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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땀 한 땀 수 놓으며[br]번뇌-망상 지워갑니다”

기자명 법보신문

‘25조 가사자수’로
대통령상 수상 최 정 인 씨

<사진설명>인로왕번(引路王幡)을 자수로 새긴 작품. 그는 자수를 놓으며 ‘부처님 감사합니다’를 가슴에 새긴다.

유난히도 눈이 많이 오던 2001년 겨울 어느 날. 시계 침이 새벽 3시를 가리키는 시간까지 잠을 이루지 못한 최 씨는 마음을 다잡고 집을 나섰다. 전라도 순창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고 서울로 시집와 가장 힘들었던 그 해 겨울. 더 이상 갈 곳 없는 막막함에 그저 하염없이 눈물만 흐를 뿐이었다. 여리고 여린 여인네의 가냘픈 마음은 갑자기 들이닥친 현실이라는 무게에 짓눌려 이리저리 굴리고 찢기고 파헤쳐진 볼품없는 사과 같았다.

그는 한 번도 가본 적 없었던 도선사로 무작정 발길을 돌렸다. 대문 밖을 나서는 그 순간부터 볼을 타고 흐르는 뜨거운 한 방울 한 방울은 가슴에 맺힌 설움과 힘겨움을 애써 ‘괜찮다, 괜찮다’고 위로하는 듯했다.

어려움 딛고 佛 작품 만들어

<사진설명>제30회 대한민국전승공예대전 대통령상을 받은 최정인 作 ‘25조 자수가사’.

“누구나 살면서 한번은 시련이 있게 마련이잖아요. 제게 그 겨울은 그런 시간이었습니다. 그런데 전 왜 그렇게 저만 힘들고 아프다고 생각했는지, 세상에 전부라고 여긴 엄마를 잃은 어린아이같이 서럽고 아프기만 했죠. 자의반 타의반으로 갑작스레 어려워진 생활환경과 그로 인해 부딪히는 크고 작은 일들, 지금 생각해보니 그 상황은 부처님께서 ‘나 아닌 남을 위해 살라’는 가르침을 주기 위해 던진 숙제였나 봅니다.”

낡은 구두에 의지해 발목까지 쌓인 눈을 헤치며 도선사로 가는 비탈길을 오를 때 발끝으로 전해 오는 시리고 찬 고통은 가슴에 담긴 답답함과 쌓인 원망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바람에 흩날리는 낙엽소리에도 흠짓 놀라 뒤돌아보기를 여러 번. 그 모습은 마치 두 눈을 잃은 지 얼만 안 된 처량한 누군가가 목마름을 달래기 위해 물을 찾아 두 손으로 땅을 짚으며 헤매는 모습과 같았다. 어렵게 대웅전에 다다른 그는 어둡고 차가운 마룻바닥에 앉아 멍하니 부처님만 바라보았다. 무심하게 그를 내려다보던 부처님은 어느새 먼동의 여린 빛과 함께 그를 향해 살며시 미소 짓고 있었다.

“그때 흘린 눈물은 부처님이 제게 내려주는 감로수 같은 것이었죠. 누군가 앞에서 한 번도 표현하지 않았던 감정들을 쏟아내는 시간이었으니까요. 어두컴컴한 법당에 부처님과 마주 앉아 애써 참아냈던 응어리를 마음껏 풀어냈습니다. 그때 ‘그저 몸 건강한 것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나보다 어려운 이들을 도우며 살라’는 귀한 말씀을 얻었습니다. 그리고 그 시간 이후 희망을 가슴에 한 아름 안고 세상과 정면으로 맞서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리고 ‘쟁이’라는 것에 감사하고 그 시간 이후 다시 ‘참 나’로 태어나게 도와주신 부처님께 감사의 마음을 담아 작은 보답을 하기로 결심했습니다.”

작업을 위해 전국의 사찰을 찾아 가사 제작의 기법과 경전에 대해 공부했다. 스님들께 자문을 구하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25조 자수가사’에 대한 애정은 더해갔다. 한 땀 한 땀 자수틀 위의 왼 손과 아래의 오른손이 부처님을 향해 나아가는 마음으로 바늘을 주고받기를 수천 수만 번. 그렇게 ‘25조 자수가사’가 탄생했다. 제30회 대한민국전승공예대전 최고상인 대통령상을 수상한 최정인(49) 씨의 ‘25조 자수가사’는 오로지 부처님 한 분만을 생각하며 감사의 마음을 오롯이 담아낸 것이다. 1981년 우연히 전시장에서 접한 자수 작품에 매료돼 책을 보며 홀로 자수를 시작한 지 26년 만에 이룬 쾌거였다.

문화재 이수 없이 홀로 외길

더욱 값진 것은 그 결실이 문화재 이수 경력이 없다는 그의 설움을 단번에 풀어주는 것이었기에 그는 더더욱 부처님께 감사했다. 사실 문화재 이수 경력은 전통자수의 길을 가는 예술인들에게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때문에 그의 수상은 많은 예술인들에게 혼자서도 떳떳하고 당당하게 예술의 길로 갈 수 있다는 희망을 주는 사례로 꼽힌다.

“작품을 만들어 어디를 가더라도 혹은 전시를 하더라도 누구누구의 전수자라는 명함이 없다는 이유로 참 오랫동안 가슴앓이를 했었죠. 누구나 작품에 앞서 그 사람의 배경과 선생에 관심이 가는 것은 당연하겠죠. 그저 자수가 좋아 수많은 밤 홀로 지샌 날들에 대해 스스로 고맙게 느껴졌습니다.”

자수는 섬세하고 정교한 예술이지만 그 결과물은 참으로 더디다. 빠르고 편한 것만을 추구하는 현대인들에게 한 줄의 실로 넓은 공간을 채워나가는 일은 한가로운 투정으로 밖에 여겨지지 않는 외로운 예술의 길처럼 보이기도 한다.

보통 전통자수는 조선시대의 것을 말한다. 용도별로 구분하면 불교자수와, 생활자수, 감상용 자수 등으로 구분된다. 그 중 양반 및 궁중의 자수는 사실적이고 장식적인 문양, 반복적이고 단순한 기법이 특징이다. 반대로 민가의 자수는 소박하면서도 자유로워 추상적이고 기하학적인 문양들이 대부분이다. 그가 선보이는 전통자수 역시 큰 틀은 지키지만 그나름의 분위기와 자유로운 색감을 볼 수 있다는 점에서 더욱 매력적이다. 이번에 수상한 ‘25조 자수가사’는 전체가 그림자수로 이루어져 매우 독특한 형태를 띄는데 본래는 우리나라 654호 ‘25조 자수가사’를 참고해 창작과 색감을 더해 만든 것이다.

불교 작품 보시 계획

<사진설명>옻칠장에 새긴 자수를 보고있는 최정인 씨.

1단에는 부처불, 2단 3단에는 보살상, 4단에는 불경, 5단은 존자가 자수되어 있다. 전체는 화려해보이지만 각 상들을 이어 붙여 완성된 조각자수로 조선 민가자수의 소박함을 닮아있다.

앞으로 “불교 문양과 영산재 등 의식에 필요한 번(幡)과 부처님의 가사를 중점적으로 작업해 필요한 사찰이나 스님께 보시할 계획”이라는 최 씨는 오늘도 늦은 밤까지 ‘부처님 감사합니다’를 가슴에 새기고 한 땀 한 땀 명주로 도안의 빈 공간을 조금씩 채워나가고 있다.

안문옥 기자 moonok@beop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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