대로 드러나 있는 초막형 다실이다.

차가 귀족 문화의 일부로 자리 잡으면서 다도라는 예법 또한 형성됐다. 여기에는 다구 감별법, 점다법(點茶法), 서원 장식법, 다실에 맞는 꽃꽂이 등 차와 관련된 수많은 격식들이 포함돼 있었다. 또한 다회가 귀족들의 사교 모임으로 정착되면서 선종의 본래 정신과는 달리 화려한 다실과 복잡한 의례가 강조된다.

여기에 반기를 든 인물이 바로 리큐였다.

리큐는 “다도란 오직 물을 끓여 차를 달여 마시는 것”이라며 “다도의 길에 정해진 것은 없다”고 역설했다. 그리고 날이 갈수록 사치스러워지는 다실을 비판하며 다다미 두 장 짜리의 초암에서 마시는 소박하고 검소한 차 문화를 주창했다. 리큐의 스승들은 에이사이 스님의 와비차 정신을 이어나간 선종의 승려들이었고, 따라서 ‘다선일미(茶禪一味)를 추구한 리큐의 다도관은 선사상에 뿌리를 두고 있었다. 리큐가 말한 다도의 정의에는 이런 그의 생각이 잘 묻어있다.

다도는 대자(台子:다구를 얹는 대)를 갖추어 차 마시기를 기본으로 하더라도 그의 궁극적인 것은 초암(草庵) 다실 이상의 것은 없다. 초암의 다도는 첫째로 불교 수행으로서 깨달음을 얻는 것이다. 집의 모양새, 음식의 맛을 탐하는 일은 속된 것이다. 가옥은 새지 않을 만큼, 식사는 굶주리지 않을 정도면 족하다. 이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이요, 다도의 참뜻이다. 물을 길어다가 땔감에 불을 붙이고 차를 달여서 부처님께 바치고 사람에게도 나누어주고 나도 마신다. 꽃을 챙기고 향을 피운다. 이 모두가 부처님과 고승의 행적을 배움이다.

이는 사치스러운 귀족들의 차 문화에 대한 비판이자, 일본 차 문화의 본래 정신인 선으로의 회귀였다. 그럼에도 와비차의 명인들은 권력의 주변에서 차를 따르는 길을 선택했다.

<사진설명>가코노타키 폭포 안에는 또 다른 선정원이 펼쳐져 있다

리큐는 스승 조오 스님에 이어 오다 노부나가의 다도자(茶道者)가 되었고 노부나가 사후에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총애를 받아 ‘천하 제일 다장(茶匠)’의 지위를 얻었다.

차를 통해 절대미의 경지, 차와 선이 하나되는 세계를 갈망했던 리큐의 고상한 취향은 어쩌면 처음부터 권좌와는 어울릴 수 없는 성질의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탁월한 다도 실력으로 인해 최고 권력자들은 그를 가까이 두길 원했다. 절대정신과 권력의 괴리 속에 놓여진 그의 운명은 결국 비극으로 치닫게 된다.

리큐의 다도는 귀족들은 물론 대중들에게도 커다란 반향을 일으켰다. 다도에 있어서 불완전함과 검소함을 강조하며 차의 본질 속으로 들어갈 것을 주창한 그의 깊은 안목에 당대 사람들이 호응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데 리큐의 인기가 치솟자 그의 정적들은 히데요시에게 리큐가 권좌를 노린다고 모함을 한다. 가신 중에 한 명은 리큐가 내미는 초록빛 물에 치명적인 독이 있어 히데요시를 쓰러뜨릴 것이라고 전했다. 그러자 늘 죽음의 공포에 시달리던 히데요시는 리큐에게 “네가 그렇게 아름다움을 추구한다면, 그 아름다움을 위해서 죽을 수도 있을 것”이라며 스스로 생명을 끊을 것을 명한다.

자살을 명받은 리큐는 최후의 다회를 개최했다. 자신과 가까운 문인들을 초대해 차를 돌린 다음 그가 평생 아끼던 차 도구들을 하나씩 선물했다. 하지만 그가 마셨던 찻잔만은 마지막 잔을 비운 뒤 깨뜨리고 만다. “불행한 자의 입에 더럽혀진 찻잔은 다른 사람이 써선 안된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리큐가 마지막으로 깨뜨린 찻잔은 그가 그토록 애지중지하던 조선의 막사발로 알려져 있다. 그리고 리큐는 단도로 배를 갈라 스스로 생을 마감했다.

고라쿠엔 서쪽에 위치한 차소도(茶祖堂)에는 일본 차의 시조 에이사이 선사와 다성으로 추앙받는 리큐가 나란히 모셔져 있다. 이 건물은 1887년 리큐도 다실을 옮겨온 것이다.

멀리 오카야마성을 바라보면서 이곳에서 차를 마시던 중세 차인들의 모습을 떠올려 보았다. 일본인들의 이상적인 세계를 병렬식으로 그려놓은 고라쿠엔을 보고 있노라니 이곳에 중세 일본인들의 의식세계가 그대로 드러나있는 듯 했다. 한 뼘의 여백도 없이 꽉 짜여진 정원구조는 그들의 긴장된 삶만큼이나 경직돼 보인다.

부조화 속에서 조화를 이루며, 불완전한 인간의 완전한 세계를 꿈꾸던 리큐는 결국 마지막 찻잔을 깨뜨리고 스스로를 산화시켰다. 평생 차의 미학을 추구했던 리큐가 찻잔을 깨뜨리는 순간 그는 아름다움도 추함도 아닌 그 너머의 세계로 날아갈 수 있었을까.

takhj@beop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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